176화
성도.
신들의 성역.
필멸의 존재들은 절대 알 수가 없는 곳.
불멸에 이른 자들조차 이곳을 아는 이들은 세상에 극히 적었다.
그 성도에서도 탑의 꼭대기 층은 신들의 유희를 담당하는 시스템 부서가 있었다.
삐-! 삐! 삐!
난데없이 들린 경고음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중앙 스크린으로 향했다.
“뭐야? 이 소리는?”
상관으로 보이는 자의 말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던 무형의 존재가 대답했다.
“7우주 지구 행성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7우주라면 코드명 아포칼립스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그곳은 태왕이 직접 설계를 하고 코어로 작동이 되고 있는 곳인데. 무슨 문제가 생긴단 말이냐.”
“알아보겠습니다… 가드에 걸린 것을 보니 버그의 한 종류인 것 같습니다.”
“무슨 버그?”
“그게… A-4N1. 1급? 1급입니다! 주신관님.”
“뭐, 뭐라고? 1급?”
깜짝 놀란 그가 재빨리 시스템 스크린으로 향했다.
그러자 정말로 1급 위험 코드가 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해독이라니? 뭘 해독한다는 거야?”
가드 전송 데이터에 적힌 메시지를 보고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 말에 수하가 대답했다.
“버그 자체가 암호화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걸 푸는 과정이라 그런 것…….”
“그럼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른 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성도 코어로 작동되는 가드가 해독을 하고 있다니? 이건… 비상 상황이다.”
중얼거림과 동시에 밖을 뛰쳐나간 그가 공간 이동을 전개했다.
그리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누군가의 서재로 보이는 곳이었다.
“주신관이 여긴 어쩐 일이지?”
후방.
소파에 앉아 차를 들고 있는 순백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런 사내를 보며 무릎을 꿇은 그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카, 카시오페아 님. 계셨군요.”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나? 그보다 탑 내부에선 공간 이동이 금기시되어 있는데,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인가, 규칙까지 깨고 이리도 급히 넘어온 이유가.”
“지구 아포칼립스 시스템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아포칼립스? 그건 예전에 태왕께서 차원의 신들에게 친히 하사한 유희 거리가 아니던가. 나 또한 제작에 참여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그곳에 버그가 생긴 것 같습니다.”
주신관의 말에 카시오페아라 불린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자네, 요즘 농담도 하나? 그 시스템엔 버그가 존재할 수 없어.”
“맞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가드에 걸려 이곳으로 전송이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을 했습니다.”
“직접? 버그 코드는?”
“A-4NI. 1급입니다.”
“1급이라면 치명적 결함이란 뜻인데. 매뉴얼엔 뭐라 나와 있지?”
“A-4NI는 타임라인의 붕괴로 알고 있습니다.”
“타임라인의 붕괴라… 그렇다면 벌써 봉인을 푼 놈들이 나온 건가. 진원지는?”
“암호화되어 있어서 해독을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주신관의 말에 카시오페아의 표정이 또 한 번 변했다.
이번엔 그리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성도 코어의 핵으로 작동하는 가드가 버그의 진원지를 바로 알아내지 못하다니.”
“저도 그게 의문인지라 이리 바로 달려온 것입니다.”
“음. 해독 중이라… 우리가 잘못 건드린 것이 있었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우리가 그리고 태왕이 그거로도 모자라 코어의 핵이… 검증을 끝낸 시스템이야. 오류나 버그는 있을 수가 없어.”
“아무래도 다른 분들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일단 내가 먼저 봐야겠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어.”
* * *
눈과 귀는 멀고 칠공에선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문제는 한계에 봉착한 몸 때문에 기술 역시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단 것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김용진이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갑옷이 사라졌군. 힘이 다했다는 뜻인가.”
줄곧 태정을 보호하고 있던 갑옷이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완전한 맨몸으로 허공에 떠 있는 그의 모습.
적기라 판단한 김용진이 썩은 핏물을 뱉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 모습에 참모장이 다가와 그를 말렸다.
“이보게. 자네 지금 정상이 아니야. 이제 우리에게 맡기고 치료를 받아.”
“그럴 순 없습니다. 저자와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 약속이 지금에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러다 자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우리 길드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말걸세. 자네는 자네 혼자만의 몸이 아니야.”
참모장의 말은 백번 옳았다.
길드 서열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가 잘못된다면 금사자는 하루아침에 톱 텐 밖으로 밀려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많은 자산과 병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한 명의 히든이 없다면, 다른 경쟁 길드에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니까.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용진은 병력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우려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이름을 걸고 한 약속입니다. 통제를 부탁드립니다. 저자는 제 손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런 미련한 자를 봤나.”
부단장이 이름까지 들먹이며 한 말이었기에 더 이상 참모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열상으로도 위인 그였기에, 그 말을 어긴다는 것은 길드 최고 어른의 위치에 있는 그로서도 매우 부담스러운 일.
관계상 명령 불복종에 처하진 않겠지만, 그의 성격상 길드를 떠나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놈이 부단장의 손에 곱게 죽어 주길 바라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 될 것 같군.’
수십 발의 오러 드라이브를 맞은 김용진의 몸 상태는 현재 최악이었다.
순간적으로 오러 실드를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부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기술은 강력했다.
그나마도 지상에 있던 서포터 부대가 재빨리 수백 개의 외부 보호막을 쳐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황천길을 걷고 있을지도 몰랐다.
“후우. 이만… 끝내자.”
마지막을 준비한 김용진의 신형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이게 다 뭘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에 들어와 있는 태정은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신기했다.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외부 스크린과 자신에게 주어지는 첨단 기기들.
기기의 능력도 이름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영상 속 그에게 전송이 되어 의지와 상관없이 쓰여졌다.
“초고속 이동에 분신… 저건 또 뭐야? 기술을 뺏는 것까지 가능한 건가.”
모두 틀렸지만 적어도 태정의 눈엔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광경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도 강해 보이던 김용진을 저리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릴 줄이야.
“이게 말로만 듣던 특이점? 그럼 난 지금 특이점을 맞은 건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문제는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
“제라드. 프리지아. 카이저. 아무도 없나?”
벌써 여러 번 부른 말이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일단 영상만 보면 이긴 거 같긴 한데.”
자신의 기술에 당해 지상으로 추락을 한 김용진.
그에게서 더 이상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만큼 강력한 공격이었으리라.
문제는 그 기술과 동시에 태극 1호가 벗겨졌다는 것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입지 않은 영상 속의 그.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불안함이 밀려드는 태정이었다.
“저 상태로는 작은 스킬 하나도 위험해. 이거 대체 어떻게 나가는 거지?”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에 태정은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나 다시 한번 살펴봤다.
하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 출구.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막혀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도 잠시.
스크린을 주시하던 태정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아 다시 일어나려는데.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포착됐다.
“뭐, 뭐야!? 내 다, 다리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태정은 조금 전까지 땅을 지탱하고 서 있던 자신의 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 아래로 존재하지 않는 그의 다리.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듯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자, 잠깐만.”
무슨 일인지 채 파악을 하기도 전, 더욱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무릎도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정이 기이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여전히 설전이 오가고 있는 상태였다.
[놈의 움직임이 멎었다. 지금이라면 네 손이 닿을 거다. 나가라, 당장.]
=이미 몸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야. 나가 봐야 그걸 가속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아.
-그건 프리지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섣불리 몸에 손을 댔다간 그나마 버티고 있는 육신이 금세 무너지고 말겁니다.
=네가 훨씬 낫군. 같은 인공지능인데 이리도 차이가 날 줄이야.
[그야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잠깐, 저게 뭐지? 저 인간들 지금 뭐 하는 거냐?]
카이저의 시선은 지상의 병력들을 향해 있었다.
언제 포위가 됐는지 최다솜을 둘러치고 있는 이들.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 마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막아야 된다.]
=알고 있어.
이대로 공격을 당하게 되면 끝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프리지아는 결국 밖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끝난 거, 시간이라도 끌어 보겠다는 뜻.
그렇게 막 그녀가 태정의 몸을 벗어나려는데, 그것을 막는 제라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왜?
-어쩌면 방법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프리지아가 의문에 잠겨 있을 때, 최다솜의 진영에서는 모종의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곤란한 입장일 텐데.”
“부대장님이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를 포위한 이들은 최다솜과 가장 지근거리에 있던 사제들이었다.
평소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뭔가 도울 게 없나 해서 와 본 것.
그런 그들에게 최다솜은 부탁을 하나 했다.
바로 태정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힐은 절대 하면 안 돼. 이팩트가 커서 바로 저지당할 수 있다. 무조건 리커버리만 넣어.”
“그 정도야 우리도 알아. 신호나 주라고.”
“그럼 다들 시작하자.”
누군가의 지시를 필두로 사제들이 리커버리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리커버리란 정확히 말하면 상처 회복 마법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어 체력이 다한 몸을 강제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임시방편의 마법.
해서 사용하면 할수록 그 효과는 줄어드는데, 그들에겐 태정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의 충격을 주는 것이 목표였다.
‘리커버리.’
‘리커버리.’
‘리커버리.’
사제들의 마법이 타깃이 된 태정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그러자 봉인된 방에 있던 태정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크악!”
마치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듯 두개골이 쪼개지는 고통에 그가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지며 그를 압박해 오는 통증.
“악! 악! 으아악!”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태정은 무엇을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다.
그만큼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의식이 끊어져 버렸으면 싶을 정도로 극한으로 치닫는 통증.
“으아! 으아! 으아아악! 으아아!”
태정이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때, 외부에선 그를 응원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잘한다. 잘한다.
[더. 더. 더. 더.]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부짖던 태정의 시야가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느껴지는 찬바람과 서늘한 공기.
주변에 보이던 수많은 장비와 스크린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드디어 죽은 건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바로 그때.
몽롱해진 시야로 김용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꼬마!
“어?”
=지금이야. 고철을 소환해.
“고철?”
-깨어나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희미하게 들리는 제라드의 음성에 태정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따라 읊었다.
“깨어나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지상으로 거대한 빛이 솟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