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너… 너 어떻게 여길…….”
태정은 도저히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길드에 들어가 있어야 할 한상진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태정이 말을 더듬으며 묻자, 오히려 한상진이 더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형님, 왜 아직도 여기 계십니까.”
“너 내가 분명 그분들 모시고 가라고…….”
“걱정 마십시오. 길드에 무사히 인계하고 왔습니다.”
그의 말에 태정이 주변을 바라봤다.
어디 하나 성한 것 없이 초토화가 되어 버린 대지.
천여 명이 넘는 헌터들은 덤이었다.
대체 얼마나 날뛰었으면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일까.
아니, 그는 그보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떻게 된 거야?”
“형님이 탈출할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탈출? 내가 언제 너하고 약속한 적 있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언제 탈출한다고 말을 한 적은 있냐?”
“당연히 없죠.”
“그럼 약속도 없었고, 언제 들어가고 나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시간을 벌고 있었다는 거야?”
태정이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묻자, 한상진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일종의 감입니다. 제 동물적 감각이 형님의 탈출 시간을 벌라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상진의 대답에 태정이 속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건 코스프레 수준이 아니야. 정신감정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듯 입을 벌리며 서 있던 태정이 아까 전부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헌터를 보며 물었다.
“네 덕분에 포위된 것 같다.”
“하하. 형님, 개가 아무리 많아도 개는 개일 뿐입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개에게 포위당하는 걸 봤습니까?”
“네 말은 저들이 개란 말이냐.”
“오히려 그보다 못하죠. 기왕 이렇게 오셨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태정이 한상진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지상에서는.
“저거 2공대 부대장 아니야?”
허공을 유심히 보던 참모장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러자 내막을 알고 있는 누군가 튀어나와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오면서 들었는데, 별장이 털렸다 하더군요.”
“그럼 처음부터 놈들이 노리는 건 2공대 부대장이었나?”
“저 둘의 모습을 보니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겨우 사람 하나 빼자고 길드에 쳐들어와? 그것도 단둘이서? 허 참.”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가 어느 순간 태정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디서 많이 본 차림새인 것 같은데. 기계 같은… 음? 잠깐, 저거 설마?”
생각을 하던 참모장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말로는 수도 없이 전해 들었던.
기계 하면 떠오르는 인간.
“제닉스?”
참모장이 그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 포위망이 열리며 십여 명의 헌터들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호위대를 이끌고 나타난 길드 최고 권위자.
바로 길드 마스터 최철호였다.
“오. 누군가 했더니 이제 보니 네놈이었군.”
최철호 역시 태정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가 주변을 훑으며 태정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납치, 살인에 기물 파손까지. 어디 전쟁이라도 벌이자고 기어 들어왔나?”
최철호의 말에 뭐라 말을 하려던 태정을 대신해 한상진이 나와서 대답했다.
“살인을 빼라, 죽인 적 없다.”
“네놈은 또 뭐야?”
“청룡대주다.”
“청룡대주? 아, 자네가 그 무인인가 보군. 제닉스에서 히든을 하나 더 영입한 모양이지? 근데 선택이 좀 아쉽군. 그런 구멍가게보다야 대기업인 우리 금사자가 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떤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무마시켜 줄 테니, 우리 쪽으로 이적하는 것이. 사실 이 정도 피해면 자네는 오늘 살아 돌아가지 못해. 아무리 몇 없다는 희귀 클래스라 해도 이곳은 대한민국 톱 텐. 금사자의 본진. 잡고자 마음먹으면 염라대왕이라 해도 살아 돌아갈 수 없지.”
최철호는 내심 그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세계에서 단 넷밖에 존재하지 않는 초희귀 클래스.
그만큼 탐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깟 피해쯤이야 돈으로 때려 박으면 되는 일.
일단 영입만 된다면 톱 쓰리 안에 드는 것은 물론이고, 그만큼의 경제적 수익도 창출을 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금사자는 한산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순 없어도 영향권에서 한발 멀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저놈만 데려오면 우리 금사자는 국내 최강으로 자리매김한다. 더 이상 무적 떨거지들과 하나로 묶일 이유가 없다는 소리지. 그렇게 되면 조영민 그놈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겠군.’
최철호는 이미 그를 영입한 표정이었다.
놈이 이곳을 초토화시키긴 했어도 아직 금사자엔 초특급 실력자들이 여럿 존재했다.
자신보다 강한 총대장은 물론이고, 비밀 병기인 부단장도 이곳으로 오고 있단 연락을 받았다.
게다가 정예 병력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는 이곳은 1만 군세를 자랑하는 길드의 본진이었다.
한국에 무인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를 못했으니 레벨 또한 그리 높지 않을 터.
살아 돌아나갈 수 있을 확률은 1도 없다는 것이 최철호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상진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무인이었다.
죽을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는.
진짜 사내, 아니 약간은 모자란 인간이었다.
“네놈의 개소리는 잘 들었다.”
“뭐?”
“이제 길을 터야겠으니 줘 터지기 싫으면 나와라.”
“이런 어이없는 경우를 봤나, 기회를 줘도 발로 차 버리다니. 네놈은 생각하는 뇌가 없는 건가.”
“마지막 경고다. 걸레가 돼서 펄럭이기 싫으면 나와라.”
한상진이 출수할 준비를 하자, 그가 피식 웃으며 태정을 바라봤다.
“이봐, 제닉스 지역대장.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지?”
최철호가 표정을 굳히며 묻자 태정이 여유 있게 받아넘기며 대답했다.
“그러는 네놈은 잘했나?”
“뭐?”
“8년 전, 다솜이 일을 말하는 거다.”
“지금 고작 그 이유 하나로 길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왜? 그럼 안 되나 보지?”
“뭐?”
“어차피 부딪혔을 일. 너로 인해 벌어진 참사니, 그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지 마라.”
태정은 이미 이판사판이었다.
한상진이 일을 너무 크게 벌여 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상황.
철판을 까는 수밖에 없었다.
“네놈, 이게 지금 얼마나 큰일인지 파악이 안 되는… 크악!”
말을 내뱉던 최철호의 눈이 번쩍하며 나동그라졌다.
한 방에 코뼈가 주저앉아 버린 그.
그 일의 장본인은 당연하게도 한상진이었다.
“예의를 갖춰라. 형님은 이놈 저놈 소리를 들으실 분이 아니시다.”
“네, 네가 감히…….”
퍽!
“으악! 내 코!”
“내가 비키지 않으면 걸레가 될 거라 했지.”
“너, 너 이 새끼 지금…….”
퍽!
“으악! 이 개자식 더 이상은 안 참는다!”
최철호의 신형에서 강맹한 기운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 역시 국내에서는 내로라하는 서열의 실력자.
더 이상 영입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살기. 무서운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문제는 상대가 무인이라는 것이었다.
퍽!
“악!”
나가떨어지는 최철호의 머리채를 한상진이 붙잡았다.
“놔, 놔라, 이놈!”
“아무래도 넌 교육이 좀 필요하겠구나.”
그때부터였다.
한상진의 잔혹한 구타가 시작된 것은.
퍽! 퍽! 퍽! 퍽!
“기, 길드장님마저…….”
“이게 말이 되나?”
“저놈은 인간이 아니라니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쳐 맞고 있는 최철호를 보며 헌터들은 다시 한번 그의 가공할 무력에 공포를 느껴야 했다.
길드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가.
길드 무력 서열 3위에 SS등급을 지닌 초실력자였다.
그런 이를 떡 주무르듯 발라 버리고 있는 사내는 도저히 그들의 입장에선 인간이 아니었다.
괴물. 진짜 괴물이었다.
“저… 참모장님, 어떡합니까? 무슨 조치를…….”
“음…….”
참모장이라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보같이 성질만 급해 가지곤. 쯧쯧.’
너무 쉽게 몸을 내준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되면 공격도 뭣도 할 수가 없는 상황.
그것을 알고 있는 태정이 한상진을 불렀다.
“한상진.”
퍽! 퍽! 퍽!
“네놈이 길드 마스터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으하하하!”
“이봐, 한상진.”
퍽! 퍽! 퍽!
“야! 청룡대주!”
참다못한 그의 외침에 주먹질을 하던 한상진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그놈 인질로 삼아서 나가야겠다. 무슨 말인지 이건 알아듣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상진은 그렇게 말하며 전역에 사자후를 터뜨렸다.
“모두 길을 터라. 그렇지 않는다면 이놈은 오늘 갈기갈기 찢겨 들개의 먹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우렁찬 그의 외침에 헌터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
모두가 그다음 서열인 참모장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자리 유지해라. 한 놈이라도 이탈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
“하지만 그럼 마스터께서…….”
“다들 들으라! 길드장은 이런 일로 절대 굴하실 분이 아니시다! 제 목숨을 불태우더라도 절대 금사자 일원의 긍지를 저버리실 분이 아니니! 그를 욕되게 하지 마라!”
그의 명령에 어수선하던 포위망이 다시 견고해졌다.
그 모습에 최철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노인네, 치매가 왔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최철호는 긍지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죽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참모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기회에 놈만 제거되면 내가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어차피 부단장이야 욕심이 없고 총대장이야 평생 자리를 약속했으니. 이다음 길드장은… 서열상 보나마나 나야. 최철호… 넌 너무 오래 해 먹었어. 이제 이만하면 그만 갈 때도 됐잖아?’
길드장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해도 물러서지 않자, 한상진이 태정을 향해 다가왔다.
“이놈, 진짜 죽일까요?”
“그걸 말이라고… 됐다, 그냥 뚫자.”
“그럼 길을 열겠습니다.”
걸레가 된 최철호를 옆구리에 낀 한상진이 전방의 헌터들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려운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금사자 병력들.
애초에 전의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포위망과 한상진의 거리가 지근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번쩍!
쾅!
새하얀 빛과 함께 쏘아지던 한상진의 신형이 총알처럼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러고 드러난 한 명의 사내.
그의 품엔 조금 전까지 한상진이 끼고 있던 최철호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