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모든 준비를 마친 태정은 연습장 위에 있는 만년필을 있는 힘껏 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밀고 밀리던 만년필이 책상 밑으로 떨어지고.
탁. 타탁.
한차례 소음과 함께 깜짝 놀란 듯 최다솜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게 왜…….”
떨어진 만년필을 주워 다시 책상에 올려놓던 그녀가 연습장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이내 주변을 살피며 말을 중얼거렸다.
“너… 여기 있어?”
“나 여기 있어.”
“…….”
당연하지만 최다솜은 태정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연습장을 읽는 그녀.
“마음의 준비 됐어.”
최다솜의 말에 구석에 숨어 있던 그가 액자 앞으로 가 섰다.
동시에 클로킹을 풀자 손가락 마디만 한 그의 작은 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잘 이해를 했는지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허리를 숙여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댈 뿐이었다.
갑자기 집채만 한 얼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태정은 순간 놀라 몸을 움직일 뻔했다.
벌레들이 인간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절로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앗.”
가까이서 태정을 발견한 최다솜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진짜 그가 맞았기 때문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 몸.”
말을 뱉을 때마다 나오는 입김에 태정의 몸이 들썩거리며 액자 벽에 달라붙었다.
그 모습에 재빨리 거리를 둔 그녀가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 몸은 뭐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녀의 물음에 태정이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외쳤다.
“구하러 왔어, 이건 스킬이고!”
“뭐라구?”
“구하러 왔다구! 이건 스킬이야!”
“뭐?”
“구! 하! 러! 왔! 다! 고!”
“미안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려.”
“음.”
그녀가 듣지 못하는 것 같자 태정이 손을 위로 들며 올라가겠단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위에 올라타자 그녀가 손을 귀로 가져갔다.
그렇게 귓구멍 앞에 선 그가 신기한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솜이 귀는 이렇게 생겼구나. 무슨 동굴 같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그가 이내 구멍에 대고 소리쳤다.
“너 구하러 왔다고, 이건 스킬이야.”
“앗, 간지러워.”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귀를 향했다.
그 모습에 기겁을 한 그가 소리쳤다.
“아, 안 돼! 스톱! 스톱!”
바로 멈추는 그녀의 손.
이내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미, 미안. 그런데 왜 온 거야.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이동우란 남자가 찾아왔어. 너 여기 감금되어 있다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별일 아냐. 그냥 예정되어 있던 일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야. 돌아가, 태정아. 너 여기 있으면 위험해.”
“돌아가긴 뭘 돌아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날 너 놔두고 안 갔어.”
“태정아…….”
“일단 나가야 하니까 얘기는 나중에 하고. 너, 몸은 어때? 능력은 쓸 수 있어?”
태정의 물음에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 팔찌가 마나를 봉인하고 있어서 기술을 사용할 수 없어.”
“풀진 못하고?”
“S급 아티팩트라 맞춤 키가 없으면 불가능해. 마나 감응식이라 내부든 외부든 풀려고 하면 더 단단해져.”
“여기에 깔린 마법진은?”
“1급 알람 하나 하고, 1급 봉쇄 하나.”
“1급 봉쇄는 뭐야?”
“내가 이 건물을 벗어나게 되면 반경 1km 내에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차단막이 형성돼.”
“하늘도?”
“응.”
“강도는 얼마나 돼? S급 헌터의 스페셜무브 정도면 뚫고 나갈 수 있나?”
“차단막은 마석의 등급과 마나의 양으로 결정돼.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쉽지 않을 거야.”
“음.”
“그냥 돌아가. 나 정말 괜찮아. 네가 여기서 이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최다솜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날고 기는 히든이라도 이곳은 최강 금사자 길드의 본진이었다.
혼자서도 벅찰 것이 분명한데, 능력을 잃은 자신까지 데리고 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태정은 달랐다.
이미 이곳에 올 때부터 쉽게 갈 것이라곤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그였다.
정문을 돌파해 나가더라도 함께 데리고 나가야만 한다.
“제라드.”
-예, 주인님.
“혹시 모르니까. b6-1 상공에 띄…….”
막 그가 어떠한 명령을 내리려고 하는데.
위이이잉-! 이이잉!
난데없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발각됐나?”
“잠깐만. 아냐. 달라. 저건 외부 경고음이야. 작은 소리가 네 번씩 일정한 걸 보면… 라이언 4란 소린데…….”
“라이언 4? 그게 뭔데?”
“전시 상황.”
“뭐?”
“대규모 병력이 길드에 침공을 했다는 뜻이야.”
* * *
콰콰쾅! 쾅!
크고 작은 굉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건물이 박살 나고 대지 곳곳에 보이는 살벌한 크레이터들.
그 진원지 한가운데엔 수염이 가득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바로 한상진이었다.
“더 강한 놈은 없나? 이래선 길드장이 직접 나와야겠는데? 하하하!”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를 에워싸고 있는 수백의 헌터가 귀를 막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 저거 뭐야!?”
뒤늦게 도착한 간부 하나가 헌터들을 향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사이렌을 듣고 나왔는데, 도착했을 땐 이미…….”
수많은 건물이 반파되고, 또 수많은 병력이 신음을 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정신이 온전한 헌터의 멱살을 잡은 그가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그게…….”
“빨리 말하지 못할까!”
“갑자기 놈이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저희를 때렸습니다.”
“때려?”
간부의 눈이 다시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헌터들의 상세가 대부분 그리 깊지 않았다.
건물이 작살날 정도의 공격이었다면 시체조차 남지 않아야 정상.
‘과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한 그가 사내를 향해 외쳤다.
“나. 1공대 부대장 이진철이라고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1공대 부대장? 흥. 네놈 정도로는 이 몸의 이름을 알 수 없다.”
한상진의 대답에 찌그러져 있던 수하가 이진철을 향해 말했다.
“청룡대주라고 합니다.”
“청룡대주? 그게 뭐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래? 근데 왜 넌 아는 걸 난 모르는 거지? 내가 너보다 못하다는 건가.”
“그, 그건 저놈한테 물으셔야…….”
살짝 기분이 나빠진 그가 수하를 내려놓고 다시 물었다.
“이봐, 청룡대주. 원하는 게 뭔가.”
“길드장을 데려와라.”
“길드장? 그럼 정식으로 요청을 하면 될 것이지 왜 이런…….”
“벌써 똑같은 대답만 수백 번이다. 내놓지 않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한상진의 대답에 이진철이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초토화가 돼 버린 지역.
‘이 정도 전투력이면 못 봐 줘도 SS급. 공대장님이 오셔야 진압이 가능하다.’
금사자 최강 1공대의 부대장답게 그는 이미 한상진의 전투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정예 수백이 피떡이 되게 얻어맞아 전투 불능인 데다, 고층 빌딩 여러 채가 반파됐다.
뿐만 아니라 대지에 크레이터가 찍힌 것까지 종합해 보면 S+급으론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견적이었다.
자신이 그 등급에 머물러 있으니까.
즉, 현재 이곳에 모인 천여 명 정도의 병력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막을 수 없단 뜻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된다.’
생각을 마친 그가 마나를 풀로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도 각법에 있어선 내로라하는 실력의 권투사.
마침 상대도 몸을 쓰는 클래스라고 하니, 전력을 다하면 공대장이 올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진철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단 한 수만에 깨져야 했다.
한상진의 손에서 날아간 수십 개의 지풍이 그의 근맥을 모조리 끊어 놨기 때문이다.
“컥.”
순식간에 오징어가 되어 널브러진 이진철이 고통에 신음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경악을 하고 있었다.
‘미친 S급 방어구가 단 한 수만에…….’
예비 동작도 없었던 걸 보면 스폐셜무브도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히든이었나.’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공대장이 온다 해도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낮았다.
S+급에 이른 자신이 손 한번 못 써 보고 잡혔다는 것은 레벨 또한 상당하다는 뜻이 되니까.
즉, 같은 히든이 오지 않는 이상 사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부단장님이 자리에 계셔야 할 텐데.’
한상진이 길드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이목을 끌고 있을 때, 태정 역시도 본모습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러자 울리는 개별 알람.
위이이이! 위이이이!
동시에 아래층에서 소란이 일며, 2층으로 두 명의 헌터가 난입했다.
“무슨 일이…….”
그들의 물음은 채 반도 나오지 못하고 끊어졌다.
클로킹을 전개한 채 대기하고 있던 태정이 경동맥을 쳐 버렸기 때문이다.
“주, 죽었어?”
“기절만 시킨 거야.”
대답을 한 태정이 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 팔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팔로 머리를 감싼 그가 블라스터를 이용해 지붕을 뚫고 솟아났다.
그러고 드러난 전경은 의외였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올 것을 대비하던 태정은 텅 비어 버린 별장 부지를 바라봤다.
분명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백 명이 넘는 인원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다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 해답은 최다솜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전시라 다들 원래 위치로 돌아갔나 봐. 그런데 대체 누가…….”
“짐작 가는 곳도 없어?”
“전혀.”
순간 태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설마, 그들이 벌써…….”
태정은 중국의 봉신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아니라면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서울 한복판, 그것도 금사자 길드를 침공할 수는 없었다.
톱 텐의 길드는 서로 떨어져 봐야 30km 내외.
즉 지원을 받기가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 걸 무시하고 쳐들어올 수 있는 곳은 딱 하나.
바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봉신방뿐이었다.
“왜 그래? 태정아, 뭐 아는 거 있어?”
“놈들인 것 같아, 봉신방이라고.”
“봉신방?”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일단 나가자.
태정은 즉각 방벽이 위치한 곳으로 쏘아졌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던 그의 신형은 일정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투명하면서도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전역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단막이야.”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스피어 블레이드를 소환했다.
동시에 솟은 플라즈마가 차단막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첫 타에 베는 듯한 느낌이 든 태정은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베고 베도 베는 느낌만 있을 뿐, 차단막은 금세 복구되어 원래 모습을 유지했다.
“초고속 재생이라… 제라드.”
-예, 주인님.
“이거 천룡으로 뚫을 수 있겠냐.”
-불가합니다. 이 정도 마력이 깃든 차단막이면 핵미사일이나 전략폭격기 정도는 되어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자살행위잖아.”
-이레이저 건을 사용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레이저 건? 그렇지. 출력…….”
중얼거리던 태정이 안고 있던 최다솜을 왼쪽 옆구리에 꼈다.
동시에 이레이저 건을 소환한 그가 출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잠시 후, 준비가 완료됐다는 제라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최대 출력입니다.
“좋아. 간다.”
위이이잉-! 슈아아악!
총구로부터 눈부신 플라즈마 덩어리가 뿜어졌다.
처음 빛은 차단막에 먹히는 듯싶더니, 한차례 소음과 함께 막을 가볍게 뚫어 버렸다.
“됐다. 뚫렸다.”
차단막에 구멍이 생기자마자 빠져나온 태정은 곧장 방벽을 향해 날아갔다.
이후 안전한 곳에 최다솜을 내려놓은 그가 기체에 탑승해 천룡을 소환했다.
“한 곳에 풀 장전.”
-좌표 설정 완료되었습니다.
“쏴.”
슈우욱-! 슈우욱!
발사대의 로켓이 하나둘 차례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좌표로 날아갔고, 이내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분진이 일어났다.
구오오오.
총 36발의 로켓을 방벽에 쏟아부은 태정은 다시 최다솜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 결과물을 바라봤다.
“끄떡도 안 하네.”
“아까 그걸로 해 봐. 이곳도 마석으로 마나의 공급을 받고 있어.”
“그건 이제 못 써.”
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봤다.
바로 벗어날 수 있는 길.
하지만 방벽이 이 정도면 방공망 역시 장난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혼자라면 어떻게 도박을 해 보겠지만, 거의 맨몸이나 마찬가지인 최다솜이 옆에 있었다.
아무리 몸을 감싸고 올라간다 한들 충격조차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제라드, 기체 뚜껑 열 수 없어?”
-불가합니다.
이제 태정에게는 2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카이저를 소환해 방벽을 부수고 나가느냐, 아니면 입구를 찾아 도박을 감행하느냐.
문제는 둘 모두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카이저, 이 방벽, 부술 수 있겠냐.’
[글쎄, 브레스를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물리력으론 장담을 할 수 없다.]
‘브레스라… 제라드.’
-그렇게 되면 잠실이 쑥대밭이 될 것입니다.
‘음.’
찰나의 순간 고민을 하던 태정이 최다솜을 향해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입구가 어디야?”
“여기선… 거리상 북문이 제일 가까워. 하지만 거긴 1공대가 주둔 중이라… 같은 조건이라면 동문이 그나마 뚫기가 쉬울 거야. 거긴 전시 때 지원 보급을 담당하는 길드 최후방이니까.”
“동문? 길 알지? 꽉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