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부우웅.
한 시간 즈음을 날았을 때, 그는 별장 방향으로 가는 차 한 대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른걸. 속이 다 시원하네. 50km/h밖에 안 되는데, 무슨 슈퍼카 같냐.”
평소 같으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였지만, 몸이 작아져 최고 시속이 4km/h 남짓인 현재의 태정에겐 가히 슈퍼카와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물이 뭉개지며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고 있는 세단.
방향을 주시하던 태정이 카이저를 불렀다.
‘이봐.’
[무슨 일이냐.]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거절한다.]
‘…말도 안 했는데?’
[뻔할 뻔 자지. 도와 달라는 것 아니냐.]
‘파트너끼리 정말 이러기야?’
[앞서 말했다시피 난 급이 맞는 놈만 상대한다. 더욱이 이런 인간 피라미들하고는 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곳엔 히든도 있다. 하이 레벨의 헌터들도 다수 있을 거고. 보통 놈들이 아니야.’
[그래 봐야 먼지일 뿐이지.]
카이저의 말에 그동안 조용하던 프리지아가 입을 열었다.
=먼지는 아닐걸? 넌 지금 아무것도 없는 맨몸인 상태니까. 떼로 덤벼들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어.
[흥. 또 수작을 부리는군. 저번에도 이놈을 도와주더니, 나를 도발해 도와주려 하는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난 그냥 현실을 말했을 뿐인데?
[원하는 게 남극 기지에서 얻은 마석인가.]
=전혀.
[속 보이는 것. 네가 아무리 잘해 줘도 그건 네 것이 아니다. 이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걸 너한테 쓸 리가 없지.]
확신에 찬 카이저의 말에 태정이 찬물을 끼얹었다.
‘어차피 죽으면 의미도 없는데, 그냥 프리지아한테 다 줘 버릴까 보다.’
=오오. 정말? 어차피 내 거긴 했지만,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지금 주면 더 좋은데.
‘그럴까?’
[인간, 강해지기가 싫은 건가?]
‘강해지고 나발이고 어차피 죽으면 뭔 소용이야. 그럴 바엔 베풀고라도 죽어야지.’
=맞아. 맞아. 그러니 어서 인벤토리를 열어.
프리지아의 말에 태정이 정말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게 어디다 뒀더라.’
=맨 마지막 칸 아냐?
‘그랬었나? 아, 여기 있다.’
[자, 잠깐.]
‘왜? 무슨 할 말 있어?’
[도와주마.]
‘정말이냐.’
[대신 약속을 해라. 같은 조건으로 두 번은 없다. 그리고 맹세해라. 마석을 저놈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무슨 맹세씩이나. 내가 알아서 너한테…….’
[그럼 다 같이 죽어 보든가. 줘라 그냥.]
‘자식, 성질 급하긴. 알았다. 마석은 절대 프리지아에게 넘기지 않으마. 됐냐?’
[약속을 지키지 않을 시엔 넌 평생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럼 이따 급하면 바로 나와, 미적거리지 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정은 최대한 이것을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찌 됐든 이건 자신만의 비밀 병기.
벌써 세상에 오픈하기엔 조금 아까웠다.
그럼에도 그와 협상을 한 것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그땐 비밀 병기고 뭐고 의미가 없어지니까.
지금의 협상은 그때를 위해 들어 놓은 보험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났을 무렵, 차가 두 번째 검문소에 진입했다.
어느덧 해가 져서 어둠이 내려앉은 상황.
가로등에 의지해 검문소를 빠져나간 차가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좌우 사방으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과 무성한 풀들.
그것들을 보고 있던 태정이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여기 아까 본 거기 맞지?’
-그렇습니다.
‘좋아. 제대로 골라 탄 거 같네.’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차가 널찍한 공터에 멈춰 섰다.
그리고 보이는 거대한 문과 문 너머로 보이는 고층 별장.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태정이 그의 주머니 속으로 쑥 하고 들어갔다.
그 상태로 얼마나 흘렀을까.
“별일 없지?”
“그럼 뭐가 있겠냐.”
“대장님은?”
“식사하러 가셨다. 재밌게 놀았냐?”
“재밌게 놀긴 막 갔다 막 왔는데. 근데 이번에 애들 새로 들어와서 죽이긴 죽이더라.”
“내 말 맞지? 물갈이 싹 됐다니까. 이따 말번에 자지 말고 대기 타고 있어. 내 차례니까.”
“알았다, 인마. 그보다 부대장은 뭐 좀 먹고 있긴 하냐.”
“먹어야지 그럼. 자기가 안 먹고 배기겠냐, 뒈질 게 아니라면.”
“그래도 한때 우리 부대장이었는데,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지랄. 길드장 백으로 부대장에 오른 년인데, 그게 부대장이냐. 언제부터 공대 간부에 여자가 있었다고.”
“길드장 백은 아니지. 별로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우리한테 잘해 줬잖아.”
“몰라, x발. 난 처음부터 저년 맘에 안 들었어.”
“맘에 안 들든 말든. 길드장님이랑 결혼하면 어차피 굽신거려야 돼. 괜히 감정 표출하지 마라. 나중에 x되는 수가 있으니까. 가서 밥이나 먹고 와라.”
“그래. 수고해 그럼.”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멀어지고, 태정과 함께 온 사내가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니, 바로 앞에 별장 건물이 보였다.
주머니를 빠져나와 건물 앞에 선 태정은 들어갈 구멍이 있나 살펴봤다.
그리고 이내 문 옆에 작은 틈새가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으로 몸을 쑥 밀어 넣자 신발장과 함께 광활한 마룻바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실인가.’
빠르게 주변을 훑은 그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소파와 대형 TV, 식탁 등이 보이는 걸로 봐선 거실이 분명했다.
하지만 최다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보자. 방은 3개… 한 곳은 욕실일 테고. 그보다 방문을 어떻게 열지? 바로 센서가 작동할 텐데.”
이동우에게 듣기로 별장 내부엔 특수한 마법진이 설치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맞춤 제작 된 팔찌를 소지하지 않으면 바로 알람이 울려 버리는.
해서 별장을 오고 나갈 땐 반드시 그 팔찌를 소지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알람이 울리는 것은 물론이고,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좋지 않은 현상이 생길 것이라 했다.
이동우는 그것을 속박 계열의 진으로 추정했다.
일단 현재까지 봐서 그 마법진의 센서는 1.8cm엔 작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 체구 가지곤 방문을 열 방법이 없다는 것.
“애매한 크기야. 조금만 더 작았어도 저 사이로 들어가면 되는데.”
태정이 문 아래 보이는 작은 틈새를 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위층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가운데 목재 계단으로 향했다.
태정은 블라스터의 출력을 올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른 방 2개와 또 하나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방 하나는 열려 있었다.
슬그머니 안을 살피자 익숙하지만 거대한(?) 최다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됐다. 일단 찾기는 찾았는데. 지금부터가 문제야.’
태정의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최다솜을 데리고 나간 직후, 북쪽으로 쭉 날아가 방벽을 부수고 탈출을 한다.
일단 이곳만 벗어나면 쫓아올 수 있는 놈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선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실현되려면 2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했다.
하나는 최다솜에게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방벽이 그의 예상대로 물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최다솜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치가 걸어져 있다면, 이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힐 공산이 컸다.
방벽 역시도 부수지 못하면 결국은 입구로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야… 근데. 어떻게 소통을 하지?’
확실한 탈출을 위해선 그녀와의 대화가 필수였다.
하지만 플렉시온을 풀 수 없는 현재의 모습으로 말을 걸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아진 상태의 신체는 그만큼 내구력이 떨어진다.
내구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몸이 약하다는 것이고, 이 상태론 한 대만 잘못 맞아도 황천길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 대화를 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돌연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최다솜이 몸을 일으켰다.
카이저보다도 훨씬 큰 그녀의 신형.
그가 밟히지 않으려 재빨리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둥!
한차례 진동음과 함께 최다솜이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발이 올라간 것을 본 그가 슬그머니 나와 위를 올려다보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자는 건가?’
블라스터를 전개해 고도를 높인 태정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최다솜의 얼굴을 확인했다.
잔뜩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
왠지 모르게 짠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조금만 있어, 금방 구해 줄게.’
몸을 돌린 그가 일단 책상 위에 안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액자였다.
자신의 몸에 열 배는 되어 보일 법한 거대한 액자.
그 안엔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태정 역시 아는 사진이었다.
“…이걸 아직도.”
액자 안 사진은 스무 살이 되면서 그와 그녀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그 역시도 5년 전까진 가지고 있던 사진.
그것을 본 태정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8년. 이제 곧 9년차에 접어들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왜 아직도 이걸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걸 보니 금사자에서 있었던 그녀의 호의가 전부 이해가 되는 태정이었다.
추억이든 뭐든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는 것.
한동안 사진 앞을 떠나지 못하던 그가 고개를 흔들며 할 일에 집중했다.
‘어디 보자. 뭔가 적을 만한 게…….’
책상 위에는 연습장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 글을 적는다면 이 모든 상황을 빠르게 이해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앞에 놓인 거대한 만년필을 보니 그런 생각이 금세 사라졌다.
무게와 길이는 차치하더라도, 두께가 너무 두꺼웠다.
잡을 수가 없는 둘레.
그런 그에게 비슷한 크기의 나무 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연필이었다.
‘저거다.’
태정은 연필이 세워진 유리병으로 날아가 꼭대기에 올라섰다.
대여섯 자루의 연필 중 유일하게 반대로 세워져 있는 연필.
그의 손에 스피어 블레이드가 소환됐다.
‘이 정도는 가능하겠지.’
휙!
서걱-!
틱.
1.5cm 남짓한 그의 블레이드가 연필의 흑심을 잘라 냈다.
아래로 내려와서 그것을 양팔로 안아 든 그가 블라스터의 출력을 이용해 글을 적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그가 고도를 높여 글씨를 확인했다.
[나 태정인데, 여기 들어와 있어. 믿기 힘들겠지만 몸이 손가락 마디 정도로 작아진 상태야. 벌레는 아니니까 놀라지 말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을 하고 액자 앞을 바라봐. 혹시 도청되고 있는 거면 글로 쓰고.]
“좋아. 좀 엉망이긴 해도 충분히 알아볼 수는 있을 거야.”
* * *
금사자 동문 입구.
아까부터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과하게 펄럭이는 요상한 옷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남자.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문 경비대의 헌터들은 영 심기가 불편했다.
“저 새끼 뭐야? 아까부터 왜 저기에 서 있는 거야?”
“거지 아냐? 쫓아낼까?”
“조금만 더 지켜보자. 아직 라인 밖에 있으니까. 만약에 놈이 라인 안으로 들어오면 그 순간…….”
“순간?”
“뒤지게 패서 쫓아내야지.”
“크큭.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제까짓 게 어디다 신고를 해. 그보다 현금 좀 있냐?”
“현금은 왜?”
“그래도 밥값은 줘야지.”
“미친, 크큭. 뒤지게 패 놓고 밥값은 주게? 그게 밥값이냐 매값이지.”
“그래도 고맙다고 큰절할걸? 저런 놈들은 국밥 한 그릇에도 목숨 걸잖아.”
“어? 야, 저놈 저거 여기로 걸어온다.”
“진짜네? 저놈은 뒤졌다, 이제. 잘 봐라.”
“새끼, 적당히 해라. 죽으면 골치 아파진다.”
걸어오는 사내를 마중 나간 헌터가 그래도 혹시 몰라 말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길드에 볼일이 있나.”
“길드 마스터를 만나러 왔다.”
“길드 마스터? 길드장님이 네놈 친구냐?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날 수…….”
“죽기 싫으면 나오라 그래.”
“뭐!?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난 정신병자라고 봐주지…….”
분노한 헌터의 주먹이 사내의 얼굴로 향했다.
상당한 속도의 공격.
일반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막을 수가 없는 일격이었다.
사내 역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까딱.
척.
“커, 커헉!”
고갯짓으로만 공격을 피한 사내가 헌터의 멱 줄을 쥐어 잡았다.
허공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남자.
그런 남자를 향해 사내가 오른손을 곱게 말아 쥐었다.
“주먹은 그렇게 쓰는 게 아냐. 이렇게 쓰는 거지.”
“으악!”
비명을 지른 남자가 걸레가 되기까진 채 수 초가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 구경을 하고 있던 헌터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뛰어왔다.
“웬 놈이냐!?”
“웬 놈?”
사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법이 개판이군.”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잘 들어라. 나보다 강한 이의 이름이 궁금할 땐, ‘귀하의 존성대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것이 예의다. 금사자에선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지?”
“존성, 뭐?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헌터 하나가 볼 것도 없다는 듯 검을 집어 드는데, 또 다른 헌터가 그를 제지하며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네 그 잘난 존성대명이 뭐냐? 어디 들어나 보자.”
“이름을 잊은 지 오래구나.”
“뭐? 이 새끼가 진짜…….”
“하지만 세인들은 나를 이렇게 부르더군. 청룡대주라고.”
사내의 신형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