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놈의 돌진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남극 기지에서 본 왕무영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바로 반응한 그가 몸을 뒤로 빼며 내려쳐 오는 검을 피했다.
동시에 그의 블레이드에서 반월형 플라즈마 십여 개가 방출됐다.
샤아악-!
빠르게 날아간 플라즈마가 괴수의 몸을 강타했다.
쾅! 콰쾅! 쾅!
제법 큰 굉음이 일며 분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소리에 비해 결과는 좋지 못했다.
방패로 막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놈의 본체.
금세 박살이 날 것 같아 보이던 방패는 그의 플라즈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막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정은 전혀 당황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얼굴.
뒤로 빠지던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방출된 플라즈마의 공격력은 블레이드의 절반.
즉 직접 타격하면 조금 전 공격의 2배란 소리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의 블레이드가 블랙 나이트를 쪼개고 들어갔다.
그 공격에 놈 역시 검을 사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탕!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두 검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억.”
엄청난 충격과 함께 버티지 못한 태정의 신형이 좌측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쾅!
뒤이어 날아드는 흑색의 검강.
재빨리 몸을 굴려 그것을 피한 태정은 동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파와 함께 몸이 저절로 튕겨져 나갔다.
반동을 이용해 튀어 오른 그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보이는 동굴 외벽의 거대한 크레이터.
조금 전 흑색 기류가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이거 좀… 하네. 긴장해야겠는데?’
생각보다 훨씬 강한 놈의 전투력에 느슨해져 있던 그의 정신이 재무장됐다.
드라이어드야 워낙 악명이 자자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 외 나머지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내심 생각을 하고 있던 태정이었다.
하지만 부딪쳐 보니 놈은 지금까지 상대해 본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강했다.
힘에서는 남극 기지에서 도깨비로 변신했던 왕무영을 능가할 정도.
그러고 보니 놈을 처치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 방법을 써 볼까.”
뒤로 물러나던 태정이 다시 앞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시작된 치열한 공방전.
한 방 한 방이 무쇠로 내려치는 느낌이었지만, 태정은 최대한 놈과 합을 맞추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클로킹을 전개한 것.
무섭게 검을 휘두르던 블랙 나이트가 순간 멈칫하며 틈을 보였다.
동시에 놈의 등 뒤로 자색의 블레이드가 솟더니 그대로 목을 갈라 버렸다.
서걱-!
쿵!
[블랙 나이트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10억을 획득합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역시. 혼란을 틈탄 공격은 못 막지. 그보다 이 비현실적인 경험치는 뭐냐. 1억도 아니고 이건 뭐…….”
억 단위의 경험치는 처음 보는 태정이었다.
그것도 무려 10억.
준보스인 블랙 나이트가 이럴진대, 드라이어드는 대체 얼마나 주는 것일까.
은근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이런 식이면 드라이어드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이미 약점은 다 파악을 하고 있고, 대충 상대해 주다 방심할 때 꽂아 넣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태정은 자료를 통해 놈들의 약점을 모두 꿰고 있었다.
블랙 나이트 역시 목이 약점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상태.
그 때문에 지체 없이 돌아가 목을 벴던 것이다.
그리고 베는 순간, 그는 느낄 수가 있었다.
약점만 제대로 잡으면 어떤 것이든 손쉽게 벨 수 있겠단 느낌을.
그만큼 놈의 목은 무 베듯 쉽게 썰어졌다.
금이 사방으로 가서 곧 부서질 것 같던 방패도 부수지 못했던 공격으로 말이다.
“일단 이놈이 여기서 튀어나온 게 좀 이상하긴 한데, 계속 가 봐야겠지?”
블랙 나이트를 해치우고 다시 이동을 시작한 태정은 점점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골렘의 부산물과 사지가 찢겨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훼손된 사체.
그것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많아졌고, 어느 순간 산처럼 쌓여 그의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누가 있구나? 이 정도면 1개 파티 이상인 것 같은데. 미수복지라 그냥 들어온 건가?”
이 게이트의 원래 주인은 길드 랭킹 180위권에 있는 중소 길드였다.
왜 이들이 이 게이트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는진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되는 길드에서 미수복지에 경계를 세워 놨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동안 누구나 이곳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
태정 역시도 처음엔 그냥 가 볼까 했었다.
하지만 괜히 이런저런 일로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거금을 들여 구매를 한 것.
당연히 이제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닉스는 스페셜리스트에 들어가는 중견 길드.
그런 길드의 게이트를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전쟁을 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모르고 들어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유권을 가져옴과 동시에 내려온 것이니까.
그 전에 들어갔다면야 뭐…….
“일단. 가서 보고 알려 줘야겠구만.”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드라이어드의 석실로 향하며 태정은 이곳에 들어와 있는 파티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몬스터를 작살내 놓은 것을 보면, 이들의 목표 또한 드라이어드일 것이고.
그 정도면 굉장한 레벨의 실력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길드 랭킹 20위권.
혹은 톱 텐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일단 긴장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 그렇다곤 할 수 없지만 힘이 없으면 기어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의 암묵적인 룰.
아무리 소유권을 주장해도 ‘어쩌라고’ 한마디에 입을 닫아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해서 그는 미리 클로킹을 전개했다.
보고 판단을 하려는 것.
재수 없게 지금 들어가 있는 길드가 금사자라도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곳은 미수복지의 구석진 던전이고, 현재 자신은 혼자인 몸이니까.
그렇게 이동에 이동을 거듭하던 그의 귀에 무언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들어가자 그 소리는 명확해졌고, 곧 그게 누군가의 고함 소리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리고 보이는 코너와 선명하게 들리는 굉음들.
그가 재빨리 코너를 돌아섰다.
그러자 빛에 묶여 포효하고 있는 거대한 묵빛 용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햐. 지리네. 옥토퍼스, 아니 덩치는 더 크겠는데?’
대충 봐도 건물 5층 규모는 될 법한 압도적인 크기에 그가 살짝 긴장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괴물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고작 한 명이었다.
검을 든 채 허공에 떠서 무언가를 난사하고 있는 사내.
그 모습이 흡사 플라즈마를 방출시키는 것 같았다.
‘오러인 것 같은데. 저렇게 연속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이 있었나?’
태정이 추정키로 사내는 검사 계열의 헌터가 분명했다.
어떻게 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검을 사용한다는 것과 오러를 방출한다는 것을 보면 다른 직업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무장 상태였다.
치마도 바지도 아닌 펄럭이고 있는 요상한 의상.
허리춤엔 천으로 된 띠를 차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던전에 고작 천때기 하나를 걸치고 오다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는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사내는 움직임마저 날렵했다.
드라이어드의 맹렬한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는 것이, 마치 허공을 대지 삼아 워커 팩을 전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순간 스퍼트는 블라스터보다도 빠른 듯 보였는데, 도저히 사람이라곤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신출귀몰한 몸놀림이었다.
‘하늘에서 저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다고? 나도 저 정도까진…….’
사내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방출되는 오러의 규모도 커졌다.
2미터 남짓 되던 오러 덩어리가 지금은 무려 4~5미터까지 변화했고, 그것에 격중당하고 있는 드라이어드가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격이 거세지고 마법이라 해도 믿을 만큼 수많은 오러가 때려 박히고 있었지만, 드라이어드의 가죽은 세상 가장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졌는지 티끌만 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바로 그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오러를 난사하던 사내의 몸에서 이글거리는 청광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주변으로 광풍이 몰아치더니 청색 기류가 회오리치며 검이 수 미터까지 늘어났다.
스페셜 무브.
한눈에 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필살 기술이 분명했다.
얼마나 기세가 대단한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그에게까지 바람이 태풍처럼 다가왔다.
바로 그때.
사내의 입에서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청룡검법 제3식, 구룡!”
마치 명령과도 같은 그의 외침에 회오리치던 청색 기류가 순식간에 아홉 마리 용의 형상으로 변화했다.
하늘에 떠서 사내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대한 청룡들.
그것은 드라이어드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슈아아악-!
번쩍!
쾅!
콰콰쾃! 콰콰콰콰!
콰쾅-! 쾅!
아홉 마리의 청룡이 드라이어드와 직격하며 일대에 엄청난 충격파가 일어났다.
코너 끝에 서 있던 태정의 몸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여기저기로 나부낄 정도였으니, 실로 대단한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드라이어드의 본체.
육성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걸 맞고도 저리 멀쩡하다고?”
조금 전 공격은 못해도 b6-1 이상이었다.
직접 맞아 본 적은 없지만, 몸이 본능 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데, 그걸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의 상태는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태정이 놀란 만큼 사내 역시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그때.
입을 벌리며 서 있는 사내의 등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또 한 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뭐야!? 한 마리가 아니야?”
사내의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또 한 마리의 드라이어드였다.
자료에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내용.
태정과 마찬가지로 사내 또한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인지, 흠칫하며 재빨리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뒤쪽에서 튀어나온 놈의 아가리는 이미 벌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차 싶은 사내의 얼굴과 드라이어드의 아가리에서 솟아나는 극한의 빛.
도저히 피할 시간이 없었다.
당했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슈아악!
쾅!
어디선가 자색 오러가 날아와 드라이어드의 눈깔을 격중시켰다.
그러자 놈의 고개가 들리며 모였던 빛이 하늘로 뿜어졌다.
샤아아악-!
쾅!
콰콰쾅-! 콰르릉! 쾅!
브레스가 천장에 직격하자 동굴이 무너질 듯 들썩거렸다.
그리고 드러난 믿을 수 없는 광경.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이터가 천장에 형성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은 크레이터라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 깊은 굴이었다.
그 너비가 무려 드라이어드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마치 운석이 거꾸로 충돌을 한 것 같은 모습.
그만큼 브레스의 위력과 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꼼짝없이 당했다 싶던 사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전방을 바라봤다.
공중에 떠 있는 빛이 나는 자색의 검.
놈의 눈알을 찌른 것은 저 검으로부터 튀어나온 것이었다.
사내가 경계의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내 형체가 잡히며 무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을 잡고 있는 사람 형상의 기계였다.
그가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십니까?”
사내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검을 들지 않은 기계의 다른 한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갈 뿐이었다.
이후 그것으로부터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깨어나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사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