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태정의 명령에 천신병의 양팔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뭔가 기술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들뜬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허공으로 올라가던 카이저의 양팔이 정확히 가슴팍에 멈춰 교차했기 때문이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카이저.
의아함에 그가 물었다.
“뭐 하냐? 그게 공격 자세냐?”
[농담하나.]
“그럼 뭔데?”
[난 피라미는 상대 안 한다.]
“뭐라고?”
[미리 얘기했을 텐데.]
믿을 수 없는 그의 말에 태정이 제라드를 찾았다.
“이놈 지금 뭐라는 거냐.”
-아무래도 급이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게 뭔 상관이야? 내가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은 독립된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으로 주인님께서 강제하실 순 없습니다.
“그 뭔…….”
태정은 어이가 없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죽어라 소환 조건을 맞췄더니, 이제는 강제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스킬이 다 있단 말인가.
“그럼 뭐 하러 기어 나왔냐?”
[네가 불렀으니까.]
“그럼 나가 싸워, 인마.”
[흥. 이런 하찮은 곳에서 주먹을 쓸 바엔 다시 봉인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미친. 어쩐지 쿨타임이 없는 게 이상하더라니.”
강력한 스킬은 그만큼 긴 쿨타임이 존재했다.
b6-1은 15일, 핵미사일은 30일이었다.
하지만 천신병엔 그 쿨타임이 없었다.
마나만 충분하면 원할 때 얼마든지 사용을 할 수 있다는 뜻.
문제는 쿨타임이 없는 대신 이놈에겐 명령 거부권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쿨타임이 있는 것보다 더 못한 상황.
못마땅한 표정을 한 태정이 그를 향해 물었다.
“거기 계속 그대로 서 있을 거냐.”
[이렇게 바깥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군.]
“보면 열만 받으니까, 가라 그냥.”
[언령을 읊어야 돌아갈 수 있다.]
“언령이라니?”
[돌아가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뭐라고? 이런 병… 제라드, 이놈 말이 사실이냐?”
-맞습니다.
“어이가 없네.”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마라. 나를 이곳에 세워 두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
카이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상, 공중 할 것 없이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있는 몬스터들.
이대로만 사냥을 해도 충분히 이점을 가질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근데 왜 이렇게 머리가 멍한 것 같지? 갑자기 몸이 축 늘어지는데.”
-주인님의 정신력이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어 그렇습니다. 앞으로 유지 시간은 5분 정도가 한계입니다.
“아아. 그런 제약까지 있었어? 참 고맙다, 지금 말해 줘서.”
-별말씀을.
[저건 반어법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뭐라 한 소리를 하려던 태정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몸이 이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정신이라도 잃으면 큰일이기에 한숨을 쉰 그가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돌아가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손은 왜 자꾸 드는 거냐.]
“빨리 꺼져, 인마.”
[그러지.]
나타날 때와 다르게 사라질 때는 금방이었다.
거대하게 솟아 있던 천신병이 사라지자 얼어 있던 몬스터들이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라드의 조언이 들려왔다.
-나갔다가 시간을 두고 다시 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또 끌릴 텐데. 그게 무슨 의미야.”
-그래도 마리당 경험치가 상당해 주인님의 레벨에선 치고 빠지는 전술로도 충분히 성장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맞는데.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게 아니잖아.”
오늘 이곳에 온 궁극적인 이유는 성장보단 전투력 측정의 성향이 강했다.
얼마나 강한지를 봐야 써도 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놈이 이렇게 나온 이상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못하는 건, 소환 조건을 맞추지 못했을 때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심했다.
실체를 끌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봐.”
-예. 주인님.
“너 말고. 카이저, 너 말이야.”
[또 뭐지?]
“드라이어드… 정도면 해볼 만하겠냐? 이곳의 보스 몬스터다. 자료에는 900 이하 접근 금지라고 되어 있더군. 어떠냐. 그 정도면 네 상대로 차고 넘칠 것 같은데.”
태정의 말에 카이저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런 피라미는 상대 안 한다.]
“못 이기는 건 아니고?”
[내가? 우습군. 그런 놈은 한 트럭이 와도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이건 저 구석에서 자빠져 자고 있는 망령도 아는 일이지.]
“그럼 증명을 해 봐. 놈 앞까지 데려다줄 테니.”
태정이 도발하자 카이저가 비웃음과 함께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글쎄. 네가 그곳까지 갈 수나 있을까. 지금 네 전투력으로 드라이어드의 비동까지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당장 이 협곡도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희박하지.]
“간다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땐 못 이기는 척 몸 한번 풀어 주지.]
“그 말 잊지 마라.”
대화가 종료되었을 때 그의 손엔 두 개의 검이 합쳐진 창 형태의 스피어 블레이드가 잡혀 있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돌파해야지.”
-무립니다. 이 정도 숫자는 기체가 있어도 감당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나갔다 다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 내 어떻게든 비동에 도달해 놈의 능력을 봐야겠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넌 인공지능이라 몰라, 있는 패를 까 보지 못하는 그 답답한 심정을.”
-그래도 이건 너무… 이미 인식이 되어 클로킹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한테도 생각이 있으니까.”
조금 전 카이저와 대화를 하며 조여 오는 새 떼들을 관찰하던 태정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즉에 날아왔어도 날아왔어야 할 마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브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위에 있는 놈들의 아가리에서 빛이 모이는 것을 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빛은 금세 사라졌고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놈들도 같은 편은 공격을 못 한다는 거지.’
마법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 있어 굉장한 이점이었다.
몸을 통해 들어오는 물리 공격력은 블레이드를 통해 무시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닿기 전에 썰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놈들에게 붙어야 했다.
“그럼 배운 걸 한번 써먹어 볼까.”
창을 든 태정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놈들과의 거리가 멀어지며 앞에 놈들과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동시에 그의 창이 좌우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정식 명칭은 무화곤.
봉 돌리기 혹은 창 돌리기라고도 부른다.
검술 교육이 끝난 후 미친 듯이 연마를 했던 기술이었다.
공격과 동시에 방어가 가능한 전천후 무기술.
그냥 사용해도 충분히 위협적인 기술이었지만, 태극 1호의 힘과 맞물리자 회전하는 속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그 공격에 몬스터들이 갈려 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촤아아악-!
부우웅!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그의 블레이드에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떼로 쓸려 나갔다.
[블랙다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3,800만을 획득합니다.]
[팔콘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5,500만을 획득합니다.]
[에코몬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4,250만을 획득합니다.]
[블랙다이번의 깃털…….]
파도처럼 밀려오던 몬스터 장벽이 무너지며 블레이드의 반경만 한 구멍이 형성됐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새 떼가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한번 뚫린 구멍은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
수백에 달하는 괴수 중 단 한 놈도 돌아가는 블레이드를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닿는 순간 사지가 조각나 흩어지는 놈들.
그의 예상대로 마법은 그 어느 곳에서도 날아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시커먼 괴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태정이 서 있는 구멍은 지상에서 보면 보이지도 않을 정도.
그만큼 몬스터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800 이상은 확실히 레벨이 있구나.’
꾸역꾸역 하늘의 길을 뚫어 나가고 있는 태정은 새삼 S급 헌터들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남극대륙에서의 일전으로 별거 아니라 치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사냥을 하는 곳에 와 보니 재평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고작 소규모 파티 2개로 이 많은 놈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쉬이 상상이 가지 않는 태정이었다.
물론, 그 S급 헌터들이 지금 태정의 모습을 본다면 턱이 빠질 정도로 놀라고 있을 테지만.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마리당 경험치가 상당해 레벨 업도 곧잘 되고 있었다.
적은 놈은 3천, 많은 놈은 6천까지도 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아직까지 그의 검에 작살이 나지 않은 놈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그의 전투력이 최약체인 블랙다이번 외, 나머지 놈들에게도 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동까지는 어찌어찌 가겠는데.’
사냥을 하다 보니 어느덧 덤벼드는 놈들의 숫자가 꽤 줄어들었다.
여전히 하늘은 괴수 떼로 바글바글했지만, 거리를 둔 채 배회하는 놈들이 많아졌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 것과 별개로 태정은 계속해서 전진을 해 나갈 뿐이었다.
그러다 들려온 생소한 알림음 하나.
[재래식 무기 상점 포인트 1을 획득합니다.]
“무기 상점 포인트? 제라드, 이거 아까 새로 얻은 스킬에 사용하는…….”
-맞습니다.
“이것도 빨리 확인을 해야겠는데.”
그가 기억하기로 분명 업그레이드 상점이었다.
말 그대로 무기를 강화할 수 있는 스킬이라는 뜻.
할 수 있다면 하고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를 헤치고 나가기도 잠시.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시원하게 뚫린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의 후방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브레스가 일시에 뿜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태정을 적중시킬 수 없었다.
마법의 속도보다 블라스터의 속도가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놈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태정은 전속력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마치 물감을 풀은 듯 시커먼 것들이 하늘을 물들이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천 마리다, 수천 마리.”
그렇게 많이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는 전혀 줄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사할린 탈출 작전 이후, 이렇게 많은 놈들은 그도 처음 보는 광경.
혀를 내두르며 다시 전방을 바라본 그의 앞에 블랙다이번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나온 게 아니었나.”
그의 블레이드가 사정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무더기를 순삭했을 때. 또 한 번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인센디어리 디바이스(소이탄)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