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가 본 것은 선이었다.
컴컴한 어둠 속 선명이 보이는 묵색의 선.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당장 보이는 것만 4개.
정확히 정사각형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몇 시간이고 명상을 하며 집중을 할 땐 보이지도 않던 것이, 뜬금없이 지금에서야 보이다니?
‘뭐지? 이쪽은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의아해하기도 잠시.
그 선은 금세 사라져 내면이 검은색으로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제라드.”
-예, 주인님.
“자각 칩이라는 거 말이야. 집중을 하기 용이하게 만들어 주는 칩이라지 않았나?”
-맞습니다.
“근데 방금 이게 왜 보인 거지? 방금은 집중은커녕,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잠재의식을 개방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자각 칩을 통해 해당 공간에 집중을 하는 것으로, 현재로선 가장 쉽고 빠른 방법입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의 영역에 빠져들어 칩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럼 방금 내가 그 방법을 통해 본 건가?”
-맞습니다. 주인님께서 자각 칩을 통해 드러난 구조를 눈에 담을 수 없는 건, 집중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집중력이란 건 훈련을 통해서 강화시킬 수 있는데, 생각처럼 단시간 내에 올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특히 무의식의 구조를 볼 수 있을 만큼의 집중력을 키우려면 보통 수준의 레벨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한데, 방금 전 주인님의 집중력은 평소보다 수십 배나 올라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형성된 무의식에 자각 칩이 반응을 한 것이고, 그래서 일부나마 연결이 돼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럼 난 두 번째 방법이 더 쉬운 거 아냐?”
-첫 번째 방법이든 두 번째 방법이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입니다. 대신 첫 번째 방법은 타깃이 확실하단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타깃이 없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왜 없어? 방금처럼 그 생각을…….”
-인간의 뇌는 학습을 통해 적응하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좋은 꿈을 꾸면 그 꿈을 다시 꿀 수 없는 것처럼, 방금 형성된 무의식도 같은 생각으론 형성되지 않을 겁니다.
“되면?”
-이렇게 고생을 하실 필요가 없겠죠.
“그래? 일단 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자.”
검술 교육을 받고 개인 훈련장에 들어선 태정은 차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세아를 떠올려 봤다.
하지만 제라드의 말이 사실인지 아까와 같은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대한 그 느낌을 가져가 보려 했지만, 이미 강하게 의식을 해서인지 분위기 자체가 살지 않았다.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진 상태.
다른 생각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을 한 것과 의도적으로 생각해 집중을 하는 것.
이 둘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심했다.
“어렵다, 어려워. 어디 집중력 높이는 책이라도 사서 봐야 하나.”
그날 밤.
띠리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비틀거리는 한 여자가 그의 집에 들어왔다.
동기회를 마치고 돌아온 박세아였다.
그런 그녀의 인기척에 방문이 열리며 태정이 걸어 나왔다.
“뭐야? 이제 들어와?”
“앗. 보스, 안 주무셨네요?”
“술 마셨구나.”
태정이 킁킁거리며 중얼거리자, 그녀가 검지와 엄지를 오므리며 대답했다.
“쪼오끔 마셨어요.”
“말투를 보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얼른 씻고 자.”
“네!”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욕실로 향하는 그녀.
하지만.
쿵!
“아얏!”
문에 머리를 박은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에 태정이 욕실 문을 열어 주며 혀를 찼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지. 술도 못하면서 뭐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기분이 너무 좋아서요. 헤.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는 그녀를 태정이 욕실로 밀어 넣었다.
“씻고 자기나 해.”
문을 닫고 다시 방으로 들어온 태정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제 슬슬 사냥도 가야 하는데… 할 건 많은데, 하루는 왜 이렇게 짧냐.’
남극을 다녀온 뒤 태정의 일과는 잠을 자는 시간 외, 정말 빠듯하기 그지 이를 데가 없었다.
검술도 배워야 돼, 로봇도 생산해야 돼, 정신 수련도 해야 돼, 지역대의 일처리도 해야 돼.
거기에 성장도 포기할 순 없으니, 사냥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곧 있으면 국가전 시즌이라 그에 따른 훈련도 해야 한다.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검술은 이제 막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로봇 군단 역시 이제 물량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회사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 수련은 카이저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중 성장은 멈춰선 안 될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남극에서 얻어 온 정신적 피로가 심해 잠깐 쉬고 있긴 했지만, 이제는 슬슬 가야 할 때.
국가전이 있기 전에 스킬을 하나라도 더 얻어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 태정이었다.
‘내일은 사냥터를 좀 알아봐야겠다.’
머릿속을 정리한 태정이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탁. 스르륵.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며 그림자 하나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소리에 눈을 뜬 태정이 박세아임을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뭐야?”
“아직 안 주무셨어요?”
“씻고 자라니까 왜 나왔어?”
“오늘 인사를 못 드려서요.”
비틀거리던 그녀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보스 덕분에 최고의 하루를 보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자. 빨리. 감사만 한 열 번 받은 것 같다.”
“백 번도 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태정이 일어나 그녀를 내보내려 했다.
그 순간.
숙였던 허리가 그대로 앞을 향하며 태정을 덮치고 넘어졌다.
침대에 몸을 포갠 채, 누운 두 남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은 상관이고 그녀는 부하 직원이었다.
‘일으켜 세워야 돼.’
밑에 깔려 있던 태정이 그녀를 슬며시 옆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밀려 나가던 박세아의 양손이 그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감사… 합니다.”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
그때부터 태정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딱발딱 뛰고,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신음하듯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소리와 옅은 술 냄새 거기에 여자 특유의 살 냄새와 화장품 향이 섞이자, 아무리 원칙을 따르려는 태정도 잡생각이 밀려들 수밖에 없었다.
‘위, 위험해. 이대로 가다간…….’
몸이 베베 꼬이며 더 강하게 끌어안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들었다.
이미 떼어 내려던 그의 손은 그녀의 등을 더듬고 있었고, 이성보다는 본능이 그의 몸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진 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저… 이거 좀 놔줄래?”
가까스로 뱉은 그 말을 들은 것인지, 그녀가 더욱더 목을 끌어안고 몸을 밀착했다.
“보스 품이 너무 따뜻해요…….”
“보일러 올려 줄 테니까, 좀 나와 줄래?”
“으으응. 여기… 그냥…….”
이제 태정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분신은 화가 날 대로 나, 그에게 쌍욕을 퍼붓고 있는 상황.
결국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며 그의 손이 원피스의 지퍼를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어?’
갑자기 의식 저편의 컴컴하던 공간이 그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전에 차에서 봤던 4개의 선이 이어진 정사각형의 공간.
거기에 더해 수십 개의 선이 얽히고 얽혀 마치 미로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 보인다.’
뜻하지 않게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태정은 신기하면서도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었다.
그렇게 용을 쓰고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 이렇게나 잘 보이게 될 줄이야.
그런 그의 귓가로 카이저의 믿을 수 없단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될 것도 없지. 방금 이놈의 집중력은 인간의 평균치를 한참 뛰어넘었으니까. 역시 인간은 특이한 존재야. 그 짓에 그 정도로 정신이 팔릴 수가 있다니.
-역시 주인님은 보통이 아닙니다.
그들이 뭐라 하건 말건 태정은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의식을 계속 집중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러면 그럴수록 미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때, 그가 본능적으로 박세아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다시 선명해지는 미로.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 태정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잔뜩 거칠어진 호흡과 시뻘겋게 충혈 된 눈.
곧 터질 듯 울고 있는 분신은 덤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는 다르게 그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거야, 이거.’
다음 날 아침.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뜬 박세아는 자신의 옆에 보스가 누워 있자 깜짝 놀랐다.
거실에 있어야 할 자신이 왜 보스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일까.
생각을 하던 그녀가 어젯밤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인사를 하러 들어갔다가… 기억이 없어.’
필름이 끊긴 것인지 인사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울상을 지었다.
‘바보같이. 술도 못 마시면서.’
아무래도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은 박세아였다.
잔뜩 취해 보스 방에 들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평소 호감이 있어 더 걱정이었다.
술김에 무슨 말을 했을지, 어떤 행동을 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슬며시 이불 속을 확인했다.
다행히 옷은 벗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야. 아마 옷까지 벗었으면 난 끝장이었을 거야.’
태정이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만에 하나라도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 스스로 벗었을 확률이 높다는 뜻.
태정에게 그런 정신 나간 여자로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박세아였다.
슬며시 침실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자신을 끝없이 책망하며 아침을 준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방 문이 열리며 태정이 걸어 나왔다.
“보, 보스, 일어나셨어요?”
“어? 어.”
“식사하셔야죠?”
“해야지.”
딸깍. 딸깍.
평소와 다르게 수저 소리만이 요란한 거실.
주변이 얼마나 고요한지 그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릴 정도였다.
아무런 말없이 밥만 밀어 넣고 있는 그들.
결국 눈치를 보던 박세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보스.”
“어?”
“어젯밤엔 제가…….”
“아냐. 아냐. 술에 취하면 그럴 수도 있지.”
“죄송해요. 오랜만에 외출이라 기분이 너무 좋아서.”
“괜찮아. 그 뭐 별거라고.”
“제가 혹시 보스께 실수한 게 있을까요?”
“없어. 너 원래 실수 같은 거 안 하잖아. 취해도 똑같더라.”
“정말요?”
“진짜라니까.”
태정의 대답에 그녀가 졸이고 있던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전 또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닌가. 계속 걱정했었거든요.”
“참. 걱정할 것도 많다. 내가 널 아는데. 그리고 설사 실수 좀 하면 어때.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 근데… 말이야. 너 있잖아.”
“네?”
“또 술 마실 일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