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공장을 인수한 태정은 본부에서 제작을 돌리며 임시 저장고가 풀로 찰 때마다 원주로 향했다.
주로 주변 공장들이 문을 닫는 밤에 다녀오곤 했는데, 슈퍼 차저를 장착한 블라스터로 왕복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잠깐 바람 쐬고 오기 딱 좋은 거리.
그렇게 5일이 흐르자 지하 창고 한쪽엔 100여 기의 마르시-1이 오와 열을 맞춰 멋들어지게 정렬돼 있었다.
“겨우 100기 남짓인데 엄청 많아 보이네. 든든하다, 든든해.”
마르시-1의 전투력은 몬스터 레벨로 600 수준이었다.
여기에 전투 준비 태세를 발동하면 650 정도.
즉 이곳에 있는 로봇만으로도 레드 홀 이하 어지간한 던전은 초토화가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르시 100기가 연사로 놓고 동시에 에너지 탄을 쏜다면 그걸 피할 수 있는 놈이 세상 천지에 몇이나 있을까.
최소 초당 천 발이었다.
말이 천 발이지, 1초에 천 발이면 어지간한 광역기는 들이대지도 못할 수준.
그 반경에 들어와 있는 놈들에겐 대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물론 이미 레드 홀을 밟고 있는 태정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니얼의 말대로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병력은 전장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여 줄 것이다.
적어도 700 미만 헌터들은 끔살을 당하지 않을까.
든든한 100여 기의 군사 로봇을 보고 있으니,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천 기까진 뽑아 놔야 그래도 군대라 할 만하겠지? 내일은 포션 좀 쟁여 놔야겠다.”
로봇 제작의 유일한 단점이 소비되는 마나였다.
한 기에 8천.
천룡이나 아이언 스피어 한 발이 5천인 것에 비하면 가성비가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에 8천은 상당한 양이었다.
최상급 포션 4개를 먹어야 겨우 한 기를 뽑아낼 수 있는.
하지만 태정은 그것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일단 그는 가진 돈이 많았다.
제주도에서 얻어 온 마정석만 해도 무려 900억.
공장을 인수하느라 절반을 썼지만 아직도 400억이 넘는 돈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직 금사자 창고에서 털어 온 아이템은 처분조차 하지 않았다.
하니, 물 쓰듯 포션을 써도 부담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솜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한번 보긴 해야 하는데.”
그녀 덕분에 얻은 핵미사일과 아이템이었다.
사할린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최다솜이 눈을 감아 줘서 가능했던 일.
그때 만약 걸렸다면 원정 팀 구조는 실패로 돌아갔을 확률이 컸다.
탈출의 핵심 역할을 했던 그가 금사자에 발이 묶였을 테니까.
물론 한설아라는 변수가 있긴 했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큰 도움을 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한번 연락해 볼까.”
밤이 꽤 깊었지만 생각난 김에 그는 최다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데, 신호음이 가다 말고 금세 자동 안내 메세지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착신이 금지된 번호입니다. 다음에 다시…….
“음? 번호 맞는데?”
번호를 확인한 태정이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착신이 금지된…….
“그새 바꿨나? 아. 해외 출장 간다 했었지.”
마지막 통화 때 유럽 어딘가로 출장을 간다 했던 것이 그제야 떠오른 태정이었다.
“간다더니, 진짜 갔나 보네.”
기지국이 국내밖에 없어 해외로 나가면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물론 마력으로 송수신이 가능한 장거리 통신기를 이용하면 가능하긴 하지만, 유럽같이 먼 곳은 거치는 곳이 많아지기 때문에 여러모로 껄끄러운 점이 많았다.
괜히 금사자나 타 길드에 도청당해 쓸데없는 약점을 잡힐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는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 태정은 방 안에 틀어박혀 정신 수련에 매진하다 새벽 2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르게 8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세아가 집에 있었다.
오늘은 비서 동기회가 있는 날.
약속 시간은 12시였지만 아침부터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를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태정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화장에 같은 옷, 같은 머리 스타일.
외출을 하는데도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그가 입을 열었다.
“너 옷 그거 말곤 없어?”
“네?”
“옷 말이야. 왜 맨날 같은 옷만 입냐. 그거 출근할 때 입는 옷 맞지?”
“아. 비슷한 옷이 두 벌이에요. 하나 입으면 하나는 빨아서 입는데, 좀 더럽나요? 어제 입은 건데.”
“옷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오늘은 모처럼의 외출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동기들 만난다며. 보통 여자들 이런 날 좀 꾸미고 나가지 않나?”
“아아. 이거 제 나름대로 꾸민 건데 좀 아닌 것 같아 보이세요? 다른 옷으로 입을까요?”
“다른 옷도 이거랑 비슷한 거라며.”
“네. 그런데 색이 좀 달라요.”
“끄응. 가방도 저거 들고 갈 거지?”
태정이 밑창이 헤진 가방을 가리키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구두도 늘 신던 거 신을 거고. 그렇지?”
“네.”
“안 되겠다. 거기 가기 전에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딜요? 출근 안 하세요?”
“오늘 오전, 훈련 때문에 뺐어. 대충 입고 나와.”
박세아는 태정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보스의 명령이니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나와 차를 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대형 쇼핑몰에 도착했다.
“갑자기 여긴 왜…….”
“일단 와.”
박세아의 손을 끄집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태정은 의류 매장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길드원들이 이용하는 곳인 만큼 이미 대부분의 매장이 모두 오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어디가 좋을까. 그래. 저기부터 가자.”
태정은 정면에 보이는 가장 큰 명품 매장으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딸려 온 박세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정을 빤히 쳐다봤다.
여길 왜 왔냐는 눈치.
그런 그녀에게 태정이 양손을 벌리며 입을 열었다.
“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다 골라.”
“네?”
예상치 못한 말에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태정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라고. 사 줄 테니까.”
“갑자기 왜… 저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충분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사라 할 때 사,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그럼 밑에 저렴한 매장도 많아요. 여기서 한 벌 살 돈이면 밑에선…….”
“거참. 다른 건 네, 네 잘하면서 이런 건 왜 이렇게 말이 많냐. 저기 직원님.”
태정이 옆에서 타이밍을 보고 있던 여자 직원을 부르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고객님.”
“여기 저한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인데,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습니다. 자리에서 제일 빛날 수 있게 코디 좀 부탁드릴게요.”
“그런 건 제 전문이랍니다. 고객님, 이쪽으로 와 보시겠어요?”
직원에게 박세아를 인계한 태정은 소파에 앉아 그녀가 옷을 고르길 기다렸다.
“여기 이 옷이 이번 신상인데, 사회에는 풀리지 않고 몇몇 길드에만 나와 있는 상품이거든요. 럭셔리하면서도 우아함이 강조된 원피스라 모임 같은 곳에 가서 입기 딱 좋은데. 어떠세요?”
직원이 가지고 온 옷은 확실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색감부터 디자인까지.
명품을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옷을 만져 보던 박세아가 직원을 향해 물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해요?”
“1,420만 원인데 길드 간부님이시면 5% 할인이 돼서, 가격은 조금 다운이 되세요.”
“처, 천사백이십만 원요!?”
가격을 듣던 박세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명품 매장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겨우 원피스 하나가 1,420만 원이라니?
그 돈을 주고 옷 하나를 산다는 건 그녀의 경제 상식으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 죄송한데, 좀 싼 건 없을까요?”
박세아가 소파에 앉아 있는 태정을 슬쩍 보며 속삭이듯 묻자, 직원이 마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되물었다.
“저렴한 거요? 저희 브랜드는 럭셔리 브랜드라 저렴한 상품은…….”
그 소리를 들은 태정이 그들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뇨. 고객님이 저렴한 걸 찾으시기에 제가 막 추천을 해 드리려던 참이었거든요.”
“저렴이라뇨? 제가 분명 최고로 맞춰 달라 한 것 같은데.”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직원이 든 옷을 받아 박세아의 몸에 대봤다.
“괜찮은 거 같은데. 입고 나와 봐.”
태정의 말에 박세아가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소곤거렸다.
“이거 가격이 천만 원이 넘어요.”
“그게 뭐. 잔말 말고 입고 나와.”
옷을 품에 안겨 준 그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피팅 룸에 들어간 박세아는 먼지라도 묻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저한테 안 어울리는…….”
“야. 완전 예쁘잖아. 딱인데, 이거? 네 꺼야, 네 꺼.”
태정의 말에 직원이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다.
“이 옷 어울리시는 분은 많이 봤는데. 자기 옷같이 딱 떨어지는 분은 처음 뵙는 거 같아요. 꼭 손님을 위해 만들어진 옷처럼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일단 이거 하나 하고. 또 봐 봐. 옷발이 잘 서니까. 뭘 입어도 예쁘잖아.”
“아뇨. 저 이거 하나면 죽을 때까지 충분…….”
“어허이. 시간도 없는데 참. 저기 직원님?”
“네.”
“그냥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같은 사이즈로 전부 주세요. 어울릴 만한 가방도 몇 개 주시고. 구두도 한 서너 개 주세요.”
태정의 말에 직원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졌다.
반면 박세아는 손을 내젓기 바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얼맙니까.”
“원피스 16벌에 가방 5개, 구두 5개 해서 총 2억 8천만 원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깜짝 놀란 박세아가 마지막 힘을 짜내 쇼핑백을 한쪽으로 모두 치웠다.
“저 이거 한 개만 할게요. 나머진 다 빼 주…….”
“좀 나와 봐. 여기 이 사람 하는 말 신경 쓰지 말고 돈은 내가 내는 거니까. 다 주세요, 일시불로.”
“네, 고객님! 일시불 끊겠습니다! 계산되셨구요. 들고 가실 건가요?”
“하나는 입을 거고 나머진 배송 부탁드립니다.”
가장 예쁜 옷과 구두 가방을 입혀 나온 태정은 다음으로 귀금속점으로 향했다.
“이거 얼맙니까.”
“이건 최상급 다이아몬드가 9개 박힌…….”
“그래서 얼맙니까.”
“1억 2천입니다.”
“주세요.”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일시불에 정리한 태정은 마지막으로 헤어 메이크업 숍을 들렀다.
주문은 간단했다.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사람으로 부탁드립니다.”
약 1시간 30분의 시간이 흐르고, 책자를 보고 있던 그를 누군가가 불렀다.
“고객님? 고객님?”
메이크업 어시를 보고 있던 직원이었다.
“아. 다 됐습니까?”
“네. 이쪽으로 와 보시겠어요?”
직원이 어딘가를 보며 말하자 박세아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
하지만 그런 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예쁘다.’
메이크업을 끝낸 그녀의 모습은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했다.
절세미인, 천상 선녀, 절대 여신.
그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원래부터 본판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꾸미니 이건 뭐 답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빼어나다 못해 후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좀 이상한가요?”
“…….”
“좀 많이 이상해요?”
“아니, 베스트야. 내 평생 이런…….”
미인은 처음 본다는 말을 겨우 눌러 삼킨 그가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산대로 향했다.
‘저렇게 예쁜 아이였나.’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온 태정을 향해 박세아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보스. 제가 뭐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이런 과분한…….”
“야. 쉿.”
“네?”
“울지 마. 겨우 한 화장 다 번진다. 삼켜 빨리. 이게 얼마짜리 메이크업인데.”
“앗. 네. 죄송…….”
“너 예뻐서 사 준 거 아냐. 명색이 지역대장 비서인데, 이 정돈 갖추고 가야 내 면이 살지. 뒤에서 얼마나 욕하겠냐. 그러니까, 전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날 위해서 산 거니까. 알았어?”
말은 저리해도 자신의 부담을 덜어 주려 하는 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세아였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고마웠다.
“네. 그래도 고맙습니다, 보스.”
“고마워하지 말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하지도 마.”
박세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환골탈태시켜 보낸 태정은 훈련소로 가는 길에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돈은 좀 깨졌지만 보이지 않는 그 이상의 것을 얻은 태정이었다.
한사코 싫다고 거절은 했지만 쇼핑몰을 빠져나오는 내내, 여기저기 걸린 거울을 수십 차례 들여다보며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
그 모습이 그에겐 돈 수억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저리 좋아할 걸 알았으면 진즉에 사 줄걸. 가진 돈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건데. 그건 그렇고 박세아… 예쁘긴 진짜 예쁘구나.’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던 태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배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어?”
무언가 잊고 있던 것이라도 생각난 듯 그의 입이 자동으로 벌어졌다.
어디 깜빡한 것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어 벌어진 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