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배의 목적지와 경유지가 결정 나고 출발을 앞둔 이들이 승선하기 시작했다.
“제라드 님, 혹시 유럽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독일에 꼭 한번 들러 주십시오. 엘리엇에서 저를 찾으시면 바로 달려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저희도 한번 꼭 들러 주세요. 베니스 길드에 있습니다.”
“저희는…….”
대니얼을 필두로 너도나도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특히 처음 극지에서 함께했던 10인과 위너스 길드의 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붙어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 그들도 하나둘 배에 오르고, 드디어 마지막 리나만이 그와 마주 서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돌아갈 나라가 없는 그녀를 향해 물은 말이었다.
“우선은 독일로 가려구요.”
“그럼 대니얼 님의 엘리엇 길드로 가시는 겁니까.”
“네. 가서 아버지를 찾을 거예요.”
“히든이라고 하셨던 그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분명 이 일의 전말을 알고 계실 거예요. 화산이 쓰러진 전달까지도 봉신방에 대해 알아보고 계셨거든요.”
“그렇군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일이 잘 풀리길 바라겠습니다.”
태정이 그리 말하며 악수의 손을 건네자, 그녀가 손을 잡으려다 그의 품에 와락 하며 안겼다.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무슨 은혜까지나…….”
다시 떨어져 나온 리나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꼭 다시 만나길 빌게요, 제라드 님.”
그녀의 탑승을 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출항을 하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수많은 사람.
그들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도 없던 이 지옥에서 자신들을 꺼내 준 유일한 사람.
평생의 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영웅!”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코리아 넘버 원!”
“찾아뵙겠습니다! 제라드 님!”
점점 멀어지는 배와 희미해져 가는 외침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정은 어딘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자신이 바로 돌아갔다면, 저 많은 사람 중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구조대가 바로 출발한다 해도 아마 대부분은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잘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역시. 해보길 잘했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태정은 한동안 텅 빈 대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불과 한나절 전까지만 해도 사투를 벌였던 피의 전장.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만이 남아, 작은 눈발만이 쓸쓸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
그가 북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 볼까.”
* * *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레버를 당겨 놓고 쭉 직진만 하고 있는 태정의 머릿속은 상념으로 가득했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그.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선 중요한 것은 이 일을 국내 단체에 알리느냐 마느냐였다.
어차피 남극을 출발한 배가 각국에 도착을 하면 알게 될 일이지만, 그냥 지나가기엔 뭔가 찝찝한 것이 있었다.
아직도 중국에 남아 있는 헌터들이 있다면 계속해서 납치가 이뤄질 텐데,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 사실은 최대한 빠르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태정은 여기저기 불려 가며 세간의 관심을 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제라드라는 가명도 사용을 한 것이다.
‘일단 톱 텐에 편지를 넣어 봐야겠어. 어차피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단체는 열 개 남짓이니, 보고 느끼는 게 있으면 알아서 대응을 할 테지. 그건 그렇고 그놈이 말한 그 존재들이 걸리는데 말이야.’
수십 개의 국가를 상대로도 이길 수 없을 거라 단언을 했다던 그들.
대체 놈들의 정체가 뭘까.
태정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인간에겐 쓸모가 없는 영석을 모으는 것 또한 꺼림칙한 일이었다.
‘일단 제보를 하고 지켜보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까.’
동해를 통해 대한민국 상공에 진입한 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닉스 본청에 도달했다.
여느 때와 같이 숙소 옥상에 내려앉은 그의 신형.
바로 집으로 내려간 태정이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향과 함께 포근한 기운이 그를 따스히 반겨 줬다.
“아… 역시 집이 최고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한 박세아가 집에 있는 태정을 보곤 놀라서 물었다.
“벌써 다녀오신 거예요?”
“좀 일찍 끝났네.”
“조금이요? 아직 10일… 도 되지 않았는데. 한 달은 걸릴 거라 하셨잖아요.”
“왜? 다시 갈까?”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배고파.”
“씻고 금방 차려 드릴게요.”
그녀가 씻으러 들어가고, 가지고 온 파일들을 훑어보던 태정은 지난 일주일의 일처리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가기 전 거의 마무리를 지었던 안건 몇 개가 승인을 받았고, 진행 중 수정 사항에 있다는 것 외, 딱히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렇게 하나하나를 보던 그의 눈에 생소한 것 하나가 포착됐다.
파일과 떨어져 있는 청첩장과도 같이 생긴 봉투.
안을 열어 보니, 메시지 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닉스 13기 비서 동기회… 초대장? 이런 것도 있나?”
따로 길드의 직인이 없는 것을 보니 동창회 같은 모임인 듯했다.
잠시 후.
씻고 나온 박세아가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집에서의 식사.
숟가락이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천천히 드세요. 가져가신 음식은 다 드셨어요?”
“어. 아주 깨끗이 다 먹었어. 하나도 남김없이.”
“그걸 다요? 한 달치였는데.”
“나도 놀랐어, 내가 식성이 그리 좋은지. 그보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없었지?”
“네.”
“힘든 건 없었고?”
“따로 결재할 안건도 없었고, 그냥 무난한 한 주였어요. 저번 주도 그랬구요.”
“그래? 뭐 일이 있어도 너라면 알아서 잘했겠지만.”
“이번엔 어땠어요?”
“그저 그랬어. 남극이라 해서 긴장 좀 했는데 별거 없더라구.”
“볼일은 잘 보셨구요?”
“어. 근데 그놈이 말을 잘 듣질 않네.”
“네? 누구요?”
“있어. 덩치만 더럽게 큰 놈.”
“참. 사흘 전에 이석호 씨에게 연락이 왔어요, 전화가 안 된다고.”
“왜? 그쪽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건 아닌 것 같았고 그냥 연락을 하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출장 중이라 말씀드렸어요. 돌아오시는 대로 알려 드리겠다고.”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참, 근데 비서 동기회가 있는 것 같던데.”
태정의 말에 그녀가 자신의 가방 쪽을 한번 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보셨어요? 1년에 한 번씩 있는 모임인데 축제 같은 거예요. 저는 이번에 뺐어요.”
“왜? 맨날 일만 하는데, 그런 데라도 한 번씩 갖다 와야지. 바람도 좀 쐬고.”
“일도 해야 하고 보스도 없는데, 제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좀…….”
“왔으니까, 다녀와.”
“정말요?”
“뭐야. 왜 그렇게 좋아해? 남자도 있나 혹시?”
“아. 그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줄곧 여기서만 자랐거든요. 그래서 친구가 없는데, 동기들이 유일한 제 친구들이라서요. 배정받고는 한 번도 보질 못해서…….”
“그럼 말을 하지. 내가 연차 한 달씩 내줄 수도 있는데.”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아무튼 다녀와. 다음 주지? 후회 없이 실컷 놀다 와. 그날은 네 날이다 생각하고.”
“고맙습니다, 보스.”
“별걸 다…….”
다음 날.
지역대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 태정은 거리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숙소 앞, 길 건너, 정류장, 심지어 셔틀에서 내리는 일부 헌터들에게서도 그 이상한 것은 목격됐다.
“보스 안 타세요?”
“어? 어. 타야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에 올라탄 태정은 이내 박세아의 브리핑을 들으며 지역대에 도착했다.
그렇게 로비를 지나 막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숙소 앞에서 봤던 그 이질적이면서도 이상한 것들이 사무실에서도 목격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왜 다…….”
태정이 본 것은 바로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앞뒤로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
바로 그가 박세아에게 선물을 받았던 그 난감한 디자인의 트레이닝복이었다.
“왜 그러세요? 보스?”
“저 옷들 뭐야? 아까 숙소 앞에서도 그렇고. 왜 다들 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태정의 물음에 그녀가 작게 손뼉을 치며 깜빡했다는 듯 대답했다.
“아. 말씀드린다는 걸 잠깐 잊고 있었어요. 그날 하루 입으신 옷 있잖아요. 제가 선물해 드린 거요. 지역대장이 입은 옷이라고 소문이 퍼졌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보스는 영지전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잖아요? 디자인도 유니크 해 너도나도 사겠다고 해서 제가 매장을 알려 줬는데, 하루 만에 완판이 되더니 다음 날부터 유행이 돌더라구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다고?”
“신기하죠? 저도 되게 신기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퍼졌는지. 더 놀라운 사실은 뭔지 아세요?”
“뭔데.”
“옷 가격이 무려 다섯 배로 올랐어요. 다섯 배요.”
그녀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손가락까지 펴 보이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 옷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몸값도 같이 올라서 그 이름으로 길드원 전용 브랜드도 새로 론칭을 했거든요. 크리스천 다올이라고요.”
“크리스천 다올? 그게 뭔 뜻인데.”
“디자이너가 김다올이란 사람인데, 독실한 크리스천 신자라 크리스천에 본인 이름을 붙여서 만들었다 하더라구요.”
“그래? 뭐 어쨌든 그 사람은 대박 났겠네.”
“모델이 좋으니까요. 안 그래도 보스 오시면 감사 인사 드린다고 꼭 연락 달라고 했었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고…….”
“됐어. 무슨 감사까지야. 그리고 옷은 그거 한 벌이면 충분해.”
“그래도… 그 옷 마음에 드신 거 아니셨어요?”
“옷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선물해 줬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무튼 난 됐으니까. 혹시 연락 오면 마음만 받겠다 그래.”
집무실로 들어온 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딱 하루 입은 옷이 대유행이 되어 번지다니.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이런 파급력이 생기는 것일까.
하여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진짜 별일이 다 생기는구나.”
그날 오후.
태정은 길드를 나서 서울로 외출을 나갔다.
봉신방에 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보낼 곳은 한산도를 포함 톱 텐에 든 길드 열 곳.
사실상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실세들이었다.
특수우편을 통해 서신을 붙인 태정은 오랜만에 한강 둔치를 걷다 오후가 되어 복귀했다.
그날 저녁.
비슷한 시각, 한산도를 포함한 톱 텐의 길드로 서신이 한 장 도착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봉신방이란 세력이 화산을 무너뜨림.
중국 본토에서 자국민들을 상대로 한 납치가 성행 중임.
그들은 특수한 마정석을 얻기 위해 쓰여지고 있음.
하루에도 수십 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죽어 감.
중국 내 한국 헌터들을 한시라도 빨리 철수시켜야 할 것.
이 모든 건 귀환 중인 인천의 위너스 길드원들이 증명할 것임.
-제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