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기지를 벗어나 약도대로 움직이고 있는 태정은 사람들과 간단하게 통신을 확인한 후, 프리지아를 향해 물었다.
“아까 그거 뭐야?”
=뭐?
“그놈이 빨갛게 변하니까. 너희 놀랬잖아.”
=아, 그거? 별거 아냐.
“별거 아닌데 세 놈이 동시에 반응을 해? 뭐 있지? 어이, 카이저. 네가 얘기해 봐라.”
[확실하지 않은 사항이라 지금은 말해 줄 수 없다.]
“뭐 또 그놈의 특이점이 와야 하는 거냐?”
[내가 생각하는 게 확실하다면, 시리우스가 세워 놓은 기준인 특이점은 의미가 없어진다.]
“의미가 없어진다… 그럼 그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건가?”
[지금은 아무것도 확답을 줄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길 바라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
“이거 뭐 나만 모르니 너무 답답하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아닐 거니까.
“제라드. 넌 뭐 해 줄 말 없냐.”
-지금으로선…….
“됐다. 너라고 해 봐야 다를 게 없겠지.”
-그럴 확률은 매우 낮으나, 프리지아 님이나 천신병의 생각이 맞다 해도 준비하실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있을 겁니다.
“준비할 시간? 뭐 대비할 시간 같은 건가.”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괜히 들었군.”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속 시원한 대답도 듣지 못할뿐더러,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의문만 가중돼 머리만 아팠기 때문이다.
하나 다행인 점은 그 아무도 모르는 엄청난(?) 비밀을 아는 놈이 셋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때가 되면 누구든 어련히 알려 주지 않을까.
지금은 이곳의 일부터 마무리를 짓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눈앞에 마치 산맥처럼 이어진 거대한 빙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라드, 거기서 보이는 동굴이 몇 개나 되지?
-북동 7시 방향과 북서 11시 방향 절벽에 동굴이 하나씩 보입니다.
“7시랑 11시라. 저 절벽 쪽은 스킬이 있어도 올라가기 힘들겠는데? 일단 7시로 내려가 보자.”
천천히 아래로 하강한 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여기저기 찍혀 있는 발자국들.
그것은 동굴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인가 본데.”
* * *
남극 남부 라인 제2빙동.
남부 기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작업장은 빙하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단절된 곳이었다.
오늘 이곳으로 작업을 나온 이들은 봉신방의 예비 전투부대.
기존 작업 팀의 휴식을 위해 땜빵으로 편성된 팀이었다.
사냥 자체가 처음이니 당연히 성과가 좋게 나올 리 없었다.
“이런 썩을. 잡지도 못하고 열한 명이나 죽다니. 돌아가면 나만 더럽게 깨지겠군.”
이번 팀의 장을 맡은 서평의 신경질적인 말이었다.
요령을 듣고 간단한 연습까지 하고 온 그들이었지만, 실전과 연습은 천지 차이였다.
알려 준 대로 고기 방패를 밀어 넣고 탱커로 써 봤지만,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렇게 라인을 벗어난 몬스터는 사방팔방 날뛰며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부대원 열한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나마 잡기라도 했으면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볼 테지만, 도망을 간 놈은 두 번 다시 근처에 얼씬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될 것이 뻔한 일.
그러니 짜증이 치솟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다 저 병신들 때문이야.”
한참 씩씩대던 서평이 살아남은 고기 방패들을 바라봤다.
탱커 라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그의 입에서 욕이 한 바가지나 튀어나왔다.
“네놈들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줄 알아? 이 버러지보다 못한 새끼들. 왜 사냐? 자살이라도 해서 따라오질 말든가. 하필 이런 병신들이 걸려서…….”
서평의 악담에 누군가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너무한 거 아냐!? 우리는 삼십 명이나 죽었어! 무기라도 줬으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진 않았을 거라고!”
긴 금발의 여자였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울분을 토하는 그녀.
오늘 두 명을 포함해 친구 일곱을 모두 잃은 미국 국적의 헌터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간 서평이 발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야. 야. 벌레가 말하게 돼 있냐? 햐. 난 오늘 처음 알았네. 벌레도 입이 있다는 거. 야 이 x년아.”
그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악!”
“여기에 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인간인 척을 하고 있냐. 정신 못 차리지?”
“넌 악마보다 못… 아악!”
서평이 그녀의 배를 무릎으로 찍어 올렸다.
하지만 여자는 허리를 숙일 수도 없었다.
머리채가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녀.
보다 못한 사내 하나가 무리에서 튀어나왔다.
“그만두지 못해! 크아악!”
달려 나가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런 그의 앞에서 무심히 검을 갈무리하는 봉신방의 헌터.
그 광경에 사내의 뒤를 따르려던 몇몇 이들이 조심스레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들 역시 각자가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서평이 여자를 끌고 가 정면에 세웠다.
“네놈들이 지금 주제 파악이 덜된 모양인데. 내 오늘 봉신방에 개기면 어떻게 되는지, 이년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지.”
말을 끝으로 서평의 오른손에 곤봉 형태의 메이스가 쥐어졌다.
스킬로 인해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몽둥이.
그것을 본 여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제야 겁이 나는 모양이지? 하여간 이것들은 꼭 매를 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불에 달궈진 메이스가 여자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그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얼굴을 지지려던 서평의 몸이 수 미터를 날아 벽에 처박혔다.
쿨럭!
피를 토하며 꿈틀거리는 그의 신형.
바로 일어서려던 그의 몸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내 들지 못한 고개.
죽은 것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봉신방의 헌터들도, 끌려온 사람들도 모두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그들의 귓가에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여간 이것들은 매를 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어느새 서평이 있던 위치에 누군가가 자리해 있었다.
요상한 장비를 하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괴인.
그는 태정이었다.
“괜찮습니까. 구조대입니다.”
그의 입에서 적나라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여자와 태정이 동시에 당황했다.
여자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랬고, 태정은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하필 이런 고물을 가져와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여자를 보며 잠깐 생각을 하던 그가 결국 아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레스큐.”
“……?”
“911. 코리아. 헬퍼.”
“아!”
순간 여자의 얼굴에 환희가 일더니, 이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말뜻을 용케도 알아들은 것이었다.
그 말은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다국적 헌터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좌중이 술렁이려 하는 그때.
정신을 차린 봉신방 헌터들이 그를 둘러싸 포위했다.
“웬 놈이냐?”
“처리반.”
“……?”
“쓰레기 처리반.”
대답을 끝으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사방팔방에서 솟아난 검이 봉신방 헌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걸레가 되어 버린 수십 구의 시신.
태정은 그중 가장 멀쩡한 시체로 다가가 통역기를 회수했다.
그리곤 헌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구조대입니다. 여러분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파파팟!
새하얀 대지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묵색 갑옷에 삼각형의 표식을 달고 있는 이들.
태정에게 구조되어 남부 기지로 향하고 있는 다국적 연합의 헌터들이었다.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극점에서 출발해 전력을 다해 남하하고 있는 대니얼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몹시 궁금했다.
태정이 떠난 지 벌써 여덟 시간.
그의 속도라면 진즉에 도착해 일이 벌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과연 그는 사람들을 무사히 구해 냈을까.
솔직히 반반이었다.
그가 남부 기지의 정예인 추살대를 가지고 놀 정도로 강한 사내인 건 확실했다.
S급인 부대장마저 초살을 내 버렸으니, 무조건 같은 등급은 뛰어넘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의 병력은 무려 4천.
그것도 최소한의 추정치였다.
함께 간 리나는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확률이 컸다.
그녀가 아무리 700레벨대의 출중한 헌터라 해도, 이곳에서는 발에 채이고 널릴 정도로 있는 것이 A급 헌터.
S급을 상회하는 태정에겐 붙으나 마나 한 전력이었다.
즉. 혼자서 4천 이상의 병력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황당해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
해서 대니얼은 그에게 분명 묘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으니 그곳의 지리가 밝은 리나를 굳이 데려간 것이 아니었을까.
‘대체 어떤 방법일까. 4천의 병력을 상대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 * *
봉신방 남부 기지.
일단의 무리들이 해안가를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빙동으로 끌려갔던 사람들.
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주둔 병력이 선두에 있는 태정을 발견하곤 우르르 마중을 나왔다.
그렇게 합쳐진 두 세력.
“오오. 에이미, 살아 있었구나. 크흑.”
“브라더! 흐윽. 이런, 죽은 줄 알았어.”
“부, 분대장님! 거기 계셨습니까?”
그들은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서로를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생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들.
소수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역시 한마음 한뜻으로 그들의 해후를 축하했다.
그리고 그 즈음.
작전을 수행하러 갔던 나머지 네 곳에서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통신이 들어왔다.
-2팀 전원 구조 완료했습니다.
-4팀 구조에 성공…….
-1팀 사망자 없이…….
-3팀 이상 없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후우. 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태정의 눈에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다가왔다.
“리나 씨? 대니얼 님이 벌써 도착했습니까?”
“아뇨. 상황이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내려왔다가…….”
“아. 그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저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
“대체…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그게 무슨…….”
“같은 사람… 은 맞나요?”
나쁜 뜻이 아닌 좋은 뜻이었다.
그 증거로 태정을 보는 리나의 눈에는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5천에 가까운 병력을 단신으로 쓸어버렸는데.
그것은 아무리 화산에서 자고 나란 그녀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전 그럼 마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소 부담스러운 그녀를 뒤로한 태정은 배에 올라탔다.
이제는 정말 하나만 남은 상황.
따로 빼놓은 놈들을 심문해야 할 때였다.
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일까.
어떻게 생각을 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놈들이 갇혀 있는 배의 창고로 향한 태정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 헌터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줄줄이 묶여 있는 봉신방 간부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의자를 하나 놓은 태정이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 싸울 만큼 싸웠으니, 우리 이제 신사적으로 대화나 좀 나눠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