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쾅! 콰르르-! 콰쾅!
“악!”
해안가 언덕에서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나는 갑작스러운 굉음에 깜짝 놀라 몸을 숙여야 했다.
어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일까.
소리는 남부 라인 전체를 떨어 울리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녀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
굉음과 함께 기지 곳곳에서 거대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물감처럼 퍼져 순식간에 기지를 잠식했고, 이어 섬광이 터지며 그 세를 굉장한 속도로 불려 가기 시작했다.
그 규모가 어찌나 큰지,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설마 구조대가…….”
당장은 그렇게밖에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저 대규모의 폭발을 본다면 대충 잡아도 기가노톤급.
적어도 800 이상의 엘리트 마법 전단은 있어야 뽑아 낼 수 있는 무지막지한 화력이었다.
그것도 1개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외부 병력이 투입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 제라드 님이 들어간 지금에…….”
반가운 소식이긴 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저 정도 화력이면 그 역시 무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가만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만한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
엘리트 마법 전단 1개에 붙는 근접 부대는 예비까지 합쳐 칠백 명 이상.
규모로 볼 때 2개는 나와야 하니, 전단을 포함해 최소 2천 명 이상은 들어와 있어야 했다.
게다가 백업을 맡는 부대와 버프, 방어를 담당하는 실더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배로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대규모 병력이 기지를 타깃으로 숨어 있을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법이 어디서 날아가는 거지?”
미간을 좁힌 그녀가 기지를 기준으로 근방을 샅샅이 살펴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법으로 보이는 것은 날아들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 * *
뒤늦은 간부들의 지휘에 따라 대공 방어막을 형성한 헌터들은 필사적으로 입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의문의 기계도 사라진 상황.
프로핏의 보조를 받아 방어기를 두 겹 세 겹까지 두른 그들이 전력을 다해 기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생소한 차림의 헌터 하나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적이라 판단한 위자드 계열의 헌터들이 마법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빛이 허공에 맺히며 창, 칼, 화살 등이 되어 일제히 적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올라가지도 못한 채, 엄청난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킬을 쏜 이들 역시 그 폭발에서 살아남을 순 없었다.
그 모습을 뒤늦게 도착한 왕무영이 목도했다.
“이놈들 대기 중이구나.”
왕무영은 수많은 헌터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나가는 순간 온갖 스킬이 사방에서 쏟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렇다고 기지 내부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 정도 화력을 퍼부을 정도면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만큼 대규모 병력이 들이닥쳤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독 안에 든 쥐가 될 순 없는 일.
어떻게든 돌파를 해서 배를 타야 했다.
그때 비영대장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뚫겠습니다.”
“가능하겠나? 생각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일단 나가서 붙기만 하면 마법 부대는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아군을 공격할 순 없을 테니까요. 붙들고 늘어질 테니, 먼저 빠져나가십시오.”
“좋다. 너의 그 용기와 충정은 우리 봉신방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비영대는 들으라! 최후의 1인까지 남아 길을 뚫는다!”
“예! 대장님!”
비장한 표정으로 분진을 뚫고 나간 비영대장은 날아들 마법들을 예측하며 가장 가까운 놈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나와 보니, 주위는 텅 빈 눈밭이었다.
“뭐야 이게? 아무도 없…….”
말을 중얼거리던 그의 시야에 굉장한 속도로 날아들고 있는 한 인영이 포착됐다.
전방 사선 하늘에서 오러로 보이는 검을 들고 추락하듯 내려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갑옷.
목표는 바로 자신인 듯했다.
“웬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넌 타깃을 잘못 골랐다.”
비영대장의 검에서 이글거리는 홍염이 피어올랐다.
800레벨이 넘어야만 사용을 할 수 있는 상급의 오러.
오러 본연의 능력 외, 닿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S급 헌터들의 절기였다.
떨어져 내리는 자색의 검과 홍염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치이이-!
검과 검이 부딪히며 쇠 익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스윽!
“아?”
자색의 검이 홍염의 검을 반 치 이상 파고들었다.
동시에 비영대장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상급의 오러가 베이다니?
그의 상식으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당황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서걱-!
활활 타오르던 홍염이 꺼지며 비영대장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비영대가 그를 향해 벌 떼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상급의 오러도 버티지 못한 사내의 검을 그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토막이 나 여기저기로 널브러진 헌터들.
비장하게 나선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비참한 최후였다.
비영대장이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입구를 나선 왕무영은 이미 피떡이 돼 전멸을 맞이한 비영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적어도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어 줄 것이라 생각한 그였기에, 짜증이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갑옷을 입은 괴인.
피가 떡칠이 돼 있는 것을 보니, 흉수는 놈인 듯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괴인이 먼저 말을 내뱉었다.
“오른팔에 금빛 휘장. 네놈이 이곳의 대장인가 보군.”
“한국?”
대번에 알아들은 왕무영이 자신의 귀에 달린 통역기를 세팅했다.
그러자 갑옷 상단에 달린 작은 기기로부터 익숙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뭐냐.”
“나? 글쎄. 누굴까.”
“벌레들의 구조대인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벌레란 말을 아주 입에 달고 다니는군.”
사내의 말에 왕무영이 주위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얼마나 왔지?”
“혼자 왔다.”
“뭐? 혼자? 날 너무 물로 보는군. 어디에 숨었나.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지.”
“못 믿으면 할 수 없지.”
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자, 그가 다시 한번 주변을 훑으며 말을 물었다.
“정말… 네가 이 모든 걸 혼자 했단 말이냐?”
“아주 혼자는 아니고. 네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함께했다고 하지.”
“이것 참, 어이가 없군. 히든인가.”
“그게 중요한가?”
“처음 보는 갑옷에 꺼지지 않는 자색 오러라. 그런 것이 가능한 건 히든밖에 없지. 네 말대로 혼자 이 짓을 했다면 레벨도 상당히 높겠군. 한데, 왜 공격을 하지 않는 거지? 내게 할 말이 있나?”
“인간으로서 참회할 기회를 주겠다.”
“참회?”
“네 뒤에 병력들이 보이나?”
왕무영의 고개가 힐끗 돌아갔다.
그러자 입구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백여 명의 헌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정면을 응시한 그가 물었다.
“저게 뭐 어쨌다는 거지?”
“저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무기를 버리고 모두 투항하면 정식으로 송환해 재판을 받게 해 주겠다. 뭐 거기서도 살아남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무얼 잘못했는지 뉘우칠 기회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 물론, 네놈은 책임자로서 이 자리에서 책임을 져야겠지만.”
“하! 꼭 네놈이 뭐라도 된 듯이 말하는군. 좋다. 그에 대한 내 답을 알려 주지. 나의 대답은… 바로 이거다.”
사선으로 선 그의 검에 금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스파크가 튀며 오러 라이트닝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예상치 못한 사령관의 공격에 헌터들이 뒤늦게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뇌전은 그들을 사정권 안에 둔 이후였다.
파파팟! 파팟!
“으아악!”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휘말린 헌터들이 그 자리에서 사지가 터져 나가며 생을 마감했다.
그 모습에 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최악의 쓰레기군.”
“적 앞에서 겁을 먹는 놈들은 살 가치가 없는 놈들이지.”
“너 또한 마찬가지고.”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 괴인이 손에 든 검을 고쳐 잡았다.
그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왕무영이 그에게 충고했다.
“이봐, 영웅 행세 하는 히든 양반. 넌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죽어서도 쓰지 말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지만, 그럴 바엔 쓰고 죽는 게 낫겠지. 이 몸과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애송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던 사내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살과 털이 시뻘겋게 물들며 사지의 힘줄이 울긋불긋 튀어나왔다.
이어 홍안까지 개안한 왕무영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닮은 듯 닮지 않은 요괴의 모습.
도깨비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흐흐흐. 자, 그럼 어디 히든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실력 좀 볼까.”
* * *
-저건.
[음.]
[이 시점에?]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음성에 태정이 정면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아무것도 아냐. 근데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조심…….”
그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엄청난 스피드로 쏘아지는 왕무영의 신형을 본 것이다.
까앙-!
플라즈마와 오러가 부딪히며 마치 쇠가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막이 쨍할 정도의 울림.
충격도 상당해 블라스터를 운용하고 있음에도 신형이 하염없이 뒤로 밀려났다.
느껴 보지 못한 굉장한 파워.
지금까지의 전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놈이 공격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까앙-! 깡!
팟! 파팟!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로 빛이 튀며, 서로의 검이 수십 차례 부딪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서로 합을 맞춰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눈이 어지러워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공방.
실로 대단한 실력들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놈의 힘이…….’
스피드나 움직임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문제는 힘.
태극 1호라는 엄청난 장비를 차고서도 힘에서만큼은 태정보다 왕무영이 한 수 위였다.
그나마 블라스터와 워커팩이 있어 유지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나자빠져도 몇 번을 자빠졌을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얼굴을 한 왕무영이 낄낄대며 입을 열었다.
“클클클. 왜 그러나? 히든. 겨우 이거에 고전을 하다니, 영 실망인데?”
“그건 무슨 기술이지?”
“글쎄. 금단의 기술이라고나 할까. 네놈은 설명해 줘도 모른다.”
“비밀이란 말이군.”
“곧 죽을 놈이 알 필욘 없지.”
대치 상황에 있던 그들이 다시 공방을 이어 나갔다.
왕무영은 시종일관 태정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단 한 번의 밀림 없이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는 상황.
반면 태정은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하고 겨우 수비만 하고 있는 형세.
그 모습이 굉장히 위태로워 곧 결판이 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뭐 해? 안 끝내고?]
“뭐 더 없나 해서.”
[이 상황에 여유까지?]
“이 정도 상대는 처음이니까. 그리고 왠지 모르겠는데…….”
[……?]
“재밌어, 싸우는 게.”
사실 태정은 생각보다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힘에서만 조금 밀릴 뿐.
그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패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놈을 한계까지 뽑아 자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레벨 측정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실전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어, 그에게는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매우 진귀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이 쌓여 위급 상황일 때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걸 알고 있는 그였기에 쉽게 끝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신기하게도 전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몬스터를 사냥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뭔가 자신이 많은 것을 하고 있단 기분이랄까.
미사일을 쏘고 총을 난사해 쓸어버리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끝을 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놈에게서 이 이상의 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수비도 힘들어 보이는군. 이대로 토막을 쳐 그 골통을 날려 주지.”
왕무영의 검에서 돌연 금빛 광채가 일어났다.
동시에 검 주위로 번쩍이는 뇌전이 들이쳤다.
조금 전 자신의 수하들을 날려 버릴 때 사용했던 기술.
하지만 이번엔 그 뇌전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때맞춰 밀리던 태정의 신형이 휘청이며 좌로 기울었다.
입가에 걸리는 회심의 미소.
“역시, 벌레는 벌레군.”
왕무영의 오러가 무방비 상태로 열린 태정의 옆구리를 양단해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그대로 휘말릴 것 같던 태정의 신형이 그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뭣?”
눈을 껌뻑이며 두리번거리기도 잠시.
허공으로부터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벌레는 벌레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자색 검이 불쑥 튀어나와 왕무영의 신형을 갈랐다.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물린 그였지만, 튀어나온 검의 길이가 이전과 다르게 상당히 길었다.
서걱-!
자색의 검이 그의 몸통을 훑고 지나갔다.
완벽히 피했다 생각한 왕무영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태정의 검을 바라봤다.
확실히 좀 전과 다르게 그 길이가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검이… 이… 이런 비… 겁한 새…….”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의 신형이 볼품없이 나동그라졌다.
그런 그를 무심히 바라보던 태정이 검을 갈무리하며 코웃음 쳤다.
“비겁? 애초에 봐준 거야,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