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제, 제라드 님, 어떻게…….”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것은 대니얼을 포함한 다국적 연합의 10인이었다.
진즉에 떠났을 거라 생각한 그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그런 그들을 힐끗 돌아본 태정이 대답했다.
“얘기나 한번 들어 볼까 했는데, 들어 보니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겠더군요.”
“하지만 이건… 상대는 백 명도 넘는 봉신방의 정예입니다.”
“일단 급한 불이 우선이니, 저희 얘기는 조금 이따가 나누도록 하죠.”
태정이 다시 시선을 전방에 두자, 웃음기가 사라진 갈색 머리가 물었다.
“넌 뭐지? 이곳에 아직도 붙잡혀 가지 않은 헌터가 있었나. 어디서 온 웬 놈이냐.”
사내의 물음에 태정이 제라드의 도움을 얻어 대답했다.
“굳이 알 필요 있을까?”
“한국인이군. 어이, 거기 아무나 통역기 줘 봐.”
태정의 말을 유심히 듣던 갈색 머리가 도열해 있는 헌터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로 세팅합니까.”
“대한민국.”
“여기 있습니다.”
통역기를 찬 갈색 머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통역기를 타고 익숙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네놈 한국인인가.”
“그런데.”
“어디서 온 누구냐.”
“그게 중요한가.”
“그럼 뭐가 중요하지?”
“내가 네놈들이 하고 있는 짓을 알아 버렸다는 게 중요하지.”
“알면 뭐가 달라지나? 어차피 네놈은 엑스트라야.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마리 벌레에 불과하지.”
“아까부터 듣자하니 벌레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군. 근데 이거 어쩌나. 내 눈엔 네놈들이 벌레로 보이는데.”
“후후. 재밌군. 방심한 추살대원 하나 죽였다고 기고만장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너 같은 한국 놈들이 있었지.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나서다 결국은 살려 달라 울고불고 애원을 하더군.”
“그래서?”
“불에 태워 죽였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살려 달라는 말이 나중엔 죽여 달라는 소리로 바뀌더군. 더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려 줄까?”
“…….”
“화형식이 있기 전 네 뒤에 있는 놈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제안을 했었다. 당연히 모두가 거절을 했고. 그런데 자기 몸에 불이 붙고 살이 타들어 가자 정말 순식간에 돌변을 해 버리더군. 너도 나도 하겠다며 울부짖는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너도 그걸 봤어야 하는 건데. 벌레처럼 꿈틀대며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그 모습을 말이야.”
웃음기 가득한 그의 말에 태정이 따분하다는 듯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다 털었냐.”
“뭐?”
“그럼 이제 내 차례군. 잘 들어라. 여기 있는 네놈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도망을 가도 죽는다. 투항을 해도 죽는다. 빌어도 죽는다. 무슨 짓을 해도 죽는다.”
“하. 이 새끼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감히 누구 앞에서…….”
“좋은 꿈이지.”
말을 끝으로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도 추살대의 헌터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처음 그가 나타났을 때부터, 일루전 디버프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루전 디버프로 인해 투명화된 태정의 실루엣이 그들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잡혔다.
이어 갈색 머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죽여라!”
그의 말에 전원이 무기를 뽑아 들며 태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인원이 정확히 그를 노리고 들어가자, 대니얼 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큰일이야. 위치가 발각됐어.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야. 미리부터 일루전 디버프라니.”
“우리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다들 빨리 주워요!”
태정이 내려놓고 간 포션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포션을 주웠을 때, 이미 추살대는 태정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형형색색의 무시무시한 빛이 허공을 베어 갈랐다.
하지만.
“뭐야!?”
“어디로 간 거야?”
“저, 저기!”
두리번거리던 헌터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들의 상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이, 이게…….”
갈색 머리는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쯤 몸이 수십 조각으로 분리돼, 걸레가 되었을 놈이 어떻게 이곳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분명, 수하들의 검이 실루엣을 베고 있었다.
‘한 놈이 아니었나?’
싶기도 잠시.
그가 스킬을 전개하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 손은 태정의 손에 의해 저지됐고, 멱을 잡힌 그의 신형이 종이 인형처럼 쉽게 딸려 들어갔다.
“무슨 놈의 힘이…….”
“발악하지 마. 고작 S급 따위의 근력으로 풀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
“뭐 하냐! 이 새끼야! 두고만 볼 거냐!”
도저히 힘으로 풀 수가 없자, 그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고 있던 흑색 갑옷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추하군. 추살대의 부대장이란 놈이… 엇!?”
느긋하게 검을 부여잡던 사내가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강풍이 한번 일자, 멱이 잡힌 갈색 머리와 한국인이 바로 코앞까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흑색 갑옷은 자신의 복부에 들어와 있는 정체불명의 은색 막대기를 바라봤다.
“이, 이 자식, 제법 재밌게 노는군.”
순간 공격을 당했나 싶어 식은땀이 흐르고 있던 찰나였다.
한데, 막대기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즈왕-!
푸슉!
자색의 거대한 빛이 그의 등을 뚫고 하늘을 바라봤다.
쿨럭!
피를 토하며 몸을 달달 떨고 있는 흑색 갑옷의 사내.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태정이 입을 열며 중얼거렸다.
“네눈엔 이게 노는 거로 보이냐?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이야, 네놈이 안도해 하는 모습을.”
“커, 커허…….”
촤악-!
검이 직선으로 올라가며 상반신이 두 쪽으로 쪼개졌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
그걸 멱이 잡힌 채로 보고 있던 갈색 머리가 어떻게든 검을 잡아 보려 애썼다.
“전형적인 나이트 계열의 검사군, 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턱.
중얼거리던 태정이 잡았던 멱을 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검을 뽑아 든 갈색 머리.
그런 그를 향해 태정이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여기서 똑똑히 지켜보고 절망해라. 네놈의 끝도 저들과 다르지 않을 테니. 뭐 능력이 된다면 도망을 가도 좋아. 네가 시속 400km/h의 스피드를 따돌릴 수 있다면 말이야.”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풍을…….”
허세라고 치부하려던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수하들을 향해 쏘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눈을 뜨고는 보기 힘든 대학살극이 이어졌다.
스피어 블레이드를 들고, 오는 놈 가는 놈 할 것 없이 토막을 치고 있는 태정의 모습은 가히 악귀의 모습에 가까웠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가리, 몸통 할 것 없이 슥슥 베어 넘겨 버리는데, 그것만 보면 감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인 것처럼 보였다.
무기를 버려도, 만세를 외치며 투항을 해도, 살려 달라 빌어도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잔인한지, 지켜보고 있는 대니얼 일행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당사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제발, 용서를…….”
“너희도 그 제발과 용서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겠지.”
슈악!
털썩.
조금 전까지 붙어 있던 사내의 머리통이 떨어지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몇몇 이들이 사방으로 퍼져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들은 태정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 으아악!”
태정은 정말로 이곳에 있는 이들을 한 놈도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이 한 짓에 대해 낄낄대고 신을 내던 놈들의 모습.
조롱과 비웃음은 덤이었다.
그것은 그가 아는 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괴물. 놈들은 그저 괴물이었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태정은 지금 괴물을 베고 있는 것이었다.
추살대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초살 나 버리자,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갈색 머리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저 멍청한 놈들. 저거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서… 추살대의 명예에 똥칠을 하고 앉았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조금씩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대충 봐선 움직이고 있단 것조차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정거리 밖으로 벗어난 갈색 머리가 어느 순간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평소 쓰지 않는 고가의 이속 스크롤까지 사용한 그는 달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전장과 작아지는 사람들.
어느새 지대가 낮아지며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됐어. 이대로 두 시간만 더 내려가면 송신 거리가 나온다. 기지에 알리기만 하면 너 같은 놈은 바로…….’
“허억!”
어떻게 하면 놈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까 고민을 하던 갈색 머리는 다시 앞을 돌아보다 기겁을 하며 나자빠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장을 누비고 있던 태정이 팔짱을 낀 채 하늘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내려선 태정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쥐새끼처럼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 거지?”
“어, 어떻게… 여길.”
“말했을 텐데.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고.”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 거냐.”
“…….”
“혀, 협상을 하지. 날 이대로 보내 준다면 잡혀 있는 한국인들은 내 명예를 걸고 모두 풀어 주겠다. 아직도 기지엔 수십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있다. 날 죽여 버린다면 그들을 영원히 구하지 못해.”
“살고 싶나.”
“협상이다.”
꼴에 체면은 잃지 않겠다는 듯 협상을 들먹이는 사내.
그런 그를 향해 태정이 광선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갈색 머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자, 잠깐. 네 잘못된 선택으로 살 수도 있는 한국인들이 죽을 수도 있다. 남은 유가족들이 안고 가야 할 슬픔을 생각해 봤나? 그 죄책감을 어떻게 다 감당할 생각이지? 네놈이 죽인 거다, 네놈이.”
갈색 머리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겠단 생각뿐.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태정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넌 정말이지… 내가 듣고 보고 겪은 놈 중 최악의 쓰레기다. 너 같은 놈이 같은 인간이라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군.”
“그러는 너는 뭐가 다르지? 너도 내 병력을 몰살시키지 않았나. 네놈이 뭔데 다른 이의 목숨을 가지고 심판하는 거지? 그 권리는 누가 줬지? 네놈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나?”
“없지. 내겐 그런 자격도, 권리도 없다.”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이 짓을 그만…….”
“그런데.”
“……?”
슈아악!
일진광풍이 일며 태정의 신형이 믿을 수 없는 스피드로 쏘아졌다.
찰나의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보며 갈색 머리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명령을 받은 다리는 그의 의지를 따르지 못했다.
이미 태정의 검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간 뒤였기 때문이다.
“이… 내, 내가……?”
희미해져 가는 시야가 땅을 바라보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몸이 넷으로 분리돼, 널브러진 사내.
그런 그의 귓가로 한 줄기 음성이 스며들었다.
“너흰 벌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