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천신병을 말하는 것이었다.
놈의 말대로 기지를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이제는 얘기를 들어 봐야 할 때.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태정이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이, 천신병. 말 좀 해 봐라.”
[왜 그러지?]
“왜 그러긴. 네가 탈출하면 말을 잘 따를 거라지 않았나?”
태정의 말에,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기억력이 형편없군. 생각을 해 본다 했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럼, 앞으로도 쭉 기어 나올 생각이 없단 건가.”
[네가 하는 것에 따라 다르지. 넌 아직 나를 불러낼 실력이 안 돼. 지금 이 대화도 내가 네 내면에서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네가 내게 동화해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넌 아직 숙련도가 부족해.]
“거, 한번 사용하기 더럽게 복잡하군.”
불평과 함께 어떻게 하면 놈을 구워삶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간 조용했던 프리지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꼬마. 이 덩치 큰 고철은 또 뭐지?]
“이제 일어났냐? 필요할 땐 보이지도 않더니. 알면서 뭘 물어. 그놈이지.”
[그러니까. 그놈이 왜 여기 들어와 있냔 말이야.]
“그걸 내가 아냐? 너나 제라드 같은 놈이니까 거기 들어가 있겠지.”
[아니, 이놈은 우리와 달라. 이곳에 있을 놈이 아니라고.]
“어차피 나한텐 너희 셋 다 똑같은 놈들이야. 잔말 말고 그냥 써. 누가 보면 자기가 주인인 줄 알겠네.”
[그렇지 않아도 비좁아 터진 곳을 이런 덜떨어진 고철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하다니.]
프리지아의 비하에 천신병이 반응했다.
[거, 듣자 하니 거슬리는군. 차원의 망령 주제에 감히 누구더러 고철이라 하는 것이냐.]
[오호, 그렇게 까부는 걸 보니 리셋 되고 싶은 모양이지?]
[멍청한 년이 생긴 대로 노는군. 이곳에서 네년한테 그런 권한은 없다.]
[뭐야!? 진짜 해볼 테냐?]
[얼마든지. 그전에 그 더러운 엉덩이나 좀 치우시지.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냐?]
[굴러 들어온 돌이면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
[굴러 들어온 돌? 정말 웃기는 년이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야 귀속된 몸이니 이곳에 있는 게 당연하지만, 넌 완전한 불청객이 아닌가. 네가 이 인간에게 뭘 해 줄 수 있지? 넌 그냥 어디에도 존재해서는 안 될 망령일 뿐이야.]
[아, 그래? 네가 뒤늦게 와서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난 네놈들이 해 준 것 이상으로 이 꼬마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놈은 지금도 4차원과 3차원 사이의 경계에서 떠돌아다니며 길을 헤매고 있겠지. 그럼 네놈은 애초에 지금 깨어날 수도 없는 몸이야.]
[그랬다면 망령. 너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겠지. 어줍잖은 말로 날 이겨 먹을 생각하지 마라. 네년의 머릿속은 이미 다 꿰뚫고 있으니까. 저리 비켜.]
[어어? 경고한다. 거기서 조금만 더 넘어오면 죽는다.]
[넘었는데 이제 어쩔 테냐.]
“지랄들을 해라, 아주.”
듣자하니 어이가 없는 태정이었다.
자신의 몸을 나눠 쓰는 주제에 영역 다툼이라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이놈도 프리지아 과인 거 같은데. 길들이려면 골치 꽤나 아프겠군.’
제라드가 꼼짝도 못 하는 것과 달리 놈은 쫄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말을 더럽게 듣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묵묵히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수행한 제라드가 천사처럼 보였다.
“제라드.”
-예, 주인님.
“너한테 진짜 고맙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다. 앞으론 잘해 줄게.”
-전 주인님께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시 변함이 없는 녀석이었다.
태정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하면 천신병을 굴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식사를 마친 대니얼이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다가왔다.
“구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음식까지… 사람들을 대신해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뭐. 입에는 맞으셨나 모르겠습니다.”
“그럼요. 살면서 먹어 본 음식 중 최고였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꽤 오래 있어서 한식을 많이 접했는데, 이건 정말 역대급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맛이 나는지. 전문 셰프의 요리겠죠?”
“아. 그렇죠. 아마 한국에서 이 사람보다 요리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역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참, 여기 이분은 화산 장벽거의 외손녀가 되는 리나라고 합니다.”
대니얼의 소개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리나예요.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 보이기에. 그런데 리나 님도 한국말을 하실 줄 아시네요.”
“예전에 배웠어요. 대니얼보단 많이 부족하지만요.”
“유창하신데요. 화산이면 중국의 화산을 말하는 거겠죠? 아무래도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아. 네.”
“어쩐지, 중국인가 일본인가 긴가민가했었는데. 반갑습니다. 또 바로 이웃나라 아닙니까. 하하.”
태정의 말에 대니얼과 리나는 순간 이게 뭔가 싶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반응이 너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화산, 그것도 장벽거라고 하면 하이 클래스 헌터 중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무력으로만 따져도 세계 수위를 오가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이란 나라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거물 중의 거물.
그런 그의 외손녀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반응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장벽거는 고사하고 화산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다.
그와 같은 초특급 헌터가 한 나라의 정상을 모르다니.
그것은 반대로 말해 그녀가 바로 옆 나라 한국의 1인자를 모르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음. 이름은 좀 곤란해서 그냥… 제라드라고 부르십시오.”
“제라드? 그게 가명인가 보군요. 알겠습니다, 제라드 님.”
“네.”
“혹시 장벽거를 모르십니까.”
“방금 외손녀라고 하셨으니까. 이분의 외할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화산은 아십니까.”
“당연히 들어 봤습니다. 중국에서…….”
말을 중얼거리던 태정은 순간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간부를 만나고 다니면서도 중국에 대해선 들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못 넘어가는 거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선 완전히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화산이 중국의 길드라는 것도 스쳐 지나가면서 들은 기억이 있을 뿐.
사실 그때 들은 것이 맞는지조차도 희미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실 다른 나라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서. 중국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이나 뭐 다른 곳도 아는 게 없네요. 제 볼일 보기도 바빠서. 사실 한국에 있는 길드도 잘 모릅니다.”
“아, 그러셨군요. 알아봐 달라고 언급을 한 건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그 2가지를 알고 계셔야 이해를 하기가 편하실 것 같아서…….”
“지금부터 알아 가면 되죠.”
“음. 화산은 한국으로 치면 한산도와 같은 곳입니다. 정부 같은 개념이죠. 사실, 관심이 없으면 모르실 수도 있는 게 화산이란 명칭을 쓴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엔 연합체라는 말을 썼었죠. 이곳의 수장이 바로 장벽거란 인물입니다.”
대니얼의 말에 태정이 그제야 의외라는 표정으로 리나를 바라봤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하면 눈앞의 이 여자가 중국을 호령하는 1인자의 외손녀라는 말이었다.
즉 엄청난 신분을 가진 인물이라는 뜻.
“이거 제가, 유명한 분을 몰라뵀네요.”
태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리나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도리어 당황스럽다는 듯 대니얼을 바라보는 그녀.
다시 대니얼이 입을 열었다.
“그 장벽거란 인물이 죽었습니다.”
“아…….”
태정이 반사적으로 리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대니얼이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장벽거란 인물은 레벨등급 SS+에 속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의 헌터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죽이고 화산을 통째로 집어삼킨 이들이 있습니다.”
“잠깐만요. 병이 아니라 살해를 당했단 말씀입니까.”
“네. 저도 믿기 힘들었지만, 직접 그 자리에 계셨던 리나 님께서… 일 검에 당했다고 하더군요.”
“일 검이요? SS+가 일 검에?”
다른 곳으론 문외한인 그였지만, 헌터들의 등급 레벨은 알고 있는 태정이었다.
순수 레벨만으로 SS+에 이른 헌터는 한국에서도 고작해야 다섯.
한산도가 둘. 그리고 나머지 십 대 길드 중 상위 3개 길드가 한 명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같은 SS+라도 히든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등급을 초월하는 클래스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SS+는 한 국가에 몇 없는 최상위권의 레벨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태정은 그가 히든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유족이 옆에 있어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너무 경솔한 발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화제를 전환해 질문했다.
“그 일당들이 누구입니까.”
“봉신방이라는 변방의 작은 단체입니다.”
“변방의 작은 단체가 국가 단위의 길드를 전복시켰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저도 믿기지 않지만 파악하기론 그런 것 같습니다.”
“많이 이상하긴 하네요. 한국으로 치면 한산도가 지방의 작은 길드에 무너졌다는 건데. 한데, 여러분들하고 그게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태정은 그 사건과 이 사건에 무슨 접점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나야 적의 가족이라 치면 그나마 접점이 있지만, 다른 나라의 헌터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희도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최근까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평화 협정 구역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일까. 그것도 불특정 다수의 나라를 상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더군요.”
“어떤……?”
“전쟁입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은 전쟁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랑… 세계와 말입니까?”
태정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을 가둬 둔다 해도 결국은 알려지게 될 일인데, 이걸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을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시대에 국가 간 전쟁이라니. 그것도 전 세계와? 음.”
태정은 대니얼의 말이 현실성이 떨어진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있는 기지가 다 털렸다면 최소 유럽은 전부 적으로 돌려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명분도 없어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지탄을 받을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양자 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을 도와줄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백전백패.
말 그대로 승산이 1도 없는 싸움이었다.
“망할 것이 뻔한데.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뭔가 협상이나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선 하루에 수십 명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것만 수백 명입니다.”
“일단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외부에 알리는 것이 급…….”
-주인님.
“뭐야 갑자기?”
-남쪽 3km 부근에서 무장을 한 인간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