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로봇들을 베어 넘기며 끝도 없는 천장을 향해 올라가던 태정은 어느덧 중층부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로봇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어, 더는 발판으로 삼을 수가 없는 상태.
다시 엘리베이터 외벽에 붙은 그가 주변을 훑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겠네. 와… 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
죽을 고비를 수십 번이나 넘기며 이곳까지 올라온 태정은 아직도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블라스터가 멀쩡해도 하기 힘든 공중전을 오직 몸놀림 하나에 의지해 싸웠으니, 그리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절반 좀 넘게 온 건가.”
다리 너머 번호를 확인하던 태정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제라드의 경고가 들려왔다.
-또 옵니다.
“어. 계속 가 보자.”
엘리베이터의 외벽을 오르며 태정은 드문드문 오는 놈들을 차근차근 잡아 냈다.
그렇게 조금 더 올라가자, 좌측 다리에서 익숙한 형태의 로봇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든?”
로봇의 정체는 간부들의 라운지에서 본 에이든이었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힌트를 줬던.
그리고 보이는 여러 명의 여자들.
그중 한 명은 그도 아는 얼굴이었다.
“엠마?”
그들은 태정이 가는 것을 배웅이라도 하듯 양손을 격하게 흔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 그가 마지못해 화답했다.
“잘 있어라! 네 덕에 일찍 간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태정이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외벽을 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손을 흔들던 에이든의 팔에서 작은 총구 하나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불꽃이 튀며 탄이 쏘아졌다.
탕! 타탕!
쏘아진 탄은 태정이 오르고 있는 외벽을 강타했다.
“뭐야, 이건?”
난데없이 들린 총성에 전진을 멈춘 그의 고개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래 어디에서도 로봇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는 에이든과 그 이하 종업원들.
다시 고개를 돌리며 벽을 오르려는데, 두 발의 총성이 더 이어졌다.
탕! 탕!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이번엔 그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자 에이든의 팔에서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튀어나왔다가 도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누가 봐도 무기였다.
“저 새끼가.”
상황을 파악한 태정이 에이든을 향해 이레이저 건을 조준했다.
핑-!
날아간 레이저가 정확하게 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태정은 옆에 있는 여자들의 머리통을 차례대로 날려 버렸다.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이 왜 기어 나와? 총도 완전 구닥다리인 것 같은데.”
그렇게 다시 전진하기도 얼마간.
드디어 천장에서 작은 빛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는 게이트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아끼고 있던 블라스터를 소환한 태정은 곧장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관문인지 사방의 굴에서 로봇들이 벌 떼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양손에 스피어 블레이드를 소환한 태정이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추력을 조절해서 몸에 회전을 좀 줄 수 있겠냐?”
-얼마나 말입니까.
“최대한.”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상승 속도가 줄어들 겁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못 뚫으면 또 기어 올라가야 하니까.”
-시작하겠습니다.
“오케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몸이 제자리에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신형에 플라즈마로 만들어진 자색 회오리가 형성됐다.
그 상태로 쭉 솟구치자 사방에서 사격이 시작됐고, 그 절반은 게이트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치며 단단히 앞을 막아섰다.
막으려는 자와 뚫으려는 자.
결과는 싱겁게도 태정의 압승이었다.
회전력이 가미된 플라즈마는 견고하게 벽을 치고 서 있던 로봇들을 순식간에 궤멸시키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대로 솟구쳐 게이트에 안착한 그의 신형.
순간, 엄청난 빛이 폭사하며 반가운 알림음들이 들려왔다.
[전투 준비 태세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기지 탈출에 성공하셨습니다.]
[로봇 연합 기지가 데이터에서 삭제됩니다.]
“후우. 드디어 나왔네.”
태정은 좌우로 보이는 익숙한 빙벽에 밖으로 나온 것을 실감했다.
기지로 들어서기 전, 그가 만들어 냈던 크레바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그는 구멍을 빠져나와 남극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얼마나 걸린 거냐, 이거. 하루는 넘게 걸린 것… 응? 저게 뭐지?”
중얼거리던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됐다.
* * *
“하아. 하아.”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직 살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뒤엔 거대한 아이스 레귤러 무리가 맹렬한 속도로 추격을 하고 있었다.
대니얼의 예상대로 놈들은 헌터들을 완전히 인식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따돌려 보려고 했지만 하필 이곳은 극점 일대였고, 사방에 엄폐물 하나 없는 광활한 평지였다.
그들이 가려 했던 첫 번째 목적지까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속도라면 그 전에 잡힐 것이 분명했다.
결국 대니얼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흩어져요!”
“흩어지다뇨!?”
“어디로 말입니까.”
“하아. 하아. 뭐라고요?”
다가와서 묻는 헌터들을 향해 그가 시간이 없다는 듯 짧게 설명했다.
“뭉쳐 있으면 안 됩니다. 다들 각자도생하세요. 그게 한 명이라도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흩어져요! 빨리!”
그의 명령에 헌터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나마 함께 있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인데, 찢어지자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재수가 없을 경우, 혼자 어그로가 끌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이곳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랬다면 이미 누군가 희생을 해 모두를 살렸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계속 뭉쳐 있자, 결국 대니얼이 먼저 무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갈등하고 있던 리나가 반대편으로 뛰었고, 몇몇 사람 역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살길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좌‧우측을 기준으로 무섭게 앞을 질러 가는 아이스 레귤러들.
사방으로 뛰어나간 사람들이 도로 한데 모여 완전히 포위됐다.
“크, 큰일이야.”
“아아.”
“어떻게 탈출했는데…….”
“제에기랄!”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며 좁혀 오고 있는 아이스 레귤러들.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급에 준하는 놈들이라 감히 뭘 어떻게 해볼 방도도 없었다.
모두가 절망밖에 남지 않은 그때.
쿵!
무언가가 묵직한 것이 그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
“운석?”
“사람?”
“괴물……?”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일어서자 생각은 한 가지로 통일됐다.
“사람이야?”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가 조금 특이할 뿐, 두 다리와 두 팔, 머리의 비율이 매우 좋은 인간이었다.
“저게 무슨 장비죠?”
“글쎄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그들이 직업을 추정하고 있는데, 돌연 사내의 양손에서 막대기가 생겨나더니 이내 진동음과 함께 빛이 솟아났다.
“오러?”
“아니, 저렇게 넓은 건 처음 봐요.”
“게다가 두 개라니…….”
모두가 어느 정도 레벨이 있기 때문에 숱한 기술들을 봐 온 헌터들이었다.
하지만 저런 너비와 저런 색의 오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쌍검이라니?
그들의 상식으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점점 더 의문에 빠져드는 가운데, 갑자기 사내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동시에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레귤러들이 우르르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런 무모한! 혹시 보조기 남은 사람 없어요?”
대니얼의 외침이었다.
사내의 행동은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무모했다.
오러가 스페셜 무브에 속하는 강력한 기술이라고는 하나, 상대는 레드존의 S급 몬스터였다.
체고만 5미터에 달하는 대형종.
여러 기술의 연계가 없으면 제아무리 오러라 해도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해서 작게나마 도우려는 것이 그의 생각.
하지만 그런 대니얼의 생각은 1초 만에 사라져야 했다.
서걱-!
촤라라락!
푸슉!
쿵!
코끼리보다 거대한 레귤러 한 마리가 걸레가 된 채 널브러졌다.
여기저기 수십 조각으로 절단 나 흩어진 처참한 육신.
사내의 오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한 마리를 처리한 사내가 두 개의 검을 하나로 이어 붙이더니, 그 길이를 수 미터까지 늘려 버린 것이다.
동시에 그의 몸이 허공에 떠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죠? 저것도 스킬인가요?”
“글쎄요.”
엄청난 속도로 턴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레귤러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솨샤샤샤샤-!
촤아아-!
푸다다닥!
실로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닿는 족족 모든 것을 갈아 버리는 빛의 회오리.
강철보다 단단한 레귤러들의 육신이 순식간에 해체돼 고깃덩이로 전락했다.
가히 인간 믹서기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렇게 1분도 되지 않아 일대에 있던 레귤러들이 모두 전멸을 맞이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밭을 새빨갛게 물들인 흥건한 피와 완전히 갈려 누구의 것이라 판별도 할 수 없는 육편의 잔해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헌터들은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레귤러 삼십 마리를 혼자서…….”
“저건 S급 헌터들도 불가능한 일이야.”
위기를 벗어난 그들이었지만, 또 다른 두려움이 가슴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 넓은 대륙에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헌터.
위험 등급 S에 속하는 레귤러 무리를 단신으로 처리했다.
이 말은 곧 이미 이곳에 있는 사람일 확률이 크다는 뜻이었다.
“우리를 잡으러 온 걸까요?”
“그런 것 같기도…….”
“지독한 놈들. 그냥 놔둬도 살까 말까 한데.”
그들이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는데,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움찔거리며 물러나는 헌터들.
그중 하나가 뒤를 돌아보다 깜짝 놀라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밀지 마요! 여기 못 가요!”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하나둘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언제 만들어졌는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크레바스가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쪽의 지대가 더 높아 이제야 이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언제 이런 게…….”
뒤는 천 길 낭떠러지.
앞은 추격자로 추정되는 사내.
아까 도망을 가지 못한 것이 뒤늦게 후회됐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그렇게 점점 좁혀 오는 사내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대니얼이 눈을 질끈 감으며 전면에 나섰다.
“제가 한번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무기도 없는데 어떻게요? 아까 못 봤습니까? 레귤러 수십 마리를 떡으로 만들어 버렸다고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제가 신호 주면 바로 산개해서 뛰세요. 혹시 만약에, 만약에 살아남게 되면 우리나라에…….”
그들이 성공 확률 1%에 도박을 걸려는데, 다가오던 사내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멈춰 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하, 한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