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쉬이이-!
서걱-! 서걱!
쿵! 철그렁!
타타타탕! 타탕! 타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로봇들이 떼로 나자빠지고 있었다.
[마르시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430만을 획득합니다.]
[테라v2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580만을 획득합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스피어 블레이드를 교차시켜 부스터를 발동시킨 건 신의 한 수였다.
좁은 공간에서의 밀집된 병력들.
그 대부분이 총을 들고 있는 것 또한 태정에겐 운으로 작용했다.
그가 교차시킨 2개의 검은 놈들의 공격을 상쇄시키며, 자연스레 몸통을 갈랐다.
따로 휘두르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로봇들.
벌써 레벨 업을 네 번이나 한 그였다.
“이 검은 진짜 만든 사람이 존경스럽네.”
플라즈마의 위력은 정말이지 쓰면 쓸수록 놀라웠다.
휘두르지 않고도 이렇게 개 박살을 낼 수 있는 무기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함께 사용하고 있는 부스터도 아주 찰떡이었다.
“보인다.”
끝이 없어 보이던 통로 너머로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곳만 벗어나면 블라스터를 이용해 날아오르기만 하면 되는 일.
마지막까지 앞을 막아서던 중형 로봇 2기를 해치운 그가 막 입구를 나섰다.
하지만 그는 바로 블라스터를 사용할 수 없었다.
허공에 떠서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조준하고 있는 수많은 로봇.
인지를 함과 동시에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타타타탕! 타타탕!
무시무시한 화력이 지상을 뒤덮었다.
그중엔 로켓 따위를 쏘는 놈들도 있었다.
휘이이-!
쾅!
다리가 들썩일 정도의 굉장한 파괴력이었다.
플라즈마로 로켓까진 막을 수가 없었기에, 태정은 도로 들어가 통로에서 기체를 소환했다.
동시에 슈퍼 발칸포와 아이언 스피어를 소환한 그가 제라드를 향해 명령했다.
“아까 로켓 쏘던 놈들 있지? 중형기들. 타깃은 놈들이다.”
-설정 완료했습니다.
“쏴.”
그의 명령과 함께 미사일이 통로를 지나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로 날아가 정확히 놈들을 격추시켰고, 우수수 떨어져 내리던 잔해를 보고 있던 태정이 겨우 시야만 확보한 채, 슈퍼 발칸포를 난사했다.
타타타타탕! 타타탕!
빛의 에너지 탄이 문을 엄폐로 쏘아지자, 로봇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려와 공격을 해 보지만, 이미 선점한 자리에서의 전투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그렇게 수없이 탄을 난사하기도 잠시.
내려오는 로봇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자, 그가 다시 문을 나섰다.
여전히 많은 로봇이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널널해진 상태였다.
“저 위까지는 사거리가 안 닿아. 올라가서 정리해야겠어.”
기체를 버리고 다시 슈트로 갈아탄 태정은 곧장 블라스터를 전개해 하늘로 솟구쳤다.
그를 저지하려고 놈들이 바로 반응해 움직였지만, 이미 그의 오른팔엔 이레이저 건이 소환되어 있었다.
피융-! 핑! 피잉-!
한 발 한 발이 광선 검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공격.
머리, 가슴, 배 할 것 없이 구멍이 송송 뚫리며 하나둘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위쪽에 있는 놈들을 모두 정리한 태정은 아래에서 쫓아오고 있는 놈들을 견제하며, 계속해서 솟구쳤다.
하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사방에서 광선 검을 든 로봇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데.”
갑자기 수가 불어나 버리자 공중에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태정이 적당한 굴 하나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날아갔다.
바로 그때.
슈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지상으로부터 빛이 뿜어졌다.
그 범위가 워낙 넓어 바로 반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좌측 날개가 순식간에 소멸됐다.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신형.
엄청난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던 태정은 팔을 휘저으며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주먹을 욱여넣었다.
살았다 싶기도 잠시.
로봇들이 떼를 지어 그를 향해 돌격했다.
그 모습에 태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운신에 제약이 생겨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가 없는 상황.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너무 높아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에라, 도박이다.”
짧은 시간 방법을 찾던 그는 날아드는 로봇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런 그를 향해 검을 날리는 로봇.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일격이었지만, 워커팩이 있는 태정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아가던 그의 몸이 비현실적으로 턴을 돌더니, 놈의 일격이 그대로 빗겨갔다.
동시에 대가리를 밟고 도약한 그는 이어 날아드는 놈들을 향해 검을 휘저었다.
서걱-!
석! 스윽!
[마크1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350만을 획득합니다.]
[마르시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순식간에 세 마리를 썰어 버린 그가 근처에 있는 적당한 놈의 대가리를 밟고 재차 도약했다.
이후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비행 능력을 상실한 그가 놈들의 대가리를 발판 삼아 조금씩 위를 향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워커팩은 이것마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움직이고 있는 태정은 죽을 맛이었다.
공격을 피하고 놈들을 베면서 그 와중에 발판도 찾아야 하니, 매 순간이 위기의 연속.
하지만 그 때문에 집중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한 번만 떨어져도 끝장인 것을 알기에, 자연스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무아지경에 빠져 신들린 듯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던 그의 내면에 이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깨운 것이 누구인가.]
“……?”
휘청.
난데없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던 태정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바로 자세를 잡은 그가 도약을 하며 입을 열었다.
“누구야? 제라드.”
긴박한 상황이라 뭘 길게 물을 상황도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잘못 들었나 싶어 전투에 집중하는데, 이번엔 좀 더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다.
[형편없는 실력이군.]
“뭐야, 이거?”
이번엔 확실했다.
음성의 주인은 제라드도, 프리지아도 아니었다.
완전히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방금 나한테 한 말이냐.”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지?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슈트에 고철값도 안 나오는 스피어 블레이드라니. 어이가 없군, 이런 놈이 파트너라니.]
“대체 무슨 소리… 잠깐 너 혹시 그거냐?”
서걱-!
기습해 온 놈을 벤 태정이 재차 물었다.
“바실… 그 뭐냐… 꺼져, 이 새끼야.”
다시 한 놈을 벤 그가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천신병이냐?”
[당연한 걸 묻고 있군.]
“마침 잘 왔다. 좀 나와 봐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벙찌기도 잠시.
“왜긴 왜야… 지금 상황 안 보여?”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그런 고물을 들고 오다니. 날 불러내려면 아직 백 년은 이르다.]
“뭐라고? 이런 병신 같…….”
태정은 짜증조차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놈의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에게 귀속된 스킬 주제에 갑 행세라니.
강제 소환이 필요한 때였다.
“깨어나라,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이여.”
[거부한다.]
“뭐?”
[이곳에서 살아나간다면 한번 생각해 보지.]
“제라드, 이 자식 이거 뭐라는 거냐. 이게 맞아?”
-동화율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집중력을 더 높이셔야 합니다.
“거참, 성가시게도 해 놨네.”
짜증이 치미는 태정이었지만 일단은 상황을 먼저 타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더 이상 신경을 분산시켰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
‘넌 일단 나가서 보자.’
다시 전투에 집중하는 태정이었다.
* * *
남극 중서부 일대.
십여 명의 사람이 힘겨운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중국 기지를 탈출해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다국적 연합 팀이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수백 킬로미터를 행군한 그들은 이미 체력적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
지친 기색이 역력한 리나가 선두에 선 대니얼을 향해 다가갔다.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아요. 좀 쉬어야겠어요.”
리나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한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는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사방이 평지라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곧 극점을 통과하니, 조금만 힘을 내세요.”
“그곳을 지나면 뭐가 있나요?”
“작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5년 전쯤에 저희가 탐사를 하고 버려 둔 굴이 하나 있는데.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먹을 것 정도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제 회의 때는 그런 말이 없었잖아요.”
“들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체력이 금방 떨어질 줄은… 사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에네모스 항까지 가는 게 베스트입니다.”
에네모스 항.
북항이라고도 불리며, 이곳을 처음 개척했던 헌터들이 사용한 수십 년도 더 된 작은 항이었다.
다국적 기지들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곳.
지금은 눈에 파묻혀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서 제격이었다.
몸을 숨기기엔 최적의 장소이자, 철수할 때 미처 가지고 가지 못한 장비나 아이템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역사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당장 이곳에서도 최고참인 대니얼을 제외하곤 그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
불어오는 칼바람에 미간을 찌푸리던 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에 통신 장비가 있긴 할까요?”
“통신 장비까진 모르겠지만 무기나 방어구가 좀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당시 이곳을 탈출했던 헌터들의 수준을 가늠해 보면 그리 좋은 것들은 아니겠지만요.”
그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후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대니얼! 대니얼! 여기 좀 봐요!”
그를 부르는 외침에 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
하늘과 대지가 맞닿은 곳에서 거대한 눈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사태를 방불케 했는데, 평지인 이곳에서 그런 것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잠깐 동안 서서 유심히 지켜보던 대니얼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이스 레귤러.”
대니얼의 말에 몇몇 헌터가 동요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저게 아이스 레귤러라고!?”
그런 그들과 다르게 남극 경험이 없는 리나가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이스 레귤러라뇨? 그게 뭐예요?”
“남극대륙의 몬스터입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들 뛰세요! 잡히면 끝장입니다!”
대니얼의 말에 곧 죽을 것같이 늘어져 있던 헌터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스 레귤러는 위험 등급 S로 원래의 장비가 있어도 잡을까 말까 한 놈.
그런 괴물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마리였다.
깡통인 지금의 몸으론 상대는커녕, 1초도 되지 않아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뛰고 있는 대니얼은 계속해서 후방을 체크했다.
아직 상당히 멀긴 하지만 이 정도면 놈들에겐 인식이 되고도 남을 거리.
그의 얼굴에 진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여기까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