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칼바람이 몰아치는 남극의 남서부 라인.
눈보라를 뚫고 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힘겨운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수 시간 전, 중국 남부 기지를 탈출한 다국적의 헌터들이었다.
“계속 움직여야 됩니다. 잡히면 끝장이에요.”
갈색 머리의 유럽인.
그의 이름은 대니얼이었다.
남극 벨기에 기지의 팀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자, 이곳에서의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 중 한 명.
어떻게 하다 보니 리더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그의 안색은 별로 좋지 못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과 떨어지는 체력.
다들 한가락씩 하는, 자국에서는 내로라하는 헌터들이었지만, 장비와 포션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스탯빨로 어찌어찌 강행을 해 나가곤 있지만, 그마저도 금세 바닥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더 큰 문제는 목적지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각국의 기지는 모두 파괴되었고, 배 역시 파손되거나 몰수당했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그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탈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곁으로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
중국 국적의 헌터였다.
화산의 1인자인 장벽거의 외손녀.
그녀가 대니얼을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목적지가 어디예요?”
리나의 물음에 잠깐 멈칫하던 대니얼은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 역시 이미 예상을 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걸어 봐야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
다시 그녀가 물었다.
“기지에 통신수단이나 장비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대니얼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없을 겁니다. 저희 기지만 해도 남아 있는 것이… 게다가 장비가 남아 있다 해도 기지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찾을 곳이 그곳일 테니까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이대로 계속 행군만 강행한다는 건 위험해요. 벌써 체력이 떨어진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데, 식량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 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들이 왜 저런 짓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이번엔 리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날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화산이 무너졌던 그날.
그녀의 가족들 역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생생하게 목도했던 그들의 죽음.
올라오려는 슬픔을 겨우 억누른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당신은 얼마 전까지 화산의 1인자였던 장벽거의 외손녀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유감이지만 지금은 정보가 필요한 때입니다. 저들은 누구고 화산은 왜 무너진 겁니까.”
대니얼의 추궁 아닌 추궁에, 결국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세 명이었어요.”
“세 명이라니요?”
그가 되묻자 그녀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뱉은 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화산은 단 세 명에 의해 무너졌어요.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죠. 저희 할아버지조차도 그중 한 명의 일검을 버티지 못하셨어요.”
리나의 말에 대니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일검이라니?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화산의 1인자인 장벽거는 세계가 인정하는 SS+급의 초특급 헌터였다.
게다가 히든은 아니지만, 특수 클래스 중 최상위 직업으로 조금 손색은 있지만, 거의 그들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일검에 벤다는 건 그의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기습을 당한 겁니까?”
“아뇨. 제가 보는 한 정면 승부였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클래스는 확인을 했습니까?”
“검을 사용한다는 것밖에는…….”
“화산엔 히든이 여섯이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셋은 배신을 했고 한 명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나머지 둘은 현장에 없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점점 더 가관이었다.
국가기관이나 다름없는 단체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그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갑자기 나타났을 리는 없을 테고, 화산에서는 이를 전혀 몰랐던 겁니까?”
“봉신방이라고 대항 세력이 있었어요.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세가 워낙 약해서 수뇌부에선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거 생각보다 큰일이군요. 놈들이 왜 이곳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수뇌부만 교체가 된 것이라면 아직 전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 아닙니까.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헌터들까지. 이렇게 되면 이 일이 외부로 알려져도 쉽사리 책임을 묻기가 어렵겠군요. 국가 간 전쟁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대니얼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들이 말하길 화산은 시작이라고 했어요. 애초에 전쟁 따위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죠. 하고 있는 행동들만 봐도, 아마 한국과 일본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을 겁니다. 저렇게 대놓고 납치를 했는데, 모를 수가 없겠죠. 이곳이야 고립된 곳이나 마찬가지니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요.”
“그럼 그들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쉽게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자칫 잘못 나섰다간 전면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승패에 상관없이 양쪽 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겠죠. 더군다나 이제 곧 월드 워 시즌인데, 이걸 포기하고 전쟁을 일으킬 미련한 나라는 없을 거예요.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이후가 되겠죠.”
“이거 여러모로 저희에겐 희망적이지 않은 일이군요.”
“그래도 살아남아야죠, 어떻게든. 그래야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대니얼의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이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죠. 사람들의 상태를 좀 살펴야 될 것 같습니다. 식량이 가장 우선시될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전투가 가능한 이들을 찾아보죠. 그리고 한번 같이 방법을 모색해 봅시다.”
* * *
끼이이-!
귀를 긁는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설계가 잘못된 것인지 녹이 슨 것인지 승강기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사방으로 보이는 암석과 한 번씩 철컹 거릴 때마다 떨어져 내리는 낙석의 잔해들.
이제껏 봐 온 첨단 문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긴 왜 이렇게 만들어 놨냐. 이거 옛날에 빌딩 작업할 때 딱 그건데?”
포터 일을 하기 전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던 태정은 옛날 고층 빌딩 작업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 타고 있던 리프트와 판에 박은 모습.
이렇게 하염없이 내려가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탑승해 있는 구조물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600년이나 흐른 시대에 이런 구식 승강기라니.
게다가 마치 수직 갱도에 들어온 것 같은 주변의 비주얼은 첨단 문명이라기 보단 오히려 과거로 회귀를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건 그렇고 한참 내려온 것 같은데, 아직도 시커먼 게 아무것도 안 보이냐.”
체감상 5분은 훨씬 지난 느낌이었다.
바깥에 있는 초대형 엘리베이터의 규모를 생각한다 해도 이는 깊어도 너무 깊은 것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파 놓은 것일까.
그렇게 한참이 더 지나서야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멈춰 섰다.
도착한 곳은 역시나 암석 따위로 되어 있는 굴이었다.
흔한 동굴이지만 밑으로 레일이 깔려있는 것이, 정말 갱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한눈에 봐도 비밀스러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출입금지란 표식이 괜히 붙어 있었을까.
하지만 약간의 불안함도 있었다.
혹시 이곳이 기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광물 등을 캐는 곳은 아닐까?
그렇다면 괜히 내려온 것이었다.
시간만 낭비한 셈.
기대 반 불안 반을 안고서 천천히 나아가던 태정은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을 인지했다.
블라스터를 이용해 좀 더 스피드를 낸 그가 거리를 좁히자 빛이 점점 더 밝아졌다.
그렇게 굴을 빠져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허공으로 보이는 수많은 광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광물들이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환하게 다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사물의 식별은 가능할 정도.
예상과 다르게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어두운 편에 속했다.
“진짜 광물 캐는 곳인가.”
좌우로 깔려 있는 레일 외에 첨단 문명의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거대한 공간.
혹시나 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시 보이는 것은 광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근데 이것도 신기하긴 하다. 대충 내가 있는 곳까지만 해도 수백 미터는 될 것 같은데. 이런 공간을 발견한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한 거네.”
태정이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마치 물이 자치 않은 거대한 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딱히 볼 것은 없어 보였지만, 온 김에 그는 바닥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블라스터를 이용해 천천히 하강을 하는 그의 신형.
척.
바닥에 도달한 그는 위에서부터 내려온 레일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따라가 보니.
“문이 있었구나.”
위에서는 보지 못한 문이 벽 한가운데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태정이 다가서자 문 앞으로 놓인 원형 표식에서 초록빛이 솟으며 벽이 좌우로 오픈됐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는 실로 놀라웠다.
반경 수백 미터 공간에 걸쳐 온갖 기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당장 보이는 원형 승강기과 어떻게 들여왔는지도 모를 타워형 구조물만 해도 수십여 개.
뿐만 아니라 층마다 기체들과 거대한 무기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특이한 구조물도 보였는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질 정도로 그에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여기가 진짜 말로만 듣던 보물창고였네.”
걸음조차 떼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던 태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다.
바로 그 순간!
“헉!”
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태정의 모습.
그 걸음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마침내 멈춰 선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뭐냐?”
태정이 본 것은 다름 아닌 로봇이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로봇.
그 크기가 어느 정도냐 하니, 이건 로봇이라기보단 빌딩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고개를 있는 대로 젖혀야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을 크기.
기체와 다르게 눈, 코, 입이 있는 진짜 로봇이었다.
“미쳤다. 이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허공으로 떠오른 태정은 한참을 올라가 로봇과 눈을 마주쳤다.
머리통 하나가 기체보다도 큰 괴물 같은 놈이었다.
“와…….”
무언가에 홀린 듯 연신 감탄을 내뱉던 태정은 슬며시 다가가 놈의 머리통을 만져 봤다.
바로 그때.
슈아아악-!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오며 알림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의 천신병을 회수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전방위 감응식 로드워커팩이 오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