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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메카닉 플레이어-123화 (123/182)

123화

파도 소리만 잔잔히 들리는 고요한 밤하늘.

새하얀 달빛 아래 무섭게 질주하는 하나의 비행체가 보였다.

그것의 정체는 수 시간 전 해왕의 몸에서 벗어나 줄곧 직진을 하고 있는 태정이었다.

밤바다가 가져다주는 정취에 취한 태정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동그란 달을 바라봤다.

“이게 진짜 내가 맨날 보던 그 달이 맞나?”

샛노란 달이 아닌 은빛으로 빛나는 달이었다.

그 크기도 도시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커서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지금쯤 다들 뭐 하고 있을까? 제라드.”

-예, 주인님.

“우리가 어디쯤에 와 있는 거지? 저기 옆에 일본은 벗어났나?”

-아직입니다.

“아직도 그것밖에 못 왔어? 느리긴 정말 느리구나. 이것도 빨리 갈아 치우든가 해야지.”

제트 블라스터는 그가 비교적 예전에 얻은 스킬이었다.

제주도를 가기도 전에 오픈이 됐으니, 기동 장비로서는 이미 구형이 된 지 오래.

새로운 스킬이 필요한 때였다.

“블라스터도 새로운 게 나오긴 나오는 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선 퀘스트 위주로 진행하셔서 지금 장비의 밸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계신 바실리스크의 천신병도 원래는 이 레벨 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전 퀘스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미로부터 꼬였나.”

-그렇습니다.

“흐음.”

히든 중 유일하게 탐색 스킬을 쓰지 않고 미로를 클리어 한 것이 바로 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벨이 낮아 스킬을 얻지 못하고 들어간 것이지만.

900레벨대의 헌터도 길을 찾지 못해 굶어 죽어 나간 걸 생각하면, 그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벽을 뚫겠단 생각을 한 것부터 스킬의 딜이 거의 없다시피 한 분당 36발의 로켓포까지.

물론, 다른 직업 역시 벽을 뚫을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돌아오지 못했던 900레벨의 팔라딘 역시 파괴력으로 따지면 로켓포 이상 가는 스킬이 분명히 존재했다.

문제는 히든을 제외한 일반 직업의 스페셜 무브 같은 경우 쿨타임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같은 벽을 뚫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도달할 확률이 매우 적다는 것이었다.

음식과 포션이 무한대로 있다면 모를까.

먼저 클리어 하고 나온 히든들이 정보를 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까지 준비를 해서 들어가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그곳에 얼마나 강한 몬스터가 있는지를 궁금해하지, 설마하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천 개의 통로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레벨에 비해 퀘스트가 많이 이르다?”

-그렇습니다.

“맞는 말인 것 같아. 항상 뭔가 아슬아슬했었으니까. 근데 또 보상이 하나같이 다 주옥 같은 것들이라… 욕심을 좀 줄여야 하나? 참. 걔는 지금 뭐 해?”

-프리지아 님 말씀이십니까.

“걔밖에 더 있냐. 아까 혼자 심각한 척은 다 하더니. 계획대로 뭐가 안 풀린 모양이지?”

-그것까진 알 수가 없지만 스스로 의식을 봉인하셨습니다.

“좋겠네.”

-무엇이 말입니까.

“너 맨날 구박받잖아. 불쌍한 녀석, 시리우스에게 좀 급을 높여 달라고 하지 그랬냐. 그럼 이런 수모는 안 당할 텐데.”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냐? 없으니까 하는 말인데. 우리 사내끼리 속 시원히 터놓고 말 한번 해 보자. 솔직히 별로지? 아닌 말로 여긴 네가 먼저 들어왔는데, 굴러 들어온 돌이 갑질하는 것도 웃기잖아. 안 그래?”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별이 없습니다.

“에라이, 네가 이래서 인공지능이야. 교감이 안 돼, 교감이. 뭐 감정이 없으니 그렇… 그런데 왜 놈을 어려워하지? 감정이 없다는 건 두려움도 없다는 건데. 왜 걔한테 쩔쩔매냐 이 말이야.”

태정의 의문에 제라드가 말을 돌리며 대답했다.

-한숨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새벽부터 계속 깨어 계셨습니다. 생체리듬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지금 주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 봐라? 말을 돌리네? 근데 별개로 피곤하긴 하네. 한 것이라곤 남의 x구멍에서 기어 나온 것밖에 없는데. 그럼 어디 네 충고대로 잠 좀 자 볼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워.”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트라이아기와 사투(?)를 벌인 지 만 이틀이 되어 갈 무렵.

그의 시야에 드디어 빙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둥둥 떠다니는 새파란 얼음덩어리들.

신기하게도 얼음은 투명색도 하얀색도 아닌 파란색에 가까웠다.

마치 색소가 입혀진 얼음 아이스크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한참을 더 날아서야 그는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대륙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여기가 남극이구나. 아까 빙산은 파랗더니, 여긴 완전 새하얀 공간이네. 거기 얼음은 물을 먹어서 그런가? 어쨌든, 지금 위치한 곳이 어디쯤이야?”

-이곳은 이스트 라인으로 남극을 4개로 쪼개면 북동 외곽 지대입니다.

“북동 외곽이라. 미국보다 크다고 했으니까, 극점까지 가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하네. 위에서는 뭐 보이는 거 있어?”

b6-1을 말하는 것이었다.

-없습니다.

“좋아. 고지가 얼마 안 남았다. 또 달려 보자.”

말이 얼마 안 남았다지, 사실 하루를 꼬박 가야 할 거리였다.

다짐을 하고 출발한 지 대여섯 시간쯤 지났을까.

제라드로부터 하나의 보고가 들어왔다.

-주인님.

“왜?”

-전방 10km 부근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야?”

-깃발을 보니 캐나다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무언가에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습격?”

-건물 대부분이 반파됐고 시체로 추정 되는 것들도 보입니다. 서쪽으로 노르웨이 기지도 보입니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이곳도 대규모 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둘이나 당했다고? 내가 조사한 바로 여기 파견된 헌터들이 녹록한 팀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보여? 몇이나 돼?”

-현재로선 없습니다. 시체의 형태로 보아 습격을 당한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그래? 잠깐 들렀다 갈까. 근처라고 했지?”

-예. 좌표 찍을까요.

“찍어 봐, 가 보자.”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가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리 클로킹을 전개해 수 킬로미터를 날아간 태정은 눈앞에 들어온 처참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시체.

사방에 수많은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수가 족히 백은 넘어 보인다.

막사와 기지는 불에 탄 것부터 박살이 난 것까지 쓸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바리게이트로 보이는 것들 역시 산산조각이 나 여기저기 잔해가 한가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대지에 내려앉은 태정은 불현듯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각성을 하기 전날.

코앞에서 죽어 가던 수많은 동료의 비명과 시체들.

그 참상이 겹치자, 마음이 착잡해지는 태정이었다.

“대체 뭐가 왔다 간 거지? 이 많은 사람이 제대로 대응 한번 못 했어.”

몬스터의 사체가 하나도 없었다.

말인즉, 압도적으로 당했다는 뜻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저기를 돌아보던 그는 이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다 벗고 죽어 있는 거지? 보통 이런 곳에 오면 장비를 착용하고 있지 않나?”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몇몇 사람이 무기를 손에 쥐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이 옷을 비롯해 장비가 없었다.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헌터들의 몸에 난 상처가 몬스터에 당한 것치곤 너무 깔끔했다.

들개만 해도 사람을 걸레 쪼가리로 만들어 버리는데.

대부분 크고 작은 자상만 있을 뿐, 겉으로 보기엔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제라드, 네 생각은 어때? 이 사람들 말이야. 뭐에 당한 것 같아?”

-몬스터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아, 놈들의 소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내가 볼 때 이거 사람한테 당한 것 같은데?”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듯하자, 그는 자리를 옮겨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노르웨이 기지로 향했다.

이곳 역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알몸을 한 채 죽어 있는 헌터들.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거 백 프로 사람이 한 짓이야. 죽이고 장비를 다 벗겨 간 거라고. 그런데 대체 누가…….”

박세아에게 넘겨받은 자료에 의하면 남극은 세계 공동 평화 구역이었다.

상호 간 무력 충돌이 있어선 안 되는 곳.

한데,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이런 무모한 짓을 대체 누가 벌인 것일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사방이 캄캄한 어둠 속.

철창 사이로 수백의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국적의 사람들로 얼마 전 있었던 이스트 라인 혈사 때 잡혀 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보이는 몇몇의 아시아인이 있었다.

훨씬 더 초췌하게 보이는 십여 명의 사내들.

유럽인들보다 먼저 잡혀 들어온 그들은 원정을 나갔다가 이곳까지 끌려온 인천의 위너스 소속 길드원들이었다.

그중 제일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속삭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 이제 결단을 내려야 돼.”

사내의 말에 또 다른 사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탈출하다 걸린 사람들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그래? 산 채로 몬스터 먹이로 던져졌다고.”

“그럼 이대로 여기서 죽기만 기다리자는 거야?”

“우리만으론 어림도 없다 이 말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와 힘을 합쳐도 될까 말까인데. 그놈들 실력 봤잖아. 우리 레벨이 아니야.”

“그래도 그렇지 시도도 안 해 보고 이대로 우리 길드원들 다 죽일 작정이야?”

“넌 그나마 나은 거지. 네 팀원들은 여기 다 있으니까. 우리 팀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답답해 미치겠네, 진짜. 괜히 원정은 간다 해 가지고.”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구석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한 무리의 헌터들을 바라봤다.

원정 팀을 관리 감독했던 중국의 헌터들.

그들 역시도 마수를 피하지는 못했다.

사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이들이 제일 참담한 심정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국의 헌터들에게 잡혀 들어왔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 화산의 수장인 장벽거의 식솔들도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장벽거가 누구인가.

아웃 브레이크 이후 중국을 통일한 100만 군세를 자랑하는 화산의 1인자였다.

그런 그의 식솔들이 이곳에 잡혀 와 있다는 것은 현 중국에 엄청난 일이 닥쳤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단체가 중국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패닉이었다.

누가 화산을 무너뜨렸는가.

이들 역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창살로 된 문이 열리며 통역기를 착용한 한 사내가 들어왔다.

“오늘은 한국 놈들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나오도록.”

그 말에 위너스 소속 헌터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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