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돌발 퀘스트?”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태정이 퀘스트 창을 오픈 했다.
[시리우스의 축전.]
나의 전인이여.
아마 이것을 보고 있다면 첫 번째 특이점을 맞이했겠군.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축하하는 바네.
물론, 이건 대우주의 유일무이한 천재인 이 몸께서 그만큼 설계를 잘해 놨다는 뜻이겠지.
동의하는가, 나의 전인이여.
혹시 지금 머리를 조아리고 날 찬양하고 있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네.
난 생색 따위와는 거리가 먼 존재니까.
아무튼 여기까지 잘 와 주었어.
첫 번째 특이점을 맞이한 기념으로 내 선물 하나를 준비했으니 그냥 가져가기만 하면 되네.
사실 이건 가드에 걸리는 것도 아니라 클로킹과 함께 퍼 줄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한 번에 다 퍼 주면 재미가 없지.
인간들 말 중에 그런 게 있더군.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자네는 지금 막 낙이 오기 시작한 거야.
내가 준비한 소소한 선물이니 잘 받아 쓰게.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야.
부디 남은 시간도 잘 헤쳐 나가길 빌겠네.
목표 - 해왕 트라이아기의 심장 주머니에서 초전자 플렉시온을 회수하십시오.
보상 - 초전자 플렉시온
“이게 뭐야? 나 특이점 온 거야?”
아리송해진 태정이 내용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라드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닌데, 왜?”
-원래 이곳은 지금 오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넌 빠져. 내가 설명할 테니까.]
프리지아였다.
[원래 여긴 네가 한참 후에나 올 수 있는 곳이야. 하지만 네가 그 벨라모스 부자를 죽이는 바람에 심해 깊숙이 잠들어 있어야 할 수호신인 해왕이 이곳까지 올라온 거지.]
“그건 네가 놈들을 끌고 와서…….”
[맞아. 근데 죽이라곤 안 했어. 대신 하나 공짜로 얻었잖아. 별거 아니니 놈 말대로 받아 가기만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제라드가 다시 한번 나섰다.
-별게 아닌 게 아닙니다. 이렇게 계획에 어긋난 행동은 자칫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내 목숨도 걸렸는데 그 정도 생각도 안 했을까. 고철, 넌 아직 나에게 안 돼. 네가 아는 것과 내가 아는 것이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적어도 2차 각성은 하고 개기라고.]
“아니, 잠깐만.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이라는 말은 뭐야? 내가 누구와 싸워야 되지?”
[아직 몰라도 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넌 아직… 그러니까. 특이점을 맞은 게 아니니까.]
“대충이라도 알려 줄 수 없나. 혹 그게… 음.”
태정은 무언가를 내뱉으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흑룡 아라곤이 말했던 천공탑.
혹시 그것에 대한 것은 아닐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절대 발설치 말라 했기에 그는 끝내 묻질 못했다.
“아무튼 이걸로 인해 내가 위험해질 일은 없다는 거지?”
[물론이지. 시리우스가 제법 잘 짜 놨어. 마무리까지 완벽한 건 아니지만.]
“마무리?”
[그건 조금 있다 알려 줄게. 넌 내가 왜 시리우스보다 더 위대한 존재인지 이따 알게 될 거야.]
‘이것들은 죄다 자뻑병에 걸렸나.’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태정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중에 얻을 스킬 하나를 지금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초전자 플렉시온이 뭐 하는 거냐?”
-지금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어차피 곧 얻을 거잖아.”
[놈한테 물어봐야 소용없어. 제한이 걸려 있거든. 이 몸이 말해 주지. 그건 바로… 육체를 소형화시킬 수 있는 장비야, 지금 네 모습처럼. 아까 말했지. 넌 지금 트라이아기의 권능으로 굉장히 작아진 상태라고.]
“그럼 내가 그걸 얻으면 작아질 수 있다, 이건가? 어디까지?”
[그것까진 나도 몰라. 플렉시온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 빨리 출발이나 해. 위치는 내가 찍을 테니까.]
프리지아의 말에 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일단 네비게이터는 사용을 할 수가 없으니, 제라드.”
-예, 주인님.
“태극 1호로 돌아다녀도 괜찮을까? 내 말은 수압이나 뭐… 그런 거 말이야.”
-이곳에서는 문제없습니다. 다만 밖으로 나가실 땐 네비게이터의 활용이 필수입니다.
“오케이. 가 보자.”
네비게이터를 비활성화한 태정은 부스터를 활용해 굴과 같이 거대한 통로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굴(?)은 생각보다 길고 넓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적갈색의 터널.
‘여기가 식도냐 위냐 어디냐.’
인간의 육체는 대충 꿰고 있었지만 몬스터는 처음이었다.
낯설면서도 신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놈도 뭘 먹으면 소화는 해야 할 테니. 위산이 나오겠지?”
[그게 왜 궁금한데.]
“잘못하면 녹여질 수도 있는데, 알고는 있어야지.”
[하여간 누가 인간 아니랄까 봐. 겁은 많아 가지고. 걱정 마. 아직 소화기관까지 들어가려면 멀었으니까.]
프리지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아가기도 한참.
곧이어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굴의 구조가 바뀌었다.
그리고 보이는 정체불명의 액체들.
그것은 사방에서 즙처럼 밀려 나오고 있었다.
“이건.”
[네가 걱정하던 그거.]
“그럼 여기가 인간의 장기로 따지면 위란 말이야? 심장은 이 바깥쪽에 있는 건가.”
당연한 소리였다.
위와 심장은 별개의 장기니까.
하지만 프리지아의 대답은 달랐다.
[놈의 심장은 위를 거쳐야 나와. 한참 내려가야 하지.]
“그래? 그럼 여기서 째고 내려가는 건 어때? 여기로 들어갈 바엔 밖을 통해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해왕의 심장은 위와 소장 사이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인간의 장기로 치자면 정확하진 않지만 십이지장쯤 될 거야.]
“별 희한한 곳에 있네. 그러고도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놈은 특수 고대종에 속하니까.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네 수준으론 이놈의 위벽을 찢지 못해. 찢는다 하더라도 한참 걸리지. 그냥 직진해.]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녹는 거 아냐? 제라드, 저곳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지?”
-태극 1호를 기준으로 대략 한 시간 정도는 버티실 수 있습니다.
“한 시간이라. 그렇게 오래는 못 버티네. 블라스터는?”
-10분 내외입니다.
“10분. 재소환 시간이 3분이니까… 좋아. 3분마다 날고 나머진 부스터로 이동하자.”
말을 끝으로 블라스터를 소환한 태정이 빠르게 앞을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치이익-!
진입을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즙들이 그의 슈트를 뒤덮었다.
동시에 새하얀 연기가 치솟으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바, 태정은 당황하지 않고 더욱더 속도를 끌어 올렸다.
내부는 생각보다 기괴했다.
뼈다귀만 남은 거대 가시 생선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고깃덩이.
심지어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다.
벽 한편에 단단히 박혀 있는 거대하고 두꺼운 금속.
그 모습이 흡사 강철과 같아 보였다.
“이건 뭐야?”
[마석으로 가공된 금속판이다. 배의 잔해인 것 같은데.]
“이놈 심해에 산다더니, 배도 공격하나.”
[모르지. 누가 또 너처럼 놈의 분노를 샀을지.]
“마석으로 가공된 거면 가격도 꽤 나갈 텐데.”
[꿈 깨. 네 수준으로 저걸 빼낸다는 건 어림도 없으니까. 게다가 저렇게 큰 게 인벤토리에 들어갈 리도 없거니와…….]
프리지아가 뭐라고 하던 태정은 외벽 앞에 서서 광선검을 소환했다.
즈왕-!
“기념으로 조금만 가져가자.”
검이 금속판을 내리쳤다.
위위윙-!
공명음을 내며 버티는 강화 금속판.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거 봐라? 한두 번 가공된 게 아닌 것 같은데.”
[가자, 빨리.]
“잠깐 있어 봐. 들어가기 시작했어.”
검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8절지 크기로 잘려 나온 철판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욕심도 많다.]
“맘 같아선 더 가져가고 싶은데, 시간이 없으니 이 정도만 하는 거야.”
태정은 잘려 나온 판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광선검을 꽤나 버텨 낸 것을 보면 상당히 값어치가 나갈 것이 분명했다.
가공 재련된 재료나 아이템은 나름 고가에 속하니까.
서둘러 인벤토리에 판을 집어넣은 그는 계속 이동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흥건히 고인 웅덩이 속 무언가 흐느적거리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저건 아마도…….
제라드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
흐느적거리는 것이 불쑥 솟아나며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놀랍게도 태정이 본 적이 있는 몬스터였다.
“옥토퍼스? 대왕 옥토퍼스잖아.”
-맞습니다.
“이놈도 결국은 한입 거리구나. 근데 여기서 보니 좀 귀여운데?”
트라이아기의 뱃속에서 만난 대왕 옥토퍼스는 예전 태정이 남해에서 봤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때는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거대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면, 지금은 집채만 한(?) 크기의 귀여운 문어 정도라고나 할까.
게다가 이미 소화가 되기 시작한 것인지 놈의 몸은 형편없이 쭈그러들고 있었다.
“불쌍한데 마무리해 줘야겠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동시에 손에 든 광선검에서 플라즈마가 치솟았고, 그것은 그대로 옥토퍼스의 대가리를 양단했다.
촤라라락-!
[대왕 옥토퍼스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500만을 획득합니다.]
[기생 대왕 조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아이템까지 깔끔했다.
이후에도 태정은 몇몇 해양 몬스터를 마주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놈들의 목숨을 손수 거두며 이동을 거듭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흘렀을까.
블라스터를 세 번이나 재소환한 그가 드디어 다른 공간에 도달했다.
위산도 부산물도 없는 깨끗한 공간.
“저기 펄떡이는 게 심장인가 본데.”
근막으로 감싸져 공명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주머니를 보며 태정이 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나더니, 금세 하나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프리지아였다.
“뭐야? 왜 나와?”
“확인할 게 좀 있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트라이아기의 심장으로 향했다.
그리곤 그곳에 손을 대더니.
쉬이익!
한차례 빛이 일며 그녀의 눈앞으로 푸르스름한 수정 같은 것이 떠올랐다.
이후 한동안 말없이 집중을 하고 있던 프리지아가 눈을 뜨며 수정을 손으로 잡았다.
“그렇게 된 거였군. 이거 생각보다 너무 스케일이 큰데.”
중얼거리던 그녀가 태정을 못 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고작 이놈으로?”
“뭔 소리 하냐, 지금. 그 아니꼬운 표정은 뭐야?”
“아무래도 시리우스가 노망이 난 모양이군. 받아.”
말을 끝으로 프리지아가 수정을 태정에게 건냈다.
그것을 받아들이자마자 그녀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제라드의 음성.
-그의 기억을 들여다보신 겁니까.
[궁금했으니까. 대체 이놈으로 어디까지 뭘 할 작정인지. 그런데 괜히 본 것 같아. 시리우스 그놈. 이번엔 생각을 잘못한 것 같은데.]
“야. 너희들 지금 무슨 얘기하냐. 이거 돌은 뭐야? 이게 그거야?”
[돌의 봉인은 트라이아기의 몸속에서 벗어나면 그때 풀릴 거야.]
“그래? 근데 기억을 들여다보다니? 너,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구나. 하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네가 나를… 그래서 그의 기억에서 뭘 본 거지?”
혼란을 틈타 물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역시 단호했다.
[그건 알 필요 없고. 나가자. 지금 뭔가 잘못됐어. 그것도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