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다음 날 오후.
이석호를 태운 차가 경비소를 통과했다는 말을 들은 태정은 그를 마중 나갔다.
차는 제1경비소를 통과해 F구역의 대기소에 정차해 있었다.
“앗. 대장님 오셨습니까.”
“네. 일들 보세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기소에 들어선 태정은 그곳에서 이석호를 볼 수 있었다.
“석호.”
“태정아!”
멀뚱히 앉아 있던 그가 태정을 보며 반갑게 일어섰다.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냐.”
“불편은 무슨. 아무도 없어서 완전 편하게 왔다. 버스 전세 낸 줄 알았어.”
“그러냐. 숙소는 잡혔어?”
“아직. 담당자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던데? 야. 그건 그렇고 네가 헌터가 되다니, 진짜 축하한다. 고생 그렇게 하더니 복이 오긴 오는구나. 직급도 높다면서?”
“그렇게 대단한 건 아냐.”
“대단한 게 아니긴. 이런 엄청난 길드에서 간부를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지. 난 사실 이렇게 큰 길드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무튼 진짜 고맙다. 네 덕분에 길드란 곳도 와 보고 일자리까지. 넌 내 베스트 오브 베스트 프렌드야. 이제부터 평생 은인으로 섬긴다.”
“우리 사이에 은인은 무슨.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그만큼 고맙다는 거지. 참. 소영이도 있겠네?”
“아. 어. 여기서 가까워. 나중에 정리 좀 되면 같이 보든가 아니면 네가 한번 가 봐. 주소 알려 줄 테니까.”
“너무 오랜만이라 둘이 보긴 좀 그렇다야. 나중에 너 안 바쁘면 한번 같이 밥이나 먹자.”
“그러든가.”
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인사 담당자가 내부로 들어왔다.
“대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제 가야 하나요?”
“네. 숙소랑 간단한 교육이 있어서요. 나누실 얘기가 있으시면 좀 있다가 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아뇨. 오늘은 얼굴이나 잠깐 보러 온 거라.”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석호를 바라봤다.
“나머진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그래. 고생해라, 친구야.”
“너도 적응 잘해 봐.”
석호와 짧은 만남을 가진 태정은 사무실로 돌아와 어제 다 보지 못한 남극 자료를 훑어봤다.
프리지아의 말대로 비밀 기지가 남극대륙의 레벨과 비슷하다면 놈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그들과 동급 혹은 이상일 테니까.
남극대륙.
그라운드 레드 LV. 9
난이도: 상(레드 홀 2-3레벨)
속성 내성을 지닌 강력한 괴수들이 즐비함.
“필드인데 이제 보니 등급이 꽤 높네.”
필드에 속하는 그라운드는 게이트로 통하는 던전보다 등급이 낮은 것이 보통이었다.
해서 필드가 블루 등급이면 던전은 화이트 등급. 필드가 레드 등급이면 던전은 블루 등급으로 분류가 된다.
적어도 국내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극은 조금 달랐다.
필드인데 던전과 같은 등급이라니.
그것도 제법 높은 레벨이었다.
“2-3레벨이면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곳인데. 레드 게이트는 하나뿐이라 연습을 하고 갈 수도 없고.”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레드 게이트, 즉 홀은 이틀 전 그가 다녀온 곳이 유일했다.
그곳의 레벨은 1.
던전 중에서는 가장 낮은 단계의 레벨이었다.
이 이상 되는 던전은 길드가 소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찍먹이나 연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다른 길드의 레드 홀을 몰래 다녀올 수도 있지만, 곧 있으면 국가전도 치러야 하고 괜한 분쟁을 만들기가 싫은 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몇 길드와 사건을 치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정말 민폐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하던 태정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그래. 들어가는 김에 몇 마리만 잡아 보고 가자. 그 넓은 땅덩어리에 조금 잡는 게 대수겠냐.”
여러 나라에서 들어와 진을 치고 있다지만, 남극대륙의 면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미국 대륙을 통째로 가져다 놔도 부족할 정도니, 아무리 많은 헌터가 들어와 있다 한들 한 줌 먼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조금 사냥을 한다 해서 티가 날까 싶은 게 그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봐, 제라드.”
-예, 주인님.
“남극이 어딘지는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느 경로로 가야 할지도 알겠네.”
-2가지 경로가 있는데, 아무래도 태평양을 경유해서 가는 것이 가장 은밀히 이동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대충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블라스터로 비행해 날아가실 경우, 예상 소요 시간은 60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뭐? 그렇게나 오래 가야 해?”
생각보다 긴 소요 시간에 태정이 만지작거리던 펜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이것도 최대 속도로 계산했을 시 나오는 수치입니다.
“엄청나게 멀구나. 이틀 하고도 한나절을 더 비행해야 한다는 소린데. 장난이 아니잖아?”
제트 블라스터의 최대 속도는 250km/h였다.
남쪽으로 바로 직진을 하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었지만, 남해 전 해상에 걸쳐 형성된 폭풍과 다른 나라를 거치지 않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그만큼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60시간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었다.
“네비게이터 8시간 타는 것도 장난 아니었는데. 이거 그럼 하늘에서 자야 되나? 블라스터는 크루즈 기능도 없잖아?”
-레버 당겨 놓고 주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밟아 놓고 자라? 그러다 장애물, 아니 몬스터라도 나오면? 기체도 아니라서 레이더도 못 쓸 거 아냐.”
제라드가 있긴 했지만 그의 좁은 시야로는 빠른 대응이 불가능했다.
근접거리에서나 쓸모가 있는 수준인데, 자고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만큼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하늘에서의 장애물이면 십중팔구 비행 몬스터가 유력할 것이다.
그 속도를 감안하면 제라드의 알림은 더더욱 소용이 없을 확률이 높았다.
“슈트에도 레이더를 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무인도 같은 곳을 경유해서 가야 하나? 아. 잠깐.”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다시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b6-1은 네가 컨트롤 가능하잖아.”
-최초 명령만 내려 주시면 가능합니다.
“그럼 b6-1을 띄워 놓고 혹시 접근하는 게 있으면 바로 깨워 주면 되겠다. 고도가 훨씬 높으니까. 시야도 그만큼 좋을 거 아냐.”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이걸로 가는 것도 클리어. 대충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슬슬 준비나 좀 해 볼까.”
그날 저녁.
태정의 집에선 주방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당히 해도 돼. 하루 한 끼 정도밖에 안 먹을 거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그때처럼 무슨 일이 또 생기실지.”
미궁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긴. 또 그러리란 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마. 언제나 그랬듯 난 또 돌아올 거니까. 그리고 남극 건은 끝까지 비밀이야.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괜히 혼자 걱정해서 상부에 보고하지 말란 얘기야.”
태정은 현재 남극이 아닌 제주도로 한 달 파견을 낸 상태였다.
남극을 간다고 하면 위에서부터 줄줄이 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드장님껜 말씀을 드려 놓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 돼. 지금 제주도도 위험하다고 난리인데 남극 간다고 해 봐. 100% 통제야. 알잖아. 이번 파견도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일단 나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까, 눈 좀 붙일게. 수고 좀 해 줘.”
“네. 들어가 주무세요.”
박세아에게 준비를 부탁하고 방 안으로 들어온 태정은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연스레 눈이 떠진 태정은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자고 있는 프리지아를 바라봤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런 그녀를 물건 치우듯 옆으로 밀어낸 태정은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다섯 시.
조용히 출발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거실로 나가자 준비를 하다가 잠이 든 건지, 식탁에 엎어져 있는 박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깨우기가 미안했던 태정은 윗옷을 벗어 고이 덮어 줬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슬며시 눈을 뜨며 일어났다.
“으음. 앗. 일어나셨어요?”
“그냥 자. 이젠 내가 할게.”
“아니에요. 잠깐 눈 감고 있던 거라.”
박세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올려진 두 개의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는 냉장 일반 음식이고 하나는 급할 때 드실 수 있는 비상식량이에요.”
“많이도 준비했다. 완전 가득 채워 놨네.”
뚜껑을 열어 본 태정이 내용물을 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리고 물은 이쪽에 6개를 준비했는데. 하나에 2리터 6개니까. 하루 하나면 한 달은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뭘 이렇게나 많이. 거기 죄다 얼음인데 부족하면 녹여 먹으면 되지.”
“그건 안 돼요.”
“왜?”
“시베리아나 극지방엔 영구 동토층이 있어서 잘못 녹여 마시면 고대 박테리아에 감염될 수도 있어요. 물론 남극 같은 경우는 층이 두껍고 발견 사례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웬만하면 드시지 마세요.”
“그런 게 있었어? 제법인데? 그런 것까지 생각을 다하고.”
“그게 제 일인걸요. 그리고 이건 발열 복이라는 건데 내복이라 생각하고 입으시면 돼요. 일정 온도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체온을 맞춰 주는 옷이에요. 이건 설맹 방지 고글이고… 또 보자. 아, 여기 이 키트 상자는 응급 상황 때 쓸 수 있는 약하고 주사제가 들어 있는데…….”
박세아는 정말이지 철저하기 그지 이를 데가 없었다.
가장 기본적인 고산병에서부터 합병증인 뇌부종에서 폐수종에 이르기까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질병에 대한 약을 준비해 놓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사실 태정에게는 크게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어차피 슈트 안에만 있는다면 기압 산소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지상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지기 때문에, 자연으로 인한 각종 질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세세한 것 하나하나를 밤새워서 준비해 준 그녀에게 태정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녀오면 밥 한번 사야겠어.’
옷을 갈아입고 모든 준비물을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은 태정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당부했다.
“나 없는 동안 사무실 잘 지키고. 네가 나보다 똑똑하니까 네 권한으로 할 수 있는 건 알아서 처리해. 널 믿으니까.”
“네. 걱정 말고 몸조심하세요.”
“그래. 나오진 마. 다녀올게.”
현관에서 인사를 나눈 태정은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그러자 쌀쌀하면서도 상쾌한 새벽 공기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코끝이 찡한 게 겨울도 얼마 안 남았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태극 1호와 b6-1을 소환했다.
동시에 제트 블라스터를 착장한 그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b6-1 올라갔어?”
-현재 최대 고도입니다.
“시야 어때?”
-아주 잘 보입니다.
“내 기동 속도 맞춰서 따라붙게 하고 뭔가 수상한 게 잡히면 바로 알려 줘.”
-알겠습니다.
사방의 시야를 확보한 태정은 블라스터의 출력 제한을 풀며 재차 명령을 하달했다.
“일단 쿠릴열도를 경유해서 태평양으로 나가자. 좌표 찍고 방향 제시해.”
-현 위치에서 북동 60도 방향입니다.
“좋아. 그럼 어디… 놈을 얻으러 한번 가 볼까.”
그의 블라스터가 새하얀 불꽃을 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