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한바탕 작은 헤프닝(?)이 지나가고 아침을 먹은 태정은 출근을 하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오늘은 일 좀 보고 남극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평소와 같이 늘 입던 옷을 손에 집어 든 태정은 옷장 문을 닫으려다 말고 한쪽에 가지런히 걸린 새 옷 두 벌을 바라봤다.
서주아가 선물로 준 것과 박세아가 선물로 준 것.
자연스레 들었던 옷을 내려놓은 태정은 서주아가 준 명품 트레이닝복으로 손이 갔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다시 손을 회수한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박세아의 트레이닝복을 바라봤다.
“어제 괜히 오버했나. 뭐… 옷이 다 거기서 거기지.”
과감하게 박세아의 옷을 선택한 태정은 채비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대장님, 안녕하세요?”
로비에 들어서자 막 도착한 직원 하나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네요.”
“그런데 대장님 옷이…….”
“아, 이거요? 매일 똑같은 옷만 입다 보니까 좀 바꿔 봤어요. 어때요?”
태정이 묻자 여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저는 패션은… 잘 몰라서요.”
“그래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정은 알고 있었다.
이 옷이 대답을 하기조차 난감한 옷이라는 걸.
보통 잘 어울린다. 혹은 옷이 멋지다.
이런 말이 나와야 정상이거늘.
잘 모른다는 말은, 그냥 별로란 말이었다.
‘하긴. 누가 옷에 자기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박고 다니겠냐.’
충분히 수긍을 한 태정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패션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기왕 받은 거 이것저것 따지면서 입을 생각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태정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 역시도 파격적인(?) 그의 패션에 순간 동공 지진이 일었지만, 눈치 빠른 부장덕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런 직원들에게 미소로 화답한 태정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내부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던 박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어? 그 옷… 진짜 입으셨네요.”
“당연하지. 어제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전 그냥 예의상 하시는 말인 줄 알고…….”
“한동안 이것만 입고 다니려고.”
태정의 말에 박세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진 태정은 고생하란 말과 함께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 그럼 오전 업무를 좀 봐 볼까.”
오전에 넘어온 결재 서류를 모두 처리한 태정은 박세아와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극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갑자기 남극이요? 설마 가시려구요?”
“일이 좀 있어서. 왜? 무슨 문제 있어?”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그곳은 중국이 레드 존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고 얼핏 봤거든요.”
“거기서 중국까지 거리가 얼만데, 사냥터로 사용을 하고 있단 말이야? 땅도 넓어서 돌 데도 많은 인간들이?”
“그때 미궁 자료 찾으면서 잠깐 본 거라 확실하진 않아요.”
“그래? 일단 싹 가지고 와 봐. 뭐 나야 필드에서 사냥을 할 건 아니니까.”
“네. 참.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친구분 문제요.”
“아, 맞아. 어떻게 됐어?”
“사업 수송부에 자리를 만들었어요.”
“수송부면 운전하는 곳인가?”
“직접 하시는 건 아니고 작은 관리직인데. 수습 기간 동안 배우시면 문제없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연봉은?”
“기본만 3억 6천이요.”
“그럼 꽤 요직인데? 괜히 나 때문에 자리 하나 뺀 거 아냐?”
“그건 아니에요. 그쪽에 인원이 너무 모자라서 새로 충원하는 거라. 모집을 한다 해도 민간 부문은 이래저래 거칠 것도 많고 해서… 대장님 지인이시면 신원도 확실하니까, 수송부에서도 좋아하던걸요.”
“그럼 다행이지만. 언제부터야?”
“오늘 연락이 갈 거고 아마 내일쯤 모시러 갈 거예요.”
“미리 전화를 해 둬야겠네.”
점심시간이 지나고 사무실로 복귀한 태정은 이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마침. 전화 잘했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는데. 너 헌터 됐냐?
“그렇게 됐다.”
-야. 그걸 숨겼단 말이야?
“된 지 얼마 안 됐어.”
-어떻게 해서 된 거야?
“그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고. 내용은 들었지?”
-어어. 나 진짜 거기서 일하는 거 맞아?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올 생각은 있고?”
-당연하지. 바로 가지. 그렇지 않아도 시공업체 부도나고 우리 회사도 휘청거려서 경매고 뭐고 지금 난리도 아닌데.
“다행이다. 자리 다 만들어 놓고 안 온다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고맙다, 태정아. 나 진짜 일도 일이지만 길드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거든. 진짜 열심히 잘할게.
“인마. 너랑 나랑 몇 년인데. 우리 엄마랑 아버지 돌아가시고 너희 집에서 얼마나 많이 챙겨 줬냐. 그리고 이거 정말 필요한 사람 뽑는 거야.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
-짜식. 멋있기는. 내일 가면 볼 수 있냐?
“그래, 한번 보자.”
전화를 끊은 태정은 뭔가 하나를 해결했다는 기분에 속이 시원했다.
언젠가 잘되는 날이 오면 힘닿는 한 도와주고 싶었던 친구.
사실 이석호는 그에게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불우한 학창 시절 최다솜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의지가 되었던 이.
그의 가족에게도 받은 것이 많았다.
“이제 석호도 자리를 잡았고 더 이상 신경 쓸 일은… 아니, 하나가 남았지. 그 여자 대체 어떻게 쫓아내지?”
[혹시 그 여자가 나 말하는 거냐?]
난데없이 들린 프리지아의 음성에 태정이 흠칫 놀라며 말을 내뱉었다.
“아. 깜짝이야. 안 자냐?”
[잠은 아까 다 잤지.]
“이봐. 몸을 쓰는 것까진 막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 치고. 깨어 있을 땐 좀 나와 있으면 안 되냐? 꼭 이렇게 관음을 해야겠어?”
[한번 나올 때마다 얼마나 많은 기운이 소모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머무르는 시간만 늘어나. 그걸 원하는 건 아닐 텐데?]
“그러면서 아침엔 잘도 기어 나오더라.”
[현 상황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유희인데. 그건 참을 수 없지.]
“됐고. 전에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힘을 찾아야 떠난다고 했었지? 뭐 내가 도와줄 일은 없나?”
[오호. 날 도와주겠다?]
“좋아서 그런 게 아니야. 내 몸을 너하고 공유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
[단축시키는 방법이 있긴 하지.]
“그게 뭔데.”
[합궁.]
“합궁? 그건 또 어디 있는 거야? 지금 내 수준에서 클리어 가능한 곳인가.”
[물론. 한 삼백 번 정도면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삼백 번씩이나 가야 한다고? 하루에 한 번만 가도 300일인데. 그럼 대체 얼마나 눌러먹겠단 거야? 그래서 합궁이란 곳은 블루는 아닐 테고, 레드 존에 붙어 있나?”
태정의 물음에 프리지아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경박한지 그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바보. 합궁은 던전이 아니야. 내가 너무 고급스러운 단어를 쓴 모양이군. 교미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교미? 무슨 교… 설마. 합궁이 그럼 그 합궁…….”
태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제야 그게 무엇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그러니까. 너랑 내가…….”
[합체를 하는 거지.]
“미친. 그것도 농담이라고.”
[농담이 아니야. 넌 시리우스의 전인이자 그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런 너의 양기를 내게 불어넣어 주면 난 금세 힘을 되찾을 수 있지. 물론 지금은 그 힘을 다 쓰지 못해 미천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삼백 번 정도면 내가 네 몸을 완전히 떠나 혼자 운신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돼. 어때. 솔깃하지? 오늘부터 당장 할까?]
그녀의 제안에 태정이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못 들은 걸로 하겠다.”
[하루에 세 번씩이면 100일인데?]
“100일이고 나발이고. 안 해.”
[이거 이제 보니 정신적 고자네. 몸은 그렇지 않던데.]
“마음대로 생각해라.”
아무리 명분이 있다 한들 몬스터와 그 짓을 할 순 없었다.
물론. 겉모습은 절세미인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역시 처음 봤을 땐 눈을 떼지 못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어디 그 짓이 외모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몸의 합체는 그리 간단히 성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거짓이기라도 한다면?
그는 애꿎은 정력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내 8년 순결을 너 같은 몬스터에게 받칠 순 없지.’
그날 오후.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태정은 박세아가 넘겨준 파일을 살피고 있었다.
“음. 이거 생각보다 여러 곳이네.”
그녀가 가져다준 남극 자료에는 총 8개의 국가가 대륙을 양분해 나눠 쓰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세력이 들어온 곳은 중국으로, 나머지 7개 국가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탐사를 함에 있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소유권이 인정되는 던전은 공식적으로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점은 태정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에겐 희대의 사기 스킬인 클로킹이란 기술이 있으니까.
“일단 비밀 게이트가 있는 극점은 중국영역인 것 같고. 몬스터 레벨은 그라운드 레드 정도… 뭐 사냥을 할 건 아니니까. 문제는 게이트 안에서인데. 이곳에 대한 정보가 없단 말이야.”
클래스 전용 퀘스트라 그런지 어디에서도 이곳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탐사를 통해 찾아 들어가는 것까지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부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모르니, 태정은 그 점이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항상 아슬아슬했단 말이지.”
제라드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 또한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태정은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프리지아 있나?”
[왜? 생각이 바뀐 거야?]
“그게 아니라. 혹시 비밀 기지에 대해 뭐 좀 아는 거 있나 해서.”
[글쎄. 내 예상이 맞다면 그 비밀 기지란 곳은 적당한 수준으로 맞춰져 있을 거야.]
“근거는?”
[자세히 말을 해 줄 순 없지만, 그곳은 원래 존재해선 안 되는 곳이야. 즉 저곳이 이 행성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이지.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음.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내가 어떠한 것에 대해 입을 열게 되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거라는 거. 저곳도 비슷한 개념이야. 예를 들어 네가 개미집을 키운다 가정을 해 봐. 근데 그 개미집에 개미귀신들이 나타난 거야.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지?]
“개미귀신을 치워야겠지.”
[맞아. 바로 그거야. 반대로 그 개미집에 육안으로는 구별이 가지 않는 다른 개미들이 들어왔어. 이때는 어떻게 할 거지?]
“구별이 안 가면 별수 있나. 그냥 냅두겠지.”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야.]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비밀 기지가 개미집 안의 또 다른 개미다? 개미귀신은 될 수 없다? 그럼 본래의 개미는 남극대륙의 몬스터를 말하는 건가.”
[생각보다 똑똑하네.]
“네 말이 사실이면 둘의 난이도가 똑같다는 뜻인데.”
[완전히 같지는 않아. 말했잖아. 다른 개미라고. 주인인 네가 어디까지 허용을 할지에 따라서 같을 수도 혹은 더 아래일 수도 위일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그 기준이 개미에 비해 압도적 수준인 개미귀신을 넘어서진 않는다는 거지.]
“대충 이해를 하긴 했는데. 근데 네 말을 들어 보면 마치 그곳에 주인이 있기라도 한 것 같잖아? 그 개미집을 만든 이는 누구지?”
[그걸 말하면 죽는다니까? 지금 네 수준으론 감당 못 해.]
“그래?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정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미집과 주인이라. 하나는 확실하군. 그냥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