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사냥을 마치고 복귀한 태정은 복도 앞에서 대기 중인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어? 주아 씨?”
“안녕하세요.”
“회복하셨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덕분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런데 혹시 절 기다리신……?”
“아,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요.”
띵동.
그들이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퇴근을 한 박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제 마친 거야?”
“아. 보스, 오셨… 주아 님 안녕하세요.”
“네. 세아 씨 오랜만이네요.”
박세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서주아가 태정을 향해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냈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 든 태정이 내부를 슬쩍 열어 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진급 선물이요. 원정 나가 있느라 소식은 진즉에 알았는데, 이제야 드리네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아이 참. 뭘 이런 걸 다… 주시는 거니까 일단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데 옷 같은데 맞나요?”
“네. 어울릴 만한 걸로 한번 골라 봤어요.”
“그렇지 않아도 옷이 너무 없어서 좀 사려던 참이었는데. 딱이네요.”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톰블랙 수석 디자이너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긴 했는데…….”
“톰블랙이면 엄청 유명하잖아요.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들었는데.”
“저도 몰랐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이거 진급 선물치고는 너무 과한 선물 같은데… 그래도 주신 거니, 아무튼 잘 입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마음에 드시면 됐죠. 전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세아 씨도 또 봬요.”
서주아가 집으로 들어가고 태정 역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무언가 낯선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뭐야?”
“네?”
“그거 손에 들고 있는 그거.”
태정의 물음에 그녀가 황급히 쇼핑백을 뒤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그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내뱉었다.
“아. 오늘 활동비 나오는 날이지? 쇼핑 했어?”
“네? 네.”
“그런데 뭘 그렇게 놀라면서 감춰. 뭐 샀는데?”
“그냥… 옷이요.”
“옷이라. 어디 한번 봐 봐. 내가 봐 줄게. 내가 또 여자 옷은 좀 볼 줄 알거든. 동생 옷 내가 다 사 줘서 눈썰미는 좀 있어.”
“아, 아니에요. 저녁 안 드셨죠? 금방 차려 드릴게요.”
그녀가 대충 얼버무리며 후다닥 들어가 버리자 홀로 남은 태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속옷인가?”
뒤이어 들어간 태정이 씻으러 들어가고 소파에 앉아 자신의 쇼핑백을 바라보던 박세아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서주아의 선물에 비해 자신이 사 온 선물은 초라해도 너무 초라해 보였다.
종류라도 다르면 모를까.
같은 아래위 한 쌍에 색도 비슷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명품 중의 명품인 톰블랙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브랜드였다.
그런 곳의 수석 디자이너면 패션계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이고, 그런 이가 직접 컨택 한 아이템이면 누가 입어도 잘 어울릴 것이 분명한 사실.
하지만 자신이 가져온 옷은 어떤가.
감히 비교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옷을 꺼내 들고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이게 뭐야, 정말. 이름이라도 없었으면… 난 바보야. 이걸 좋아할 거라면서 들고 왔다니.’
어차피 일반인과 헌터의 소비력은 넘사벽이라 가격은 크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평소 태정의 성격을 생각하면 10만 원짜리도 마다하지 않고 입을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비교가 되면서 디자인까지 박살이 나 버린 옷을 선물로 주기엔 창피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아. 난 진짜 쓸모가 없구나.”
박세아가 자책을 하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씻고 나온 태정은 방으로 들어가 서주아가 선물해 준 옷을 입어 봤다.
“햐.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촉감부터가 달라. 팬케이크처럼 보들보들하면서 오징어 다리처럼 단단하게 잡아 주는 것 좀 봐. 이게 명품인가?”
평소 입던 옷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촉감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거실로 나와 전신 거울을 바라봤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손을 본 옷이라 그런지 디자인 역시도 고급스러움이 철철 흘러넘친다.
몇 번을 이리저리 돌며 핏을 보던 태정은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박세아를 향해 물었다.
“여기 잠깐 봐 줄래?”
“네?”
“이 옷 어떤 것 같아?”
“멋져요.”
“그거야 당연한 거고. 이거 한 벌에 수천만 원이 넘을 텐데. 나한테 어울리는지 봐 달라는 얘기야.”
“보스는 뭘 입어도 다 잘 어울려요.”
“너무 대충 아냐?”
“정말인걸요.”
“그래? 사실 내가 옷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런 걸 잘 몰랐는데, 비싼 옷은 확실히 태가 나는 것 같아. 네 말대로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가. 이런 기분이면 앞으론 쇼핑도 좀 해 봐야겠는데.”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옷을 갈아입으려 들어가려던 태정은 소파 위에 올려진 새하얀 쇼핑백을 바라봤다.
‘근데 뭘 산 거지?’
몇 달을 지내며 본인을 위해 무언가를 사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있어 봐야 자신의 카드로 식자재를 사는 것 정도가 전부.
과연 첫 월급으로 무엇을 샀을까.
궁금함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방을 한번 바라본 태정은 다시 시선을 돌려 슬며시 쇼핑백 안을 바라봤다.
그러자 새 하얀색의 면으로 된 후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옷이잖아?’
거리낌 없이 손을 넣어 옷을 꺼내 봤다.
그러자 순백색의 꽤 두꺼운 후드 티 하나가 펼쳐졌다.
동시에 태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티셔츠에 자신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왜 여기에 내 이름이…….”
의아함을 느낀 그는 마저 하나를 꺼내 봤다.
순백색의 트레이닝 면바지.
마찬가지로 한쪽 다리에 자신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뭐지? 뭔가 단체복 같긴 한데. 아. 그때 부서 체육복 맞춘다고 한 게 이건가? 근데 무슨 이름을 이렇게 대놓고 박아 놨냐. 창피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옷을 들며 박세아를 불렀다.
“비서님, 이거 뭔가요? 우리 체육 활동복인가요?”
태정이 그리 말하자 뒤를 돌아본 박세아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태정이 옷을 흔들며 물었다.
“우리 활동복 검정색 아니었어? 이름은 또 왜 이렇게 크게 박은 거야. 다른 부서는 보니까 명찰 달던데.”
“아, 그게…….”
“뭐야? 아니야? 그럼 이거 뭔데?”
태정이 재차 묻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금 감으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거 사실 보스 선물이에요.”
“뭐라고?”
“선물요. 진급 선물…요.”
“이게 내 선물이라고?”
“많이 별로죠?”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직접 만들었어?”
“아뇨. f구역 종합 쇼핑몰에서 샀어요.”
“얼마 줬는데?”
“150만 원…….”
“뭐!? 이걸 150만……!”
반사적으로 말을 뱉던 태정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이걸 150만 원이나 주고 샀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 돈이 아까웠다.
디자인이며 브랜드는 둘째치고 그녀가 이걸 샀다는 것이 아까웠다.
이번에 박세아에게 나온 활동비는 200만 원 남짓.
몇 년 만에 처음 받아 본 돈의 대부분을 이 이상한 옷에 써 버렸다고 생각을 하니, 잔소리가 마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진급이 뭔 대수라고.
마치 동생이 한 달 내내 고생해서 번 돈을 모두 털어 선물을 사 온 기분이랄까.
하지만 준비해 온 사람 성의가 있는데, 여기다 대고 ‘너 사고 싶은 거나 사지 뭐 하러 이런 걸 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음. 이거 꽤… 마음에 드는데?”
태정의 말에 당장이라도 옷을 치워 버리고 싶던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정말요?”
“어. 이런 스타일은 흔한 게 아니야.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어디서 이런 걸 찾은 거야. 너 은근 패션 감각이 있어. 사실 이런 거 한번 갖고는 싶었거든. 구할 수가 없어서 문제였지만.”
태정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걱정 많이 했거든요. 마음에 안 들어 하실까 봐.”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눈이 잘못된 거지. 근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무슨 옷 한 벌에 150이나 태워. 선물치곤 좀 과해.”
“보스가 마음에 드시면 됐죠. 더 좋은 걸로 해 드리고 싶었는데. 돈이 좀 부족해서.”
“아니, 충분히 좋아. 나 진짜 매일 이거 입고 출근하고 싶은데?”
“그 정도예요?”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하실 줄은 몰랐어요. 사실 주아 님 선물이랑 너무 비교가 돼서 이걸 드려야 할지 고민을 좀 했었거든요.”
“이게 뭐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나 또 이거만 맨날 입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나 하나 꽂히면 그거만 입고 다니거든.”
“그럼 제가 다음 활동비 들어오면 한 벌 더 사 드릴게요!”
“아니, 한 벌이면 충분해. 너도 돈 모아야지.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다음엔 마음만 받을게. 그건 그렇고 이거 입어 봐야겠다, 지금.”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옷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150만원이라, 왠지 미안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천만 원짜리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쳤던 그였다.
하지만 이 옷의 무게는 좀 달랐다.
자신을 생각해 전 재산을 털어 가지고 사 온 선물.
가격을 떠나 그 마음만큼은 수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 어디 한번 입어 볼까.”
서주아가 선물해 준 옷을 벗고 박세아가 선물해 준 옷을 입은 후 거실로 나온 태정은 전신 거울을 바라봤다.
손바닥만 한 글씨로 하나하나 새겨진 유태정이란 글자.
상의 전면과 바지 후면을 가득 채운 이 디자인은 도저히 보고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기괴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그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최고다.”
태정의 평가에 기대 어린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박세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까지 봤던 그녀의 미소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다음 날 아침.
어딘지 모르게 찌뿌둥한 느낌에 그가 몸을 뒤척이며 잠을 깼다.
“아. 왜 이렇게 몸이 자꾸… 아.”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곤 흠칫했다.
나신의 몸으로 들러붙어 곤히 자고 있는 여자.
프리지아였다.
이젠 놀랍기보단 짜증이 치밀었다.
“야. 왜 자꾸 아침마다 기어 나오는 거야.”
그가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밀어내자, 그녀가 반쯤 눈을 뜨며 일어났다.
“갇혀 있는 게 얼마나 답답한데. 같은 몸을 쓰는 처지에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말은 바로 해라. 내 몸을 네가 멋대로 쓰고 있는 거야. 그리고 왜 자꾸 들러붙는 건데.”
태정이 불쾌하다는 듯 몸을 털며 중얼거리자 프리지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쯧쯧. 자기도 좋았으면서.”
“내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난 이미 그런 것 따윈 초월한 지 오래야. 넌 그냥 나한테… 그렇지. 원숭이 같은 거라고.”
태정이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비웃자 다시 한번 혀를 찬 프리지아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야. 고철. 고철! 대답 안 해?”
-무슨 일이십니까, 프리지아 님.
“네가 말해 봐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네 주인이 간밤에 내 옆에서 빨딱 섰냐, 안 섰냐.”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지금 무슨…….”
“넌 가만히 있어. 야, 고철. 대답 안 하면 오늘부터 네 자리는 없다.”
프리지아의 협박에 제라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주인님께선 빨딱 스셨습니다.
“뭐라고? 이 바보 같은 게 지금 무슨 소릴…….”
태정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프리지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몇 번 섰냐.”
-시도 때도 없이 스셨습니다.
“들었지?”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 묻는 그녀를 보며 태정은 생각했다.
‘저걸 빨리 쫓아내야 돼. 가장 시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