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점점 다가오는 포위망에 태정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맞다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
“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없나?”
[보기보다 신중하군.]
“네가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좋아. 이름 정도야. 프리지아. 세인트 프리지아다.]
대답을 듣자마자 태정이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혹시 너 세인트 프리지아라고 들어 봤냐.”
그의 물음에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용없어. 그놈은 나를 알고 있지만 대답은 하지 않을 테니까. 시리우스가 좀 멍청하긴 해도 그런 걸 떠벌려서 상품을 망칠 정도로 허술한 놈이 아니거든.]
여자의 말대로 제라드는 권한 밖이란 대답을 내놓았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기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
고민을 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풀려나면 넌 뭘 할 거지?”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그게 중요한가?]
“네가 날 해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해서 말이야.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걸 보면 보통의 몬스터는 아닌 것 같은데.”
[몬스터라. 이거 체면 다 구기는군. 이봐, 꼬마.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저급한 수준의 존재가 아니야.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너에겐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럼 어쩌잔 말이야?]
“그러니까.”
[이런…….]
너무도 신중한 그의 태도에 프리지아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급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이 공간에서 그 족쇄를 풀어 줄 인간을 만났다.
시리우스의 힘을 지니고 나타난 인간.
이는 이 시스템 안에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고, 달리 말해 기적 이상의 일이었다.
무조건 잡아야 하는 기회.
[적당히 좀 해. 꼬마, 어차피 넌 이대로라면 죽는다니까?]
“음. 그래 뭐 이쪽도 확실한 건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간단해. 시리우스의 이름으로 명하니, 역천의 프리지아의 죄를 사한다.]
“그게 끝이야? 역천의 프리지아는 또 뭐야?”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그는 그녀의 주문을 그대로 읊었다.
“시리우스의 이름으로 명하니, 역천의 프리지아의 죄를 사한다… 이제 됐나? 뭔가 좀 오글거리는데.”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그를 향해 한없이 들뜬 프리지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잘했어, 꼬마. 넌 내 구세주야.]
대답이 들려온 직후.
그의 눈앞에 다가오던 사람들이 접시 위 낙지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주변으로 확대가 되었고, 공간 전체가 일그러지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소용돌이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곳엔 태정도 있었다.
쉬리릭!
순간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일었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어느 낡은 건물 안이었다.
“돌아왔나.”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 사람들과 최첨단 설비들.
그가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지금 내 눈앞에 뭐가 보이지?”
-녹색의 반파된 게이트의 문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보여. 일단 빠져나온 것 같긴 한데…….”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프리지아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어디를 봐도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 뭐였지? 그것도 환상 같은 거였나?”
워낙 기이한 일이 많이 터지니 이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의심부터 드는 태정이었다.
“일단 나왔으니 된 거지.”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파일을 쳐다봤다.
혹시 사라지면 어쩔까 했는데, 다행히 그것은 그대로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파일을 집어넣자, 반가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특수 근접 무기 체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프로토 타입 플라즈마 블레이드 스킬이 오픈됩니다.]
“역시 이거였어.”
퀘스트를 완료한 그가 바로 스킬 창을 띄워봤다.
[플라즈마 블레이드] [프로토 타입]
파괴력 1,500-10,000 (봉인)
길이 손잡이로부터 1.7m
쿨타임 손상 시 30분
지속 시간 반영구적
소비 마나 1만
*세계 최초의 레이저 광선 검
“뭐야? 검이야?”
설명을 보니 이번 스킬은 검인 듯했다.
뭔가 지금까지의 무기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킬.
그래서 더 호기심이 일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는 곧장 스킬을 소환해 봤다.
그러자 묵직한 무언가가 손에 들렸다.
약 20cm가량 되어 보이는 둥근 막대기.
소재는 겉으로 보기엔 스테인리스강이나 티타늄 같아 보였다.
무게가 있긴 했지만 강철이라 하기엔 조금 가벼운 느낌이랄까.
“음.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는 아니네.”
흔히 아는 도검의 형태를 떠올렸던 태정은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이거 중앙에 튀어나온 거. 이게 뭔가 장치 같은데. 맞아?”
-그렇습니다. 한번 누르고 떼면 활성화가 되고, 10초간 누르고 계시면 지금과 같이 비활성 모드로 전환됩니다.
“그럼 여기서 검이 튀어나온다는 뜻이군.”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태정은 손잡이를 전방으로 겨눴다.
그리고 위로 튀어나온 것을 엄지를 이용해 잡아 누르자.
지잉-!
한차례 공명음과 함께 청색의 기둥이 불쑥하고 솟아올랐다.
“우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태정은 손잡이 위로 1미터 이상 솟아난 둥근 검 날을 바라봤다.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검의 날이 아니었다.
빛.
진한 청색의 빛이 막대 아이스크림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것은 일정 간격으로 연해졌다 진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비주얼이 멋지다 못해 영롱할 정도였다.
“햐. 레이저라 길래 뭔가 했더니, 이런 거였어? 죽이잖아, 이거?”
약간 흥분을 한 그가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지잉-! 징! 부앙!
아무리 휘둘러도 빛의 기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게 프로토 타입이면… 다른 건 상상도 안 되네. 제라드, 이게 최초로 나온 거면 가장 낮은 등급이라는 거잖아. 그렇지?”
-테스트용으로 나온 2번째 버전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검에 플리커 현상이 있는 게 느껴지실 겁니다. 이 무기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플라즈마를 응축시켜 가둬 둘 수 있는 기술이 변변찮아 출력을 이용해 유지를 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었습니다. 때문에 파괴력이 일정치 않다는 단점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파괴력의 고저가 심하구나. 그래도 최대 1만이면 괜찮은 것 같은데?”
어찌 됐건 근접 무기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원딜과 근딜이 모두 가능해진 상황.
물론 프로토 타입이라 최대 성능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이제 고작 첫 번째 무기가 오픈됐다.
원딜의 첫 무기가 권총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건 대박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
벌써부터 다음 무기가 기대되는 태정이었다.
“오케이. 이건 됐고. 이제 사람들을 찾아보자. 프리지아인지 후리지아인지가 빨리 구해야 된다 했으니까.”
태극 1호를 소환한 태정은 곧장 부스터를 활성화시켰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후방에서 소름 끼치도록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태정의 눈에 한 마리의 몬스터가 들어왔다.
뿔이 3개 달린 이족 보행의 황소 괴물.
상체가 압도적으로 발달이 된 놈은 핼버드와 같은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형태의 괴수였다.
“정보.”
-없습니다.
“좋아.”
예상을 했기에 달리 말은 필요가 없었다.
곧장 블레이드를 꺼내 검을 활성화시킨 태정은 부스터를 최대출력으로 밟았다.
그러자 빛의 검을 든 그의 신형이 시속 60km로 돌진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몬스터 역시 짧은 다리를 뒤뚱이며 마주 뛰어왔고 교차점에 선 놈의 핼버드가 태정의 머리를 쪼개려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속도를 전혀 계산치 못한 멍청한 짓이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빛의 검이 괴수의 중단을 갈랐고, 그대로 10여 미터가량 나아가던 그의 신형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뒤돌아 결과물을 확인하는데.
툭.
멍청하게 서 있던 놈의 상체가 하체와 깔끔히 분리돼 바닥으로 처박혔다.
[에노타우루스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2천만을 획득합니다.]
“봐. 좋잖아.”
그가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 * *
연구소 지하 3층 c-7번 격실.
초췌한 모습의 남녀 여럿이 벽에 기대 가쁜 호흡과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은 원정 팀에서 잘려 나온 소수 무리로 원인 모를 현상에 의해 이곳에 갇히게 된 제닉스의 헌터들이었다.
“으으. 너무 아파요.”
“팔이 빠진 거 같아.”
“나도. 완전 무방비 상태였어.”
“누구 치유 포션 남는 거 없어요?”
하나같이 멀쩡한 이들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통이 심할 뿐.
치명상을 입은 이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다들 조금만 더 버텨요. 곧 대장님이 구하러 오실 거예요.”
시뻘겋게 물든 팔을 부여잡고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있는 여자.
바로 원정 팀의 막내 레벨로 참가했던 서주아였다.
‘다들 어떻게 됐을까. 무사할까?’
애써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솔직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도 알 수가 없을뿐더러, 같이 쫓기던 팀들이 살아 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더군다나 최초 습격지에서 있었던 몬스터들의 레벨을 감안한다면, 설사 그들이 무사하다 한들 구하러 오는 것은 무리였다.
그나마 믿을 만한 건 본부에서 파견이 될 구조 팀이지만, 현 상황으론 그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으으. 주아 씨, 우리 이제 끝난 거죠? 다 끝났죠?”
눈물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고통스러운 얼굴로 누워 있는 여자.
얼굴에 땟국물이 줄줄 흘러 거지꼴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서연.
전략기획본부장의 딸이었다.
호기심에 참가를 했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그녀는 현재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아빠 말이 맞았어요.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흑. 바보같이 떼나 쓰고. 아빠가 많이 슬퍼할 텐데. 나 같은 불효자식도 없을 거예요.”
절망적인 상황에 그녀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하서연을 서주아가 다독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우리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본부에서 구조 팀도 파견을 했을 거고. 대장님도 저희를 찾고 계실 거예요. 그때까지 마음 독하게 먹고 버텨요. 서연 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미안해요, 다들 힘든데.”
“이해해요, 그 마음.”
그녀를 진정시킨 뒤 서주아는 격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곤 좁게 난 틈 사이로 밖을 바라보자, 복도 건너에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육안으로만 수십 마리.
진즉에 나가 볼까도 생각을 해 봤지만, 놈들 때문에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다 죽을 거야.’
이미 탈수가 시작된 헌터들이 여럿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의 양을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상황.
무언가 답이 필요했다.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