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숨이 멎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었다.
동영상 따위를 보는 것하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하지만 태정이 누구인가.
이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부처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였다.
‘어차피 가짜야. 유령 같은 거라고. 좀 본다 해서 이상할 건 없지. 게다가 이 이상한 세상에선 이게 어쩌면 단서일 수도 있어. 좀 더 유심히 살펴야 돼.’
그렇게 뭔가 힌트(?)가 있을까 싶어 그녀의 나신을 살피던 태정의 귓가로 제라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뭐가?”
-심박수가 200을 넘겼습니다. 이 이상 올라가게 되면 위험합니다.
“그건… 고장이 난 거다. 난 지금 매우 평범한 상태야.”
-숨은 쉬어지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제라드의 말을 일축한 태정은 이수영의 몸에서 별다른 특이 사항(?)을 발견할 수 없자 다시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문서나 usb 같은 것은 발견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까 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벽에 달린 철물함.
예전 명도 한라산 호텔에서 봤던 객실 금고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연다?’
사람만 만져지지 않을 뿐 다른 것은 생생하게 만질 수가 있어 금고를 조작하는 것까진 가능했다.
문제는 락이 걸려 있다는 것.
비밀번호도 모르고 열쇠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겉모양을 보니 그런 것 따위로 여는 것 또한 아닌 것으로 보인다.
손잡이는 있지만 그 외 구멍이나 다른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
몰래 슬쩍 당겨 봤지만 역시나 꿈쩍을 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제라드를 통해 물어라도 보겠지만, 서로 보이는 것이 달라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여기 있을 것 같은데… 기다려야 되나? 그러기엔 시간이…….”
구조 팀으로 오지만 않았어도 몇 날 며칠을 기다릴 수가 있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혼자가 됐지만, 엄연히 그가 이곳에 자원을 한 것은 원정 팀의 구조 때문이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다는 뜻.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눈에 화장품 하나가 들어왔다.
길쭉한 스틱 형태의 아이라이너였다.
‘일단 이걸로 시선이라도 끌어 보자.’
태정은 아이라이너를 들어 금고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네 물건은 도난당했다.]
‘이게 맞나.’
적고 보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봐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도 없었기에 그는 책상을 한번 크게 두드렸다.
탕!
“뭐야?”
소리에 놀란 이수영이 머리를 말리다 말고 그대로 굳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태정의 손이 책상을 때렸다.
탕!
“뭐야, 뭐야?”
이번엔 확실히 인지했는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발견한 의문의 메시지.
“네 물건은… 도난당했다?”
메시지를 읽던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그리 크지도 않은 방을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태정은 그녀의 행동이 매우 답답했다.
‘여기 누가 있겠냐. 나 같으면 금고부터 열어 보겠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그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집부터 뒤져 봤을 확률이 높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던 이런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욕실까지 확인을 하고 나온 그녀는 마지막으로 침대 밑을 훑어봤다.
“아무도 없는데. 대체 저기에 언제 저런 게 있었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화장대 옆에 둔 팔찌를 금고로 가져갔다.
그러자 금고 위로 홀로그램 같은 것이 떠오른다.
거기다 손바닥을 대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뭐야? 그대로 있잖아? 뭐가 도난당했다는 거야?”
내부엔 그녀가 가지고 온 물건들이 고스란히 다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파일이 태정의 눈에 들어왔다.
외장 하드같이 생긴 것 밑에 깔려 있는 종이로 된 문서.
[특수 근접 무기 체계 프로젝트 발표안]
그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팔을 들이민 태정이 파일 위에 손을 올렸다.
‘됐다.’
이제 알림음만 들려오면 되는 상황.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지? 이게 아닌가?’
그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내용물을 확인한 이수영이 금고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문은 태정의 팔에 걸려 반쯤 열린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했다.
힘을 줘 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금고의 문.
“왜 이러는 거야? 응? 왜 이래?”
그녀가 낑낑대며 문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태정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마정석 퀘스트랑 비슷한 건가 본데.’
완전한 확보를 위해선 인벤토리에 넣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을 마친 그가 바로 인벤토리를 오픈했다.
그런데.
[인벤토리를 오픈하실 수 없습니다.]
인벤토리가 열리지 않았다.
즉각 다시 한번 해 보지만 역시 같은 메시지만 반복될 뿐, 인벤토리는 열리지 않았다.
“제라드, 왜 인벤토리가 먹통이지?”
-아무래도 주인님이 보고 계신 세상은 현생과 환상이공의 불규칙 경계점인 것 같습니다.
“그게 뭔데? 쉽게 설명 못 해?”
-실체와 가짜가 섞여 있는 불완전한 공간을 뜻합니다. 좀 더 쉽게 풀어 드리면 일종의 가상, 그러니까 꿈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기에 현실에 있는 것들은 이곳에 불러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꾸는 꿈과는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그럼 넌? 너도 일종의 스킬이잖아.”
-저는 주인님의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싶은 태정이었다.
제라드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에서는 스킬을 비롯한 각성과 관련 된 모든 것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하고 있던 태정이 무심결에 파일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잊고 있던 이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어! 이게 왜이래!?”
귀신이라도 본 듯 그녀가 파일을 붙잡았다.
그리곤 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 자기 난데. 지금 여기로 사람 좀 보내 줘야겠어. 뭔가 일이… 빨리 그냥 좀 보내 줘, 빨리!”
다급한 그녀의 말에 덩달아 태정도 다급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될 상황.
“내놔, 좀. 이 여자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있는 힘껏 파일을 힘으로 빼앗은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냅다 튀기 시작했다.
“어어!? 어! 안 돼! 거기서!”
허공을 둥둥 떠 문밖으로 향하는 파일을 보며, 그녀 역시 반사적으로 복도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단 것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입는 둥 마는 둥 가운만 대충 걸친 그녀가 다시 복도로 나왔다.
이미 파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그녀의 입에서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이수영에게서 파일을 뺏어 달아난 태정은 무작정 달리고 또 달리기를 반복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면 안 되기에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움직였는데, 곧 내부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외국어라 전부 이해를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영어라 대충 몇몇 단어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는데, 이후 울려 퍼진 사이렌과 맞물려 자신이 들고 있는 문건에 대한 것임은 단번에 눈치챌 수가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여길 빠져나가야 하는데.’
어차피 그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기에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충 이곳의 배경으로 보아 아직 각성자가 등장을 하지도 않은 먼 과거의 시대.
그를 볼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문제는 들고 있는 파일을 빼앗긴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다시는 손에 넣지 못할 확률이 컸다.
그는 현재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일반인의 상태기 때문이다.
파일을 빼앗고자 한다면 사람 두세 명만 달라붙어도 그대로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제라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방법이 없을까. 이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 말이야.”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줄곧 계산을 해 봤지만, 제가 가진 데이터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포기하긴 너무 아깝잖아.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제라드의 말을 빌리면 이 퀘스트의 선행 레벨은 700.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지금 들고 있는 이 문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닐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일이나 금사자 길드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일.
그는 얼떨결에 잡은 이 기회를 놓치기가 싫었다.
코너에 숨어 다방면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갤 돌리니 제복을 입은 다수의 외국인이 눈에 불을 키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동으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저렇게 발발거리고 뛰어오는 거야.”
태정의 입장에서 그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세상은 환상이공 속의 꿈같은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작 이런 거에 열을 내며 쫓아오는 것이 은근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뛰기 시작한 태정과 그를 쫓는 사람들 간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점점 늘어나는 인파와 덩달아 늘어나는 위기들.
그나마 신체 접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에겐 큰 위안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퇴로가 막혀 빼앗길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몸의 특성을 이용해 그 위기를 모면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괜히 만물의 영장이던가.
곧 게이트 입구마다 그물망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됐다.
그렇게 곳곳이 봉쇄되고 그는 어느덧 처음 들어왔던 연구소의 복도에 다다라 있었다.
이미 앞뒤로 구조물이 설치되어 조여 오고 있는 상황.
열심히 도망을 쳤지만, 결국 빠져나가질 못한 것이다.
‘이렇게 뺏긴다고.’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가로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검은머리 꼬마. 상황이 난처한 것 같은데 내가 좀 도와줄까?]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태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누구?”
[찾을 필요 없어. 넌 날 볼 수 없으니까. 그보다… 너 시리우스의 아이지?]
시리우스라는 말에 태정이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를 어떻게…….”
[이런 음흉한 기운을 가진 이는 72좌를 통틀어 시리우스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심연에 하옥됐지. 그리고 지금쯤 그 기간이 다해 풀려났을 테니,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또 무언가 작당을 꾸민 거야. 그게 바로 너일 테고. 꼬마, 안 그래?]
“다, 당신 뭐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너 지금 매우 곤란한 상황이지 않아?]
“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 두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그게 뭐지?”
[먼저 이곳에 갇힌 날 풀어 주는 거야. 너에겐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말해 줄 수 없어. 아직은 네게 그럴 만한 자격이 보이지 않거든.]
“그러니까. 일단 널 풀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네.”
[바로 그거야.]
“내가 널 뭘 믿고.”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인데. 넌 내 도움 없이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어. 평생을 떠돌아야 하지. 그러다가 딱 한 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와. 그때가 언젠지 알아?]
“……”
[바로 네 제삿날이야.]
“하. 지금 그런 것도 농담이라고 하나? 별로 재미없는데?”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야. 그런데 지금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인간들 걱정되지 않아?]
여자의 말에 태정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지금 그들은 어딨지? 무사한가?”
[아직까지는. 하지만 빨리 구하러 가지 않으면 다 죽을 거야. 이곳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어떡할래? 꼬마. 밖에 동료들 다 죽이고 평생 이곳에서 뺑뺑이만 돌다 생을 마감할래, 아니면 날 풀어 주고 너도 살고 동료들의 목숨도 살릴래. 선택은 네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