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망연자실한 태정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다솜은 자신이 올 걸 미리서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오전에 뿌린 그 정보는…….
‘함정이었나.’
무언가 생각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다가온 최다솜이 태정의 행색을 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아니길 빌었는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거야 네가…….”
말을 뱉던 태정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질문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너 내가 여기에 올 줄 몰랐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지금 이건 뭐야. 몰랐다면서 어떻게 네가 여기에…….”
“봤으니까.”
“……?”
“오전에 우리가 있던 그 빌딩. 상층이 숙소라고 했었지?”
“그런데.”
“발코니에 나와 있는데 창고 앞 건물에 네가 잠깐 보였다 사라진 걸 봤어. 확인을 해 보고 싶어서 들어온 건데… 그런데 정말 그게 너일 줄은 몰랐어.”
얘기를 들어 보니 그제야 조각이 맞춰지는 태정이었다.
창고에 진입을 하기 직전, 그는 스킬 타임을 맞추기 위해 잠깐 클로킹을 해제했었다.
최다솜은 바로 그 순간을 목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는 풀지 못했다.
“이제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기다려. 금방 풀어 줄게.”
“풀어 준다고? 그다음엔?”
“나가야지. 네가 여기 있는 거 알면 길드가 발칵 뒤집힐 거야.”
“그 말은 지금 그냥 보내 주겠단 말이야?”
“당연하잖아.”
최다솜은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끼워진 루비색 마석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태정을 두른 속박진과 공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그를 묶고 있던 금색의 밧줄이 하나둘 사라지며 속박진이 완전히 해제됐다.
“휴우. 다행이야 내가 비상키를 가지고 있어서. 다친 덴 없어?”
“딱히… 그런데 왜 이게 발동이 된 거지? 들어올 땐 분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복합 마법진이라서 그래. 창고 끝에 센서가 있는데, 거길 건드려야만 발동이 되거든. 원래는 양방형인데, 들어오는 쪽으론 아직 설치가 되지 않았나 봐. 일단 나가자. 내가 너무 오래 있으면 의심을 살 거야. 조용히 따라붙어.”
태정은 일단 최다솜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클로킹을 시전한 그가 그녀의 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4층 입구를 지키고 있던 어쌔신들을 볼 수 있었다.
“확인은 하셨습니까?”
“네. 인, 아웃 모두 확인했고. 아직 입구 쪽은 설치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군요. 신호가 오고 너무 늦으시기에 뭔가 잘못되신 줄 알았습니다. 걱정이 돼서 내려가 볼까 하던 차였는데 다행입니다.”
“계속 수고들 해 주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부대장님.”
그렇게 무사히 4층을 지나 입구까지 나온 최다솜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한적한 건물 틈으로 들어갔다.
“됐어. 나와도 돼.”
그녀의 말에 태정이 클로킹을 유지한 상태로 대답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뭐가?”
“내가 그곳에 왜 들어갔는지 대충 알 거 아냐.”
“혹시 창고에 있는 물건 가지고 나온 거야?”
그녀의 물음에 태정은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부인해 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녀의 반응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해. 네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그게 맞는 말이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좀 당황스럽네. 네 길드 일인데.”
“길드? 그런 건 상관없어. 나한텐 네가 더 중요하니까. 그보다 얼마나 가지고 나온 거야?”
“대충…….”
“대충?”
“다.”
“다? 거기 있는 거 다 가지고 나왔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태정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제 좀 심각하냐?”
“잠깐, 잠깐만.”
무언가 고심을 하는 것 같은 그녀.
그런 최다솜을 보며 태정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역시 넘어가긴 좀 그렇지?”
“그런 거 때문이 아냐. 다시 돌려놓을 순 없겠어?”
“이미 하나는 써 버렸어.”
“어떤 거?”
“네가 말했던 그거.”
“그럼 의미가 없는데… 잠깐 여기서 기다릴래?”
최다솜의 말에 태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수 없나 보네. 하긴 네가 날 봐주면 너도 곤란해질 테니까.”
“가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최다솜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태정은 이미 반 포기를 한 상태였다.
나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의 직급은 부대장이었다.
한 단체의 부대장이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리.
그런 그녀가 이걸 눈감아 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쭉 인연이 있던 사이도 아니고, 8년 만에 처음 본, 그것도 출세를 위해 자신을 버렸던 상대에게 기대할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혼자라면 쌩까고 도망이라도 가겠지만.
그렇게 했다간 이곳에 남아 있는 제닉스 길드의 식구들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하지만 기회는 오늘뿐이었어. 그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전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금 전 사라졌던 최다솜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혼자서 나타난 그녀.
그런 그녀가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있어?”
“여기.”
“후우. 다행이다.”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곧 품에서 둘둘 말린 스크롤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태정이 물었다.
“이게 뭐야?”
“탐색 무력화 스크롤이야. 떠나기 전까지 발각이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창고가 털린 걸 알면 길드장 성격에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거야. 없는 죄도 뒤집어씌우는 인간이니까. 12시간짜리야. 떠나기 직전에 사용해. 아마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태정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부처의 부대장이나 되는 인간이 신고를 해도 모자를 판에 범죄를 덮어 주고 후속 조치까지 해 주다니.
더군다나 그녀는 이곳에 무려 8년을 몸담지 않았던가.
“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알아.”
“알면서 이걸 눈감아 준다고? 아까 그 어쌔신들이 널 봤어. 이 야밤에 갑자기, 그것도 유일하게 창고에 들어간 사람이 너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네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 게 뻔한 일인데.”
태정의 말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뭘 다 알아서 한다는 거야.”
“그럼 이대로 가서 말해? 이거 걸리면 너 하나로 끝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는데. 나 때문에 괜히 네가…….”
“바보야, 이럴 땐 그냥 눈 한번 딱 감는 거야. 그리고 나 보기보다 꽤 잘나가. 너도 알잖아.”
“다솜아.”
“얼른 가 봐. 괜히 눈에 띄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최다솜은 자리를 떠났다.
저 멀리 희미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
그렇게 홀로 남은 태정은 손에 들린 스크롤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 뭐냐, 대체.”
태정에게 스크롤을 전해 주고 숙소로 복귀한 최다솜은 화장대 위에 올려진 액자를 바라봤다.
앳돼 보이는 태정의 모습과 더 앳돼 보이는 그녀의 모습.
8년 전 마지막 기념일에 찍은 사진이었다.
최다솜에겐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시간을 앗아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몸을 담고 있는 금사자 길드였다.
“미안. 어떻게든 돌아갔어야 되는 건데. 해 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네.”
* * *
미안함에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있던 태정은 눈을 질끈 감고 숙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최다솜의 말대로 이것이 빌미가 되면 전쟁까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
지금은 믿고 싶지 않아도 그녀가 괜찮길 믿어야 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건데.’
자책을 해 보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거기선 걸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 최다솜이 그곳에 나타난 것은 태정에게 천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빠져나온 것은 물론이고, 만일의 사태에 있을 검문에 대비해 스크롤까지 얻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의심이나 하고 앉아 있었으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태정이었다.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최다솜으로 인해 구사일생해 숙소로 돌아온 태정은 복도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코를 찌르는 낯선 향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미간을 찌푸리며 불을 켜는데 침대 위, 자고 있는 박세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보이는 3분의 1쯤 남은 양주 병과 젖은 수건들.
술을 마신 건지 부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술도 못 하면서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은 양주 병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알싸하면서도 터질 것 같은 화끈함.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도수가 강했지만,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남은 술을 다 때려 박았다.
그만큼 심란하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잠에 빠져든 그의 입에서 잠꼬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병신아, 거기서 걸리냐…….”
소파에 누워 그대로 뻗은 태정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보스, 보스, 일어나세요.”
“으음. 으윽. 뭐야?”
“아침 식사하러 가셔야 돼요. 어제 그 건물에서 먹는대요.”
“몇 시야?”
“7시요. 언제 들어오셨어요?”
“4시인가? 넌 준비 다 됐어?”
“네.”
“알았어. 씻고 나갈게. 먼저 내려가 있어.”
억지로 눈을 비며 정신을 차린 그는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한 뒤 로비로 내려갔다.
“얼른 오세요. 다들 버스에 탑승하셨어요.”
건물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김한수와 그 옆에 작전부 참모가 미소를 띠며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 시선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했지만 그는 같이 웃으며 인사를 건냈다.
“좋은 아침이네요.”
“좋은 아침이지. 자네, 허기가 몹시 지겠군.”
“예?”
“어디 좀 고프겠나. 힘을 그렇게 썼는데.”
“……?”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태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다시 김한수가 입을 열었다.
“자네, 은근 남자다운 구석이 있었어. 역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게 못 돼.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그럴 줄은… 정말 다시 봤네, 다시 봤어.”
“저…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공대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에헤이, 이 사람. 모른 척하지 말게. 어제 그 자리에 나도 있었는데.”
충격적인 그의 말에 태정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
“어, 어떻게 공대장님께서 그곳에…….”
“괜찮아. 괜찮아. 사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너무 자주 하진 말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우는 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뭐든 적당히가 좋은 거야, 적당히가.”
격려를 하는 그의 말에 태정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공대장이 그 자리에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