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방으로 복귀한 태정은 박세아를 불러다 물었다.
“너 그런데 아까 왜 그러고 있었던 거야?”
“뭐가요?”
“최다솜 말이야. 뭐 안 좋은 소리라도 하든? 왜 그렇게 기가 죽어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단지 높으신 분 같기도 하고. 보스 친구분이라고도 하시기에.”
“그럼 더 당당해야지, 넌 내 얼굴이나 마찬가진데. 여기 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어. 네가 실수할 사람도 아니고. 평소대로 하면 돼 평소대로. 어깨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좋아. 그래야 너답지.”
“그런데 아까 얘기를 들어 보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던데…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가 봐야 알겠지만 만약 다솜이의 말이 사실이면 불발인 거지, 뭐. 이건 만장일치로 생각이 다 같아. 물론, 그렇게 되면 저 깡패 놈들의 양아치 짓은 더 심해지겠지.”
“대책은 있구요?”
“없어, 지금은. 한 곳도 벅찬데 두 곳이면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상관없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나중에 배로 찾아오면 되는 거니까.”
현재 제닉스가 두 길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하이 레벨의 부재였다.
단신으로 대마법 방어진을 파괴하고 중견 길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초강자들.
이들 개개인의 전투력은 재해 레벨에 버금가기 때문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현재 무적과 금사자에는 각각 한 명씩의 하이 레벨 헌터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의 숫자는 대한민국을 통틀어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즉 영향력 또한 굉장히 크다는 뜻이었다.
이런 압도적 전력 차를 뒤엎으려면 답은 하나였다.
그들보다 더 강한 힘으로 눌러 버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잘 활용해야만 했다.
‘어차피 보나마나 협상은 실패야. 중요한 건 퀘스트다.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어떻게든 성과를 내서 나가야 돼.’
태정이 퀘스트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데, 눈치를 보던 박세아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분 말이에요.”
“어? 뭐? 최다솜?”
“네. 그분 보스와 예전에 연인 사이였죠?”
“왜? 그렇게 보였어?”
“보스를 바라보는 그분 눈빛이 그렇던데요.”
“그래? 난 모르겠던데. 오래전에 만났던 사이는 맞아. 근데 지금은 친구지.”
“진짜요?”
“그럼 가짜게? 설마 내가 옛 연인 때문에 길드를 배신한다는 뭐 그런 삼류 소설을 쓰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 다만…….”
“다만?”
“아니에요.”
“싱겁긴. 난 잠깐 눈 좀 붙일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 줘.”
“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는 그를 보며 박세아는 조금 전 최다솜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최다솜은 아직 유태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의 톤 그리고 몸의 떨림 등.
그 감정은 생생하게 박세아에게 전달 됐고, 심연 저편에서 왠지 모를 위기감이 찾아왔다.
그게 무엇인지는 그녀 또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와 오랫동안 함께했으면 좋겠단 생각이었다.
좀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지 그뿐인데, 그 그림에 있어 최다솜이란 인간은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띵동.
태정이 잠에 든 지 30분.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세요?”
“인솔자입니다. 로비로 나와 주십시오.”
간단한 통보만 하고 가 버린 그를 뒤로하고 박세아가 태정을 깨웠다.
그러자 선잠을 잔 듯 바로 눈을 뜬 그가 기지개를 펴며 중얼거렸다.
“나오래?”
“네. 로비로 나오시라고. 회담장으로 출발할 모양인 것 같아요.”
“드디어 만나는 건가. 읏차. 그럼 어디 어떻게 생겨 먹은 놈들인지 한번 가 볼까.”
로비로 나가니 간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자. 다 모이셨으면 버스에 탑승하겠습니다.”
인솔자의 말에 따라 사람들이 탑승하고, 가장 마지막에 있던 태정과 박세아까지 올라타자 버스가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리에 착석한 태정은 조용한 소리로 제라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부 스캔하고 있지?”
-예. 주인님.
“좋아. 하나도 빠짐없이 담을 수 있는 건 전부 담아야 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모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태정은 버스에 올라타기 직전 b6-1을 상공에 띄워 놓은 상태였다.
당장은 볼 수 없지만 제라드가 기억을 할 것이고, 그 이미지는 나중에 기체를 통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십오 분 정도가 흘렀을까.
속도를 줄이던 버스가 정차를 하고 인원들이 하차에 나섰다.
“음.”
그들이 내려선 곳은 의외로 건물이 즐비한 시가지였다.
제닉스의 중앙 지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와 그에 따른 엄청난 유동 인구들.
어딘지는 몰라도 큰 빌딩이 여러 개 있는 것을 보니 기관들이 있는 사무 구역인 것 같아 보였다.
“이곳입니다. 모두 두 줄로 따라오십시오.”
인솔자의 말에 사람들이 앞에 보이는 커다란 빌딩 건물로 들어갔다.
이미 내부는 정리가 되었는지 가릴 수 있는 명판이나 이름은 모두 가려져 있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도달한 제닉스 간부들.
가장 끝 방인 특별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모여 있는 상대편 관계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한번 힐끗 쳐다본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좌석에 착석했다.
태정의 자리는 길드장 바로 옆이었다.
좌측은 금사자와 무적. 우측은 제닉스.
상석은 자리가 비워져 있었는데, 그들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의 사내가 들어와 자리에 섰다.
“다들 반갑습니다. 한산도 정책부장 최무혁입니다. 따로 일어나실 필요는 없고, 이 자리는 양측 요청에 따른 평화적 협상 자리이니, 다들 그에 따른 예의나 매너는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단순 참관인의 자격으로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비서들이 수기 작성을 위해 한쪽에 섰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제닉스 길드장 양태식이었다.
“먼저. 요청에 의해 이곳까지 와 주신 한산도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제가 먼저 발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길드를 운영해 가고 있는 길드장으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 점에 대해선 여기 계신 두 길드의 마스터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가벼운 목례까지 덧붙인 정중한 사과에도 그들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만 끼고 있었다.
이미 예상한 반응.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공대장 이하 몇몇이 주먹을 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태정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 다르게 양태식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옆에 있는 보좌관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곳에 들어오며 유일하게 반입 허가가 된 물품.
그 안엔 5년에 한 번 매물로 나올까 말까한 희귀 마석인 실버크라운이 들어가 있었다.
상자를 열자 강렬한 은빛이 도는 실버크라운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저건…….”
“실버크라운이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어디서 난 거지?”
몇몇 이들이 반응을 보이자 양태식이 상자를 밀며 입을 열었다.
“이건 저희 길드에 하나 있는 발광석입니다. 세간에선 실버크라운이라 불리는 마석이지요. 약소하지만 화해의 의미로 가지고 왔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양태식의 말에 줄곧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금사자 길드 마스터 최철호가 등을 떼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 사건은 그런 어줍잖은 아이템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건 단지…….”
“받지 않겠습니다. 우리 금사자와 무적은 그쪽에서 저지른 일로 인해 전쟁까지 치를 뻔했습니다. 톱 티어에 든 2개의 길드가 전쟁을 치를 뻔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중견 단체의 수장께서 못 알아들으시진 않겠죠.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란 말입니다. 괜한 시간 끌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희가 원하는 건 딱 하나입니다.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을 넘기십시오. 그럼 사건을 종결하고 들어가 있는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최다솜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건 불가합니다. 실제 분쟁도 아니고 영지 전에서의 일로 길드원을 내어 달라니 그 무슨 황당무계한 요구입니까.”
참다못한 공대장의 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번엔 무적의 조영민이 입을 열었다.
“자네, 뭔가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이군.”
“이해? 이해를 할 만해야 이해를 하지. 영지전에서의 일을 바깥까지 끌고 나온다는 거 자체가 이해하지 못할 일 아닌가?”
“그런 거라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사례는 많지.”
“그래서 그게 법이라도 된단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저 깽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거리야.”
말이 격해지자 무적 길드의 1공대장 이경현이 호통을 치며 일어났다.
“네놈! 말이 심하군. 감히 공대장 따위가 길드장에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예의는 개나 줘 버렸나?”
“흥. 우리 마스터도 아닌데, 내가 왜?”
“뭐야!?”
순식간에 내부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명령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
잔뜩 격양된 분위기에 막 차무혁이 중재를 하려는데, 양태식이 조금 더 빨랐다.
“무슨 짓인가. 앉게.”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앉아. 왜 그러나 진짜. 부탁이네.”
잔뜩 흥분한 공대장을 자리에 앉힌 양태식은 다시 최철호를 향해 물었다.
“저희가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걸 주셔야겠지요.”
“말씀해 보십시오.”
“평창 단지나 제천 공장을 주시지요. 아. 저희는 둘이니 각각 하나씩 주시면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 같군요. 뭐 그 정도면 우리도 양보를 할 마음이 조금은 있는데, 어떠십니까. 저자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최철호가 태정을 보며 그리 말하자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도저히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팔을 양태식이 붙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게.’
‘하지만.’
‘알잖나. 이 상황에 자네가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건 없어.’
고개를 젓는 양태식에 뗐던 엉덩이를 다시 붙인 그는 불편한 심정으로 계속 협상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길드원이 마찬가지였다.
인사참모 및 전략부장들이 나서 몇 가지 대체 안건들을 내 봤지만, 이미 작정을 하고 나온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긴 어려웠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 진행된 오전 회담은 보기 좋게 결렬이 났다.
“저희는 뜻을 확실히 전달을 했으니,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식사들 맛있게 하시고 오후에 뵙도록 하죠.”
회담장을 빠져나간 이들을 뒤로 하고 갖가지 탄식이 이어졌다.
“하. 나 참. 저런 놈들하고 말을 섞고 있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입니다.”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런 요구를 해 올 줄은…….”
“더 해 봐야 의미 없는 것 아닙니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부정 섞인 말이 터져 나오자 태정이 일어나 미안함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그 무슨 나약한 소린가. 자네는 잘했어.”
“그래. 그런 마음 자체를 갖지 말게.”
“이게 자네 잘못이면 내 손목 하나를 자르지.”
“근데 기왕이면 몇 개 더 박살을 내 주지 그랬나. 못난 놈들하고는. 쯧쯧. 고작 성 2개에 쪼잔한 새끼들.”
하나같이 다 그를 옹호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새끼들. 두고 보자. 오늘의 이 부당함은 반드시 갚아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