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정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 차량 통제가 시작됐다.
앞줄부터 줄줄이 내려 모인 사람들.
그 사이엔 태정과 박세아도 있었다.
“다들 소지품 검사 있겠습니다. 한 분씩 신분증 제시하고 이쪽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중을 나온 인솔자의 말에 따라 하나둘 검사대로 향했다.
기본적인 소지품 검사부터 시간이 꽤 걸린 인벤토리 스캔까지.
모든 검사를 통과한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탔다.
시커먼 무언가로 가려진 창문.
그것을 본 간부들이 기가 찬다는 듯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창을 다 막아 놨군.”
“철저하기도 해라.”
“철장은 왜 달아 놓은 거야. 이건 뭐 범죄자도 아니고.”
“다들 조용히 하고 가지.”
길드장의 말에 웅성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윽고 차가 출발을 했다.
약 15분을 달려 그들이 내린 곳은 한 거대한 건물 앞이었다.
“이쪽으로 다들 오십시오.”
인솔자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각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태정은 박세아와 한 방이었다.
“돌아다니는 거야 자유지만, 건물 밖으론 나가는 건 불가합니다. 그럼.”
방을 배정해 준 사람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획본부장이 들어왔다.
“길드장님 방으로 좀 오지, 비서는 두고.”
“알겠습니다.”
양태식의 방은 한층 위의 중간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모든 간부가 모여 있었다.
“아. 왔나. 앉지. 자. 그럼 다들 왔으니 회의를 시작해 볼까.”
회의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이미 협상에 대한 것들은 길드에서 충분히 나누었고, 지금 모인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각자가 임무를 가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끝나셨어요?”
“어.”
“무슨 회의였어요?”
“별거 아니야.”
평소 같으면 말을 해 줬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회의의 내용은 유사시 각자도생.
비각성자인 비서나 기사 보좌관 등의 안위는 장담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는 쉽게 사람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특히나 그녀 같은 경우는 더더욱.
한동안 침대에 누워 박세아를 바라보던 태정이 벌떡 일어났다.
“좀 쉬어.”
“전 괜찮아요.”
“그럼 쉬고 있어.”
“어디 가시려구요?”
“본부장님한테. 따라오지 말고 쉬어.”
신신당부를 하고 밖으로 나선 태정은 본부장이 있는 방이 아닌 옥상으로 향했다.
다행히 옥상은 오픈이 되어 있었고, 주변으로 높은 건물이 없어 작업을 하기엔 안성맞춤인 상황이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 제라드, 준비됐냐. 최대 고도다.”
-예.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정이 b6-1 무인 폭격기를 소환했다.
그러자 1천 미터 상공, 점으로 찍힌 비행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기체를 소환한 그가 디스플레이를 띄우자 금사자 길드의 내부 전경이 실시간으로 전송됐다.
“일단 방공망에는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이래 가지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고도가 높은 탓에 정확한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충 눈대중으로 건물들을 유추해 가던 태정은 결국 명령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도를 좀 낮춰야겠어. 절반까지만 내려 보자. 만약 사이렌이 울리거나, 마법이 날아오면 바로 비활성 모드로 전환해 줘.”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허공을 배회 중인 b6-1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점점 더 뚜렷하게 잡히는 비행체의 모습.
그 만큼 디스플레이에 들어오는 정보도 선명해졌다.
-현재 b6-1 고도 1,640피트(500m)입니다. 스텔스 음소거 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좋아. 어디 한번 봐 볼까.”
태정이 있는 건물은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골드라이언이란 호텔이었다.
그 주변으론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상가 건물 몇 개와 중형 마트 하나가 쓸쓸히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제법 크게 난 사거리는 통제가 된 것인지 오가는 차나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뭐 유배지도 아니고. 완전히 오지에 떨궈 놨군.”
제대로 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남서 방향으로 십 리 정도를 내려갔을 때였다.
[6호 대 전투 훈련장]
[금사자 공용 도서관]
[금사자 3지구 경호대]
“여기가 3지구구나. 훈련장 앞에 사람 많은 거 봐라.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나? 제라드, 지금 다 녹화 뜨고 있지? 돌려봐야 될 거 같으니까. 전부 눈에 담아 놔.”
-알겠습니다.
3지구 쪽엔 딱히 이렇다 할 핵심 건물은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곳들을 돌며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5km의 수신 거리 제약 때문에 모든 곳을 돌아볼 순 없었다.
3지구와 동쪽에 있는 2지구의 초입만 겨우 훑은 상태.
기체와 폭격기를 동시에 회수한 태정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여기선 이게 한계야.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일단 내려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복도에 이른 태정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박세아와 함께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경 갑옷을 차고 있는 긴 생머리의 헌터.
협상단에 여성 헌터는 없었기에, 그는 금사자 길드의 인물로 추정이 됐다.
그런 그녀 앞에 고갤 떨구고 서 있는 박세아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기분이 상한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박세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동시에 긴 생머리를 돌아보며 거칠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신 뭐야. 뭔데 남의 비…….”
말을 내뱉던 태정은 순간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최다솜, 네가 여길 어떻게…….”
긴 생머리의 정체는 최다솜이었다.
그의 첫사랑이자 첫 이별을 안겨 줬던.
태정의 물음에 그녀가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건냈다.
“오랜만이지, 태정아.”
“뭐… 오랜만이긴 한데. 근데 여긴 왜?”
“너 왔다길래 겸사겸사. 석호한테 몇 번 연락했었는데.”
“아. 너무 바빠 가지고. 일단 왔으니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태정이 자리를 권하자 그녀가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러자 박세아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커피랑 차 뭐로 준비해 드릴까요?”
“됐어. 무슨 커피까지. 앉아 있어. 너 괜찮지? 커피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태정의 말에 그녀가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우리 한 8년 만인가. 금사자 소속인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신기하긴 하네. 잘 지냈냐?”
“응. 너는?”
“보다시피. 그런데 확실히 3룡 7기는 좀 다르네.”
“뭐가?”
“지금 여기 통제되지 않았나? 아무나 올 수 없을 텐데.”
“아, 그건…….”
“TV로 몇 번 봤어. 너 팬 되게 많더라. 석호한테 듣기도 들었지만 잘되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잘되긴 내가 무슨.”
“야. 욕심도 많다. 그 정도면 성공한 거지. 참. 너도 들었지? 이번에 한산도에서 참관인으로 오는 최무혁이라는 사람. 랭킹 10위권이라던데. 만나 봤냐?”
“아니. 전에 먼 곳에서 한번 본 게 다야.”
“그런 대단한 인물을 보기라도 한 게 어디야. 역시 다르긴 다르구나. 하긴 이곳에서 8년이면 너도 상당한 짬일 테니…….”
혼자서 말을 이어 가던 태정을 향해 그녀가 돌연 사과의 말을 건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태정아. 그때…….”
태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다솜아, 나중에 만나면 꼭 말해 주고 싶었는데.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너도 잘됐고 나도 나름 잘됐는데 굳이 과거 얘기로 사과하고 사과받고 이런 거 요즘 시대에 안 맞아. 그냥 현재만 보자. 8년 전 기억도 안나, 솔직히.”
“그래? 난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다솜아.”
“알았어.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면 그 얘긴 안 할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를?”
“우리 길드에서 내걸 조건이 만만치 않을 텐데.”
“뭐 좀 아는 거 있어?”
“금사자가 원하는 건 너야. 이 협상은 애초에 너를 타깃으로 준비된 거지.”
“알아. 생각 같아선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은데, 우리 길드 위해서 사과해야지. 충분히 감안하고 왔어.”
태정의 말에 그녀가 그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사과가 아니라 너라구. 너의 이적을 바란다구.”
“뭐?”
뜻밖의 말에 태정이 순간 피식하고 웃었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나의 이적을 바라? 여기 금사자에서?”
“이야기 나온 지 꽤 됐어. 너희 길드에 작업 들어갈 때부터.”
“웃기는 놈들이네. 너희 간부들 어디 모자란 거 아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네가 그 조건에 응하지 않으면 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 거야.”
“지금도 우린 충분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을 겪고 있어.”
“평창 마석 가공 단지, 원주 장비 제련 공장.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모두를 달라고 할지도…….”
“뭐? 이것들이 진짜…….”
태정의 얼굴에 짜증이 팍 치솟았다.
평창의 마석 가공 단지나 원주 장비 제련 공장은 제닉스 길드에 근간이 되는 핵심 자원 줄이었다.
둘 중 하나만 사라져도 길드가 휘청일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
한데, 그런 곳을 낼름하겠다니?
“그렇겐 절대 안 될걸? 우리가 서열이 낮아도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너희 지금 생각 잘못하고 있어. 그보다 나한테 이런 걸 왜 말해 주는 거야? 네 입장에서 우린 적 아닌가.”
“적… 이라구? 뭔가… 아픈 소리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네가 우리 편을 들진 않을 거잖아.”
“들 수 있어.”
“뭐?”
“난 너한테…….”
무언가 말을 뱉으려던 최다솜은 왼쪽 가슴에 빛을 내고 있는 보석에서 시선이 갔다.
호출을 알리는 신호.
망설이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 봐야겠다. 길드장 호출이야.”
그런 그녀를 향해 태정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그리고 정보 고마워. 하필 길드가 이런 식으로 엮여서 말이 좀 섭섭하게 나간 것도 있는데, 네가 이해해라. 우리 이것저것 봐줄 만큼 여유롭지 않아. 멀리 안 나간다.”
최다솜이 방에서 나간 직후.
태정은 양태식을 통해 간부들을 긴급 소집했다.
“뭐? 그게 사실인가?”
내막을 들은 1공대장이 차를 들다 말고 물은 말이었다.
“예. 확실한 건 아니지만, 옛 친구가 전해 준 말이라 쉽게 넘길 수가 없어서…….”
“이런 개자식들을 봤나. 그따위 걸 요구하려고 우릴 불러? 당장 돌아가시죠.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부터 이놈들은 협상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말도 안 되는 깽판을 친 것이지요. 톱 티어 어느 길드가 고작 외곽에 있는 중형 성 2개로 이렇게까지 꼬장을 부린단 말입니까. 짐 꾸리시죠.”
1공대장이 분기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인사참모가 그를 말렸다.
“자네, 왜 그렇게 흥분했나. 체통을 좀 지키게.”
“이게 지금 체통 따지게 생겼습니까. 지역대장을 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평창 단지나 원주 제련 공장 중 하나를 내어 주면, 길드 운영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곳으로부터 들어오는 운영자금이 전체 사업의 50%가 넘는 건, 저보다 참모님이 더 잘 아실 것 아닙니다.”
“알아. 아는데. 일단 얘기는 들어 보자는 거야. 지역대장도 확실한 오피셜은 아니라고 하지 않나. 이럴 때일수록 차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돼. 감정적으로 접근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 좀 앉게 길드장님도 계시는데.”
1공대장을 달래 자리에 앉힌 인사참모가 양태식을 향해 물었다.
“길드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도 참모와 같은 생각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야 없지. 모습도 보기 좋지 않을 테고. 그리고 협상이라는 게 원래 최악에서 시작을 하는 거야.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바뀔 수도 있단 말이지. 다들 준비한 것들은 잘 챙겼지? 우선은 기존에 준비해 온 대로 진행을 하는 걸로 하고 푹 쉬고들 있어. 꽤 힘든 싸움이 될 거 같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