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음 날.
박세아를 통해 금사자 본청에 대한 정보를 부탁한 태정은 지역대가 관리하고 있는 길드 내 1급 서고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지역대장님.”
“다름이 아니라 오늘은 창고 알람 시스템 점검 차 나왔습니다.”
“대장님이 직접 말이십니까?”
“알아볼 것도 있고 다른 분들은 워낙 일이 밀려서. 이럴 때 솔선수범해야죠.”
“역시.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보안팀원들을…….”
“아뇨. 저 혼자 해도 됩니다.”
“예?”
“간단한 점검인데 굳이 많은 인력이 필요하나요. 아무튼 수고하시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예. 그럼 고생하십시오!”
보안팀장을 따돌리고 창고 내부로 들어간 태정은 가장 첫 번째 시스템을 마주했다.
“이곳이 2급이라고 했지.”
평소 같으면 카드를 찍고 들어갔겠지만, 오늘은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가지고 있는 클로킹의 성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확인을 해 보려는 것이다.
입구에서 들은 말을 토대로 그가 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태정의 모습이 사라졌다.
곧장 걸음을 옮겨 보안 지지선을 건넜다.
적막만이 맴도는 창고.
“2급은 일단 통과.”
아이디 키를 이용해 첫 번째 문을 통과한 그가 두 번째 지지선 앞에 섰다.
이곳은 내부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보니 좀 더 높은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었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그가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척.
역시 적막만이 맴도는 창고.
이곳 역시도 별 무리 없이 통과였다.
클로킹을 제거하자 곧장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간 서 있던 그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창고를 빠져나왔다.
“일단 우리 쪽 최고 보안인 3급까진 통과 되는 것 같은데.”
제라드의 말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 3급까지는 클로킹이 먹히는 것 같아 보였다.
같은 3급에도 레벨이 나뉘어 정확하다곤 볼 수 없지만, 일단 어느 정도는 먹힌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적어도 일반적인 상황에선 들킬 일이 없을 것이다.
“알람 마법에 대한 부담은 어느 정도 덜었고. 이제 길드 구조를 알아야 하는데…….”
박세아에게 부탁을 해 놓은 그였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정보의 질이 중요하다 보니 그녀가 접근하지 못하는 곳을 따로 알아볼 생각.
하지만 그녀가 들어가지 못하는 자료실은 길드 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접근 레벨은 s1로 태정의 접근 레벨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답은 하나지.”
무언가 생각을 떠올린 그는 곧장 어딘가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해서 태정이 도착한 곳은 지역대와 아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략기획사업부였다.
길드에서 두 번째로 큰 정보 부대를 운영하는.
이들이라면 혹시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지역대장님, 오셨습니까.”
“네. 본부장님 좀 뵈러 왔는데. 계실까요?”
“아. 이거 어쩌죠. 조금 전에 인사참모님과 식사를 하러 가셨는데. 아무래도 나중에 오시거나 아니면 조금 기다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기다리죠.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죠?”
“물론이죠. 한두 번 오신 것도 아닌데요. 커피 들여보낼까요?”
“아뇨. 그냥 제가 하나 꺼내 먹을게요.”
본부장실에 들어간 태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음료 하나를 꺼냈다.
평소에도 늘 있던 일이라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대와 사업부는 거의 공생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겹치는 사업도 많은 데다 예산을 이곳에서 끌어다 쓰기 때문에, 그만큼 오고가는 일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다른 간부들보다는 좀 더 친밀감을 쌓을 수가 있었고, 이렇게 집무실까지 들어와 기다릴 정도로 편한 사이가 돼 버린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부장님 그림을 너무 좋아하시네. 또 하나가 늘었어.”
매번 올 때마다 늘어나는 그림이 신기한 태정이었다.
거의 벽 한편이 도배가 되어 있다시피 한 수준.
할 것도 없어 새로 생긴 그림이나 구경을 할까 일어서는데, 바로 옆 책상 위 파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쳐다도 안 봤을 테지만 파일명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금사자 무적 길드 1차 협상단]
“뭐야? 결국 가기로 한 건가? 근데 왜 우리 지역대엔 말이 없었지?”
내용이 너무 궁금했지만 타 부처의 서류를 차마 열어 볼 수는 없었다.
그대로 내려놓으려 하는데, 파일 밑에 있던 하나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금사자에서 보낸 서신인 것 같은데.”
오픈된 종이를 읽어 내려가던 태정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 내용이 자신과 깊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통곡의 강에서 봤던 그 성이 놈들 거였군. 어쩐지 이유가 없을 리가 없지.”
영지전 통곡의 강 근처에서 점령을 한 두 개의 성.
아무 생각 없이 쳤던 그곳이 바로 금사자와 무적 길드의 성이었다.
결국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협상안에도 태정을 꼭 포함시키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한데, 바로 다음 주인데 왜 나에겐 말을 안 해 준 거지?”
태정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본부장이 들어왔다.
“자네, 와 있었나?”
어색한 얼굴로 묻는 김택희 본부장.
그런 그를 향해 태정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가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이 서신 말입니다.”
“아, 그거.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야.”
급하게 자리로 가서 서류들을 서랍 안으로 집어넣는 본부장.
하지만 이미 본 것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저쪽에서 제 사과를 원하는 것 같던데요. 지역대에도 공문이 내려오지 않은 걸 보면, 혹시 저를 빼고 가시려는…….”
“솔직히 가 봐야 뭐 하겠나. 그냥 우리끼리 다녀오는 게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 뭐 그런 뜻에서인 거지. 신경 쓰지 마. 자네는 그냥 이곳에서…….”
“본부장님.”
태정이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자 평소 그의 성격을 알고 있던 김택희가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결국 마지못해 내용을 털어놓았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자네가 큰 죄를 진 것도 아니고,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뭐가 있나.”
“그럼 간부님들은 왜 가시는 겁니까. 결국 사과를 하러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좋게 풀어 보자는 뜻에서 그러는 거지.”
“그럼 더더욱 제가 가야죠.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이 저인데요.”
“이봐. 지역대장. 우리의 마음을 그리도 모르겠나. 자네 체면 세워 주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생각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사과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저도 이 협상단에 넣어 주십시오.”
“거참 사람하고는.”
“길드장님께 직접 가 말씀을 드릴까요?”
“후우. 아니네. 자네의 뜻이 정 그렇다면 이번 회의 때 한번 말을 해 보지. 그런데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인가.”
“아, 그게… 혹시 금사자 길드 본청의 자료가 좀 있나 해서 왔습니다. 내부 구조물의 위치라든가, 도면 뭐 이런 것 말입니다.”
“그건 왜?”
“그냥 좀 궁금해서…….”
“음.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따른 자료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네. 우리도 이번이 처음 방문인 데다, 하는 짓은 양아치여도 명색이 톱 티어에 드는 길드가 아닌가. 보안이 워낙 철저해 그곳에 대한 정보는 알 수가 없어.”
“역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거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기획본부를 빠져나온 태정은 건물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오히려 나한텐 잘된 일이야. 털기 전에 미리 견학 정도 가는 셈 치면 되는 거니까.’
그가 협상단에 포함시켜 달라 한 것은 단순히 대가리를 숙이고 오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정보. 그에겐 정보가 필요했다.
단기간에 강력한 스킬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금사자 본청에 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외부인의 자격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그 단서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지금 하는 사과야 나중에 몇 배로 받아 내면 되는 것이고.
“협상은 이틀에 걸쳐 2번이야. 최대한 많은 걸 담아 와야 돼.”
태정이 기획본부를 다녀간 지 삼 일째 되던 날.
정기 회의 때 태정의 참석이 결정됐다.
길드장과 총대장이 따로 불러내 몇 번이고 말렸지만, 그의 의지를 꺾기는 힘들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자신으로 인해 길드가 피해를 봤으니, 그게 보편적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책임은 응당 져야 하는 것이 같은 길드원으로서의 도리였다.
물론. 겸사겸사 정보도 얻을 겸 말이다.
협상단이 꾸려지고 출발 하루 전날.
“너도 가?”
짐을 챙기고 있는 박세아를 향해 물은 말이었다.
“당연히 가야죠. 제가 안 가면 누가 보스를 보필해요.”
“보필이라. 그게 맞는 건가.”
“네?”
“아냐. 그럼 내일은 오랜만에 차를 타고 가겠네.”
“네. 참. 이거 반입 금지 품목이거든요. 한번 보세요. 인벤토리도 스캔 한다고 하니 인벤토리도 비우셔야 돼요.”
박세아가 건넨 메모장을 받아 든 태정은 대충 한번 슥 훑으며 다시 그녀에게 건냈다.
품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전자 기기와 그에 준하는 장비들.
이를 테면 카메라나 녹음기 광역 3d 스캐너 같은 것이었다.
여기엔 마석 장비들도 포함이 되는데, 태정에겐 모두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어차피 그에겐 이런 장비들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난 제라드라는 인공지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자 볼까.”
다음 날 아침.
박세아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온 태정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김형식의 차에 올라탔다.
그간 날아다니느라 도통 탈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타니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15분이요. 출발할까요?”
“가자.”
“기사님 출발해 주세요.”
“예.”
집합 장소인 광장에 들어서자 삐까번쩍한 시커먼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들 차에서 내려 인사를 나누고, 인원 점검까지 마친 그들은 서열 순으로 길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그곳에서 절대 하면 안 될 행동들이 있어요.”
“알아. 충분히 숙지했어.”
“휴대폰은 사용을 할 수가 없으니까. 어디 가실 때 꼭 말씀해 주시구요.”
“어차피 행동반경도 좁다면서. 하여간 지들이 불러 놓고 따지는 건 또 많아요. 근데 너 화장이 오늘 너무 짙은 거 아니야?”
“네?”
“평소보다 과한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입술이라도 좀 지워. 그러다 그 깡패 같은 놈들이 네 미모에 반해서 눌러앉으라고 하면 어떡할래.”
갑자기 쑥 들어온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가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고. 난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모두 무사히 복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니까.”
“아, 알겠습니다.”
시간은 흘러 차가 목적지 근방에 도착을 했다.
점점 속도가 줄어드는 차량들.
“앗. 저기인가 봐요.”
줄곧 화장을 정비하던 박세아가 왼쪽 사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엄청난 높이의 방벽과 함께 거대한 금사자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헌터가 되기 전 지나가면서 몇 번 봤던 성처럼 지어진 건물.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며 투덜거리던 그의 불알친구 석호의 말이 언뜻 기억나는 태정이었다.
‘내가 저곳을 들어가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