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접시같이 솟은 거대한 기둥 위.
흑색의 시커먼 물체가 잠에서 깨듯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좌우로 족히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일 법한 커다란 날개와 태정의 몸뚱이는 되어 보일 법한 시뻘건 적색의 눈.
마치 포효를 하듯 고개를 쳐들어 기세를 뿜어내던 놈이 날개를 접고 태정을 내려다봤다.
[무식한 인간, 이제 보니 500레벨이 되지 않았군.]
“너는…….”
[흑룡 아라곤. 다른 말로는 용계의 일곱 빛이라고도 부르지.]
흑룡 아라곤.
통합 차원에서 일곱 빛으로 불리는 칠용신 중 하나였다.
태초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아주 먼 고대의 종족으로 한때는 차원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차원 깡패 중 하나.
천계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하던 아라곤은 성도 72좌의 분노를 사 오딘에게 쫓기는 신세였는데,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해 이곳에 숨어들었고 그 대가로 인해 봉인을 당하게 된 비운의 용신이었다.
그가 왜 비운의 용신인가.
당시만 해도 그는 금방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을 단순 도피처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타이칸의 테스트 행성이었고, 그를 이곳에 끌어들인 건 72좌의 계략 중 하나였다.
결국 그는 비교적 가볍게 치를 수 있던 죄값을 이곳에 들어옴으로 인해 영원히 갇히게 된 신세가 된 것이다.
“혹시… 몬스터인가?”
태정의 물음이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는 몬스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몬스터? 나를 그런 저급한 놈들에 비유를 하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순간적으로 엄청난 살기가 태정의 몸을 짓눌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압박감.
급히 그가 해명을 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쳇. 내가 여기 앉아 인간 따위에게 이런 취급이나 받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너의 그 무식함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어. 벽을 뚫을 생각을 하다니. 그런 식으로 들어온 놈은 이곳이 생긴 이래로 네가 처음이다.]
“그래? 워낙 복잡했어야 말이지. 대체 어떤 규칙을 심어 놓은 거야?”
[규칙? 그딴 건 없다, 인간.]
“없다니? 그럼 길을 어떻게 찾으라고? 설마 그 많은 곳을 하나하나 다 돌아봐야 한다는 건가.”
[멍청한 질문이군. 이곳에 있는 입구가 몇 개인데. 그 짓을 하고 있나. 초요석을 통해 각성을 한 인간은 500레벨이 되면 미로 탐색 스킬을 얻게 설계가 되어 있지. 그래서 누구나 쉽게 출구를 찾을 수가 있다. 하지만 넌 운이 없게도 해당 레벨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로 들어왔어. 해서 난 네가 당연히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리 보게 되니 정말 흥미롭군. 역시 인간은 잔머리가 좋아.]
“뭐야, 그리도 간단한…….”
해답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태정이었다.
분명 공식이나 규칙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뭔가 대단히 복잡한 것일 거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슈퍼컴퓨터에 준하는 제라드도 쉽게 알아내지 못한 것이니까.
그런데 단순 스킬이라니.
지난 10일간 별의별 상상을 하며 개고생을 하던 것이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전 퀘스트를 너무 일찍 클리어 했나 보군. 그래,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퀘스트에 따로 뭘 잡으라는 말은 없었는데 말이야. 일단 나온 대로 널 만나긴 했는데…….”
태정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아라곤이 심기 불편하다는 듯 대답했다.
[너 근데 말투가 좀 거슬리는군. 이곳에 온 인간들은 전부 내 앞에서 존칭을 썼었는데 말이야. 고개를 그리 빤히 쳐들고 있는 것도 영 불편해. 죄다 바닥에 엎어져 벌벌 떨었는데.]
아라곤의 말에 아차 싶은 태정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난 네가 좀 친근하게 느껴져서 하하. 지금이라도 엎어질까?”
[흥. 엎드려 절 받기는 집어치워라. 자, 그럼 이제 말을 해라. 무엇이 알고 싶지. 어떤 것이든 하나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 주마.]
“질문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그의 말에 태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아라곤이 거대한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티이란의 보물을 얻지 못했나.]
“티이란이라면… 아, 설마.”
티이란의 보물.
그가 히드라를 죽이고 얻은 아이템이었다.
생소한 단어가 적인 양피지.
생생히 기억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제라드를 불러냈다.
“그때 내가 저장하라고 한 거. 전부 읊어 봐.”
-12차원, 시리우스, 파라만 제도, 72좌, 대리자들, 지켜보는 눈입니다.
“좋아. 이중에 하나를 물어볼 수 있단 말이지.”
태정은 신중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한 번.
이중에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봐야 한다.
하나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단어 하나를 선정했다.
“시리우스. 시리우스에 대해 알려 줘.”
자신을 각성시킨 미지의 생명체였다.
그나마 목소리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
태정은 그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라곤에게서 나온 반응이 이상했다.
[시리우스? 그게 왜 궁금하지?]
“왜 궁금하냐니. 하나 물어보라했잖아.”
[그러니까. 거기서 왜 시리우스가… 설마 네놈.]
“……?”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정을 향해 아라곤의 눈이 번뜩하고 떠졌다.
그리곤 한참을 스캔하더니, 이내 놀랍다는 듯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이럴 수가. 시리우스가 개입을 하다니. 시리우스가…….]
“그게 무슨 소리야?”
태정의 물음에도 아라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놈이 판을 벌였다 이 말이지. 그렇군. 성도에서 밀려난 복수를 하기 위해서야. 흐흐흐.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놈이 돌아왔다… 놈이 돌아왔어.]
이제는 혼자 기이한 웃음소리까지 내는 아라곤이었다.
그런 그에게 태정이 다시 한번 물었다.
“저. 성도는 뭐고 판은 또 뭐야? 복수는 또 뭐고?”
[그건 네놈이 알아선 안 되는 것들이다. 시리우스에 대한 것도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대답을 해 줄 수가 없다.]
“아니, 방금 하나를 말하라고…….”
[했지. 하지만 네놈이 시리우스의 전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내가 그에 대한 답을 내놓고 퀘스트가 완료되면 그 데이터가 성도의 중앙시스템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나?]
“……?”
[넌 죽게 될 거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그게 무슨…….”
[쉽게 말해서 넌 이곳에 존재하지만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란 소리다. 아주 교묘하게 다른 존재로 위장을 하고 있지. 네 진짜 모습은 지금 세상에 드러나선 안 돼. 내가 말을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위험해.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카산드라의 천공탑은 지금부터 3년 후 대지에 내려앉을 것이다. 피의 축제가 시작되는 그 첫날. 하나의 대륙이 사라진다. 그 시기는 절기 중 20번째. 일몰이 지기 직전이다. 이에 대한 정보는 오직 이곳에 있는 자만이 가지고 있어야 하며, 발설 시 모든 퀘스트가 종료됨은 물론 각성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 뭔… 내 질문은 그게 아닌…….”
제멋대로 말을 하는 아라곤을 향해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태정은 뒤이어 들려온 알림음에 입을 닫았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태극 1호 스킬을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R타입 이레이저 건을 획득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오픈됩니다.]
“이봐. 천공탑이라니? 피의 축제는 또 뭐야? 좀 알아듣게 얘기를…….”
[항상 입을 조심해라, 인간. 네 머릿속에서 지금 들었던 말을 지워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망각의 메모라이즈를 이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난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이걸 받아라.]
태정의 앞으로 주먹만 한 보석이 하나 떨어졌다.
그걸 주워 든 그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뭔데?”
[내가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라고 해 두지. 꼭 성공해라, 인간. 네놈이 성공을 해야 나 또한 다시 지상의 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건투를 빌지, 시리우스의 전인이여.]
말을 끝으로 태정의 시야 한가득 엄청난 섬광이 솟구쳤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팔이 절로 올라가 눈을 가릴 정도였는데, 다시 그 팔을 내렸을 때 그는 미궁이 아닌 게이트가 보이는 시가지에 서 있었다.
동시에 또 다른 알림음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험의 지혜를 얻으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미로 탐색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
[B6-1 무인 폭격기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
[다목적 제노 블라스터 스킬이 오픈되었습니다.]
레벨 업과 함께 오픈된 스킬들.
태정은 조금 전까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보석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여러 일을 한꺼번에 겪은 태정은 멍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바라봤다.
뭔가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은데,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라드, 너도 다 들었지?”
-그렇습니다.
“나보고 시리우스의 전인이라고 그랬어. 그가 무슨 장치를 해 놓았다는 것도 대충은 알겠고. 근데…….”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으려던 태정은 순간 흠칫하며 입을 닫았다.
아라곤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 그럼 질문에 대한 아라곤의 대답도 들었냐?”
-카산드라의 천공탑 말씀이십니까.
“오. 너는 알아도 상관없는 거야?”
-저는 주인님과 한 몸입니다. 정신적으론 공유가 되어 있지 않지만, 스킬이란 데이터에 묶여 있어 하나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 저에겐 해당 제약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군. 근데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한 거지? 난 묻지도 않았는데.”
-원래 물어야 했던 것이 천공탑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 그런데 그걸 알고 있었으면 시리우스가 왜 굳이… 혹시 아라곤에게 힌트를 남긴 건가. 날 알아보라고?”
-그랬을 확률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돌아가서 정리를 좀 해 봐야겠어. 배가 고파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만 10일 만에 길드로 복귀한 태정은 시간이 너무 늦어 신고만 한 후 그대로 숙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막 자려고 준비 중이던 박세아가 깜짝 놀라며 그를 맞이했다.
“엄마야, 보스 맞아요?”
“그새 내 얼굴도 잊어 먹었어?”
“잊어 먹다뇨.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걱정을 왜 해, 내가 애도 아니고. 난 그렇게 쉽게 잘못되지 않는다구.”
“그런 뜻이 아니라… 참. 자리에 없으신 동안 길드가 발칵 뒤집혔었어요.”
“왜? 그놈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아뇨. 보스 때문이죠.”
“내가 왜?”
“휴가 나흘짜리 끊어서 나가신 분이 10일 동안 복귀를 하지 않고 계시니, 다들 걱정이 안 되겠어요? 총대장님을 비롯해서 몇몇 간부님은 금사자나 무적 길드의 소행이라고 쳐들어가실 기세였다구요. 그 문제로 오늘 간부 총회의까지 있었는걸요.”
“그래? 일단 입구에서 신고는 하고 왔는데. 일이 너무 길어져서 말이야. 또 면목 없게 생겼네. 아, 혹시 소영이 한테도 얘기했어?”
“아뇨. 좀 더 지켜보다가 얘기하려고 했어요.”
“잘했어. 그 녀석은 조금만 일이 있어도 걱정이 한 짐이거든.”
“그보다 얼굴이 왜 이래요? 밥도 못 먹은 사람처럼.”
“그래 보였다면 아주 정확히 본 거야.”
“네?”
“혹시 남은 밥 좀 있나?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