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말 그대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1-5를 통해 1-4로 들어왔는데 1로 시작하는 통로가 없다는 건 무언가 복잡한 규칙이 존재하고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라드.”
-예, 주인님.
“처음부터 지금까지 본 숫자들 다 기억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뭔가 대입해 볼 만한 게 없을까. 이를 테면 수학 공식이나 규칙 같은 거 말이야.”
-그러기엔 현재 들어와 있는 데이터가 너무 부족합니다.
“좀 더 돌아봐야 된다는 소리네. 그럼 지금부터는 단서가 잡힐 때까지 직진만 해 보자.”
이때부터였다.
태정이 오직 한길만을 내달린 것은.
그의 예상대로 공간이 넓어질 때마다 통로는 2개씩 추가가 됐다.
10개에서 12개. 12개에서 14개. 14개에서 16개.
숫자는 여전히 뒤죽박죽이었고, 그렇게 몇 시간을 달리자 통로는 순식간에 20여 개까지 불어나 있었다.
여전히 어떠한 규칙도 공식도 나오지 않은 상황.
슬슬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추가된 999일과 계속해 늘어나는 끝이 없는 미로.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막막함이 그를 엄습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직진을 해 나가기도 잠시.
“막혔어.”
처음으로 막힌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이다 보니, 왠지 단서가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힌트가 있을까 싶어 벽을 이리저리 살피던 태정은 이내 실망한 눈치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그냥 단순한 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 나와 다시 통로 하나를 선택한 그는 무작정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벌써 18시간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직 출구만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기어이 20시간을 채우고서야 기체를 공간 구석자리에 주차했다.
현재 통로는 총 30개.
오면서 막힌 곳은 세 곳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
더 하려면 더 할 수도 있었지만, 뭔가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다.
이대로 계속한다 해도 출구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집에서 챙겨 온 비스킷과 음료 등으로 대충 배를 채운 태정은 제라드에게 경계를 맡기곤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으음.”
태정의 눈이 번뜩 떠지며 본능적으로 좌우를 살폈다.
동시에 몸이 기체 안에 있음을 깨달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벌써 일어나신 겁니까.
“내가 잠든 지 얼마나 됐지?”
-3시간 30분입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하루였지만 태정은 한 가지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여긴 몬스터가 없나 봐. 여태 너도 느끼지 못했고, 레이더가 구식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전혀 뜨지 않잖아. 더군다나 들어와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본 적이 없으니.”
사냥을 하며 이렇게 조용한 던전은 처음이었다.
분위기만 따지면 굉장한 놈들이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기이한 던전.
그 생각은 이틀째도 변함이 없었다.
“벌써 56개까지 늘어났어. 이거 이러다 무한대로 늘어나는 거 아냐?”
정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로를 지나면 지날수록 공간은 커지고 입구 역시 늘어났다.
혹시 몰라 백을 해 봤지만 그마저도 큰 의미는 없었다.
“오늘은 막힌 곳이 두 곳이었어. 보통 다 막혀 있고 출구 하나만 열려 있는 게 정상 아닌가? 그렇지 않아, 제라드?”
-보편적인 미로는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좀 이상하잖아.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쳐. 근데 어떻게 막힌 곳보다 열린 통로의 늘어나는 개수가 훨씬 많을 수가 있냐는 거지. 여기 중 하나를 들어가면 또 2개가 늘어난단 말이야. 어딜 들어가도 마찬가지고. 이걸 대체 어떻게 찾으란 거야?”
이 공간에서 그는 백을 8번이나 쳤다.
그중 막힌 곳은 두 곳이고 열린 곳이 여섯 곳이었다.
그 여섯 곳의 통로는 똑같이 2개가 늘어난 58개.
이래선 끝이 날 수가 없는 구조였다.
시간은 흘러 던전에 들어온 지 만 사흘.
태정은 아직도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여전히 단서나 힌트는 발견을 하지 못한 상태.
이제 통로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공간 또한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는데,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왜 사람들이 이곳에서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깨달았다.
하이 레벨에 근접한 팔라딘조차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강력한 몬스터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굶어 죽은 거야, 이렇게 헤매다가.”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직접 돌아보니 더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100명이 파티를 맺고 들어와도 나갈 수 있을지가 의문일 정도.
그렇다면 다른 아홉 명은 대체 무슨 수로 이곳을 빠져나간 것일까.
이 또한 짙은 의문이었다.
“챙겨 온 식량도 곧 바닥인데…….”
처음 퀘스트의 제한 시간은 3일이었다.
해서 식량 또한 많이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
아껴 먹는다 해도 앞으로 일주일을 버티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시작한 태정은 블라스터를 이용해 이동속도를 배로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답이 없는 지금 그가 믿을 건 하나.
속도전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또다시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제길.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제라드, 아직도 없어? 물리 공식이나 수학 공식이나 아무것이라도 좋으니까…….”
-죄송합니다. 현재까지 들어온 데이터로는 특이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대론 굶어 죽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뭐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 됐다. 말을 말자. 이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돌아서 말을 중얼거리던 태정이 순간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다시 몸을 돌려 막다른 길을 바라봤다.
“이거 근데 두께가 얼마나 되지?”
-알 수 없…….
“당연히 그러시겠지. 하나하나 쌓아 올려진 걸 보면 딱히 그렇게 견고해 보이진 않는단 말이야.”
말을 중얼거리던 태정이 돌연 기체를 소환했다.
동시에 뒤로 물러선 그가 다연장 로켓포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제라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보면 몰라. 한번 뚫어 보려는 거지. 그래도 이곳까지 오면서 본 구조물의 데이터는 있지? 어때? 여기서 이걸 사용하면. 무너지겠냐?”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이곳이 무너지려면 적어도 5등급 이상의 벙커버스터나, 소형 핵탄두 정도는 떨어져야 할 겁니다. 그것도 제한된 구역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로켓포로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한번 조져 보자.”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거리를 좀 더 벌리며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동시에 전방을 향해 포신을 조준한 그가 발사 버튼을 눌렀다.
슈아아악! 슈악!
차례대로 쏘아지던 로켓이 그대로 벽과 함께 충돌을 일으켰다.
쾅! 콰쾅!
엄청난 굉음이 일며 피어오른 먼지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성공인가?”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먼지 속으로 발을 옮겼다.
환기가 되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조금씩 전진을 하던 그의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아무래도 떨어져 나온 잔해인 것으로 보인다.
장애물로 인해 기체가 더 나아갈 수 없자, 근접형으로 바꾼 그가 잔해를 넘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내딛기도 잠시.
곧 연기가 걷히며 길게 뻗은 통로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가로막고 있었던 벽이 완벽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진짜 뚫렸네.”
서바이벌이 생각나 해 본 것인데, 진짜로 벽이 뚫려 버렸다.
그 너머로도 통로는 계속 이어져 있었다.
태정의 직감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냥. 그게 생각났거든. 우리 잘하던 거 벽뚫신공 있잖아.”
-흥미롭군요. 그걸 여기에 접목시킬 생각을 하시다니.
“흥미로운 게 아니야. 인간이면 당연한 거지. 오히려 늦은 거야. 진즉에 해 봤어야 했는데. 그놈의 규칙이니 뭐니 찾는다고. 아무튼 이제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진짜 한길 직진만 한다. 이렇게 끝까지 가다 보면 결국 출구도 나올 수밖에 없을 거야.”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이동을 시작한 태정은 그때부터 쭉 한길로 내달렸다.
이제와 다른 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슈아아악! 쾅! 콰쾅!
또 하나의 벽이 무너지며 길이 형성됐다.
벌써 11개째.
늘어난 통로는 대충 계산해 300여 개가 넘을 것이다.
사실 시간이 아까워 그는 세어 보지도 않았다.
정확히 나온 곳과 마주한 통로 외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고, 아예 통로에서 쪽잠을 잔 그는 인벤토리에 남은 초코바와 물을 바라봤다.
“아껴 먹으면 대충 5일. 그 안에 무조건 출구에 도달해야 돼.”
기지개를 한번 편 그는 자신의 두 뺨을 때리며 기운을 차렸다.
그리곤 한층 맑아진 눈으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과 다르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태정이 느끼는 불안은 커져만 갔다.
다른 요소를 다 재끼고 선택한 자신의 판단이 혹 틀리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과 이 미로의 규모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해 주어진 식량으론 턱도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길드에 있는 동생과 사람들을 생각했다.
‘난 무조건 나가. 무조건 나간다.’
태정이 벽을 뚫으며 한길만을 고수한 지 벌써 나흘.
이제 남은 초코바는 3개밖에 없었다.
허기진 배를 만지며 초코바 하나를 입에 문 그는 반을 먹은 후 다시 반을 종이에 싸 넣었다.
이미 아껴 먹어 왔기에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좀 더 시간을 벌려면 식량을 아껴야 했다.
그나마 그가 메카닉 유저라 기체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최소한 체력으로 인한 칼로리는 소비가 되지 않으니까.
“하. 김치찌개 먹고 싶다. 진짜 그거 하난 끝내주게 잘했는데. 아니, 다 잘했지, 다.”
일주일째 굶다시피 하고 있으니, 박세아가 해 줬던 집밥이 그리운 태정이었다.
지금쯤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뜬금없이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마저도 배고픔에 금방 잊혀졌다.
“또 가 보자.”
힘없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세대 기체인 프로텍터 아머의 가장 큰 단점은 자동 운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만 가능해도 자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모두 이동에 몰빵 할 수 있을 텐데.
새삼 네비게이터의 크루즈 기능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태정이었다.
그렇게 비몽사몽 한 모습으로 나아가길 한참.
드디어 그의 눈앞에 처음 보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의 끝에 보이는 푹 꺼진 지반.
순간적으로 눈이 번뜩 떠진 그가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것은 어딘가로 연결이 된 계단이었다.
“이거 봐. 계단이 나왔어.”
약간은 상기된 태정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10일간 똑같은 곳만 뺑뺑이를 돌던 그였다.
그 흔한 몬스터 한 마리를 보지 못했으니, 그로 인해 생긴 외로움과 막막함은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나온 이 새로운 구조물이 너무나도 반가운 것이다.
계단의 폭이 좁아 기체를 집어넣은 태정은 곧장 아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어느 순간 계단은 끝을 드러냈고, 다 내려와 대지를 밟은 태정은 실로 엄청난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시커멓게 칠해진 거대한 크기의 괴수.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본 그 어떤 몬스터보다 월등히 큰 동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순간 엄청난 위압감에 휩싸인 그가 장비를 꺼내려는데, 허공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무식한 녀석이군. 설마 이렇게 들어올 줄이야.]
드드드드드.
땅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