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저녁을 먹고 커피 한잔을 하고 있을 무렵.
설거지를 마친 박세아가 깜빡했다는 듯 가지고 온 자료를 넘겼다.
“미로의 정보는 이게 다예요. 아무리 찾아도 자료가 거의 없더라구요.”
“기밀 서고까지 가 봤어?”
“물론이죠. 한번 보세요.”
자료를 넘겨받은 태정은 어떤 던전인지 파악하기 위해 파일철을 넘겼다.
그렇게 별로 되지 않는 글을 쭉 훑어 내려가던 태정이 이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중얼거렸다.
“여기 들어갔다 나온 헌터가 열 명도 되지 않아?”
“해외 사례는 찾을 수가 없어서, 국내는 공식적으로 아홉 명이에요.”
“그것도 전부 히든이네.”
“네. 그래서 혹시 인터뷰나 자료 제공을 한 게 있나 봤는데, 신기할 정도로 없더라구요.”
“한데. 그런 곳이 왜 블루 11급이야. 이거 난이도가 잘못된 거 아냐?”
이상한 일이었다.
국내에서 단 아홉 명밖에 클리어 하지 못한 던전이 고작 블루급이라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박세아가 의문을 풀어 줬다.
“페이지를 넘겨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곳을 다녀온 히든의 레벨이 전부 500대 근처에요. 아마 그 레벨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 같아요.”
“500 근처라. 그런데 여기 900레벨 팔라딘도 들어갔다고 나와 있는데, 이건 무슨 소리야. 이 사람은 어떻게 됐어.”
“그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900레벨이 클리어를 못 했다? 좀 이상한데. 아무리 히든이 날고 긴다 해도 400레벨 차인데. 갭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일단 제가 조사해 온 자료에는…….”
“일단 알겠어. 일 봐. 난 들어가서 생각 좀 해 봐야겠어.”
방으로 들어온 태정은 한동안 뚫어지게 자료를 쳐다봤다.
“일반 900은 실패인데 히든 500은 성공이라… 이게 말이 되나? 이렇게 따지면 나도 900에 근접한다는 소린데. 메인 격전지에서 봤던 그들보다 내가 더 강하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본성으로 들기 전 메인 격전지에서 봤던 헌터들의 능력은 가히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곳에서 봤던 사람들이 900레벨대의 헌터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낮았으면 낮았지 높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900레벨 이상 되는 헌터는 채 20명이 되지 않으니까.
“클럽에 문의를 해 봐야 하나.”
자료에 나와 있길 클리어를 한 아홉 명의 헌터들은 모두 톱 텐에 들어가 있는 이들이었다.
서진이나 한설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밀리에 활동을 하는 그들의 성격상 이곳을 다녀왔을지도 모르는 일.
“아무래도 길드장을 한번 봐야겠는데.”
휴가 기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복귀한 태정은 그간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박세아가 대부분의 일을 모두 정리해 놓았기에, 그가 할 일은 딱히 많지 않았다.
“나 잠깐 본청에 다녀와야겠어.”
“채비할까요?”
“아니, 혼자 다녀올게. 넌 여길 지켜.”
“네. 그럼 다녀오세요.”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양태식이 있는 본청 건물로 이동했다.
태정이 들어가자마자 양태식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를 반겼다.
“오. 우리 길드의 자랑스러운 영웅.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인가.”
“영웅이라니, 부끄럽습니다.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요.”
“에헤이. 이 사람 겸손하고는. 아무튼.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나.”
“혹시. 클럽과 연락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초인클럽을 말하는 건가?”
“예. 뭐 좀 물어볼게 있어서요.”
태정의 말에 양태식이 난감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음.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클럽은 우리 쪽에서 연락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데.”
“아. 길드장님도 연락이 안 되시는군요.”
“항상 연락은 그쪽에서 하니까. 게다가 통신으로는 연락을 해 본 적이 없어. 전에 자네가 이곳에 넘어왔던 날을 기억하나? 매번 연락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네. 그래서 연락처는 물론이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지. 난 그래도 자네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히든에서 추천까지 받은 사람이 아닌가.”
“저는 뭐 거의 낙하산이라.”
“어허. 낙하산이라니. 자네가 낙하산이면 어디 길드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겠나.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혹 누가 자네보고 낙하산이라고 그러던가? 그렇다면 바로 말하게. 내 당장 경을 칠 테니.”
“아닙니다. 제 주변엔 다들 좋으신 분들밖에 없는데요. 음. 그럼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군요. 대충 언제쯤이나 될 것 같나요.”
“글쎄. 길면 1년 만에도 연락이 오고 그래서… 이럴 때 서주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분명 수단을 가지고 있을 텐데 말이야.”
서주아라는 말에 태정이 무슨 일 있냐는 듯 되물었다.
“어디 갔습니까?”
“그녀는 지금 뉴질랜드에 있네.”
“뉴질랜드면 외국이지 않습니까.”
“맞아. 우리 길드는 해외의 여러 길드와 자매결연이 맺어져 있지. 그래서 연중 두 번은 모임을 가지곤 하는데. 주로 정보 교류나 국제 정세 등을 논하지. 그리고 그 마지막엔 항상 사냥으로 마무리를 해. 그 대규모 레이드가 있는 장소가 뉴질랜드에 있는 화산섬이야. 그녀는 이 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어.”
“이해가 잘되지 않는군요. 겨우 레이드 한번 뛰려고 그 먼 곳까지… 게다가 뉴질랜드면 폭풍이 막고 있어 갈 수가 없는 나라가 아닙니까.”
“폭풍은 그렇게까지 넓게 형성이 되어 있지 않아. 고작해야 우리 남해부터 중국과 일본 해역의 일부 정도라 할 수 있지. 배는 쿠릴열도를 지나 태평양으로 돌아 들어가니, 문제될 게 없어. 그리고 겨우 레이드 한 번이 아니야. 해외 각지의 많은 길드가 모인 만큼, 규모부터가 다르지. 최소 500명 이상이 참가를 하는 다국적 연합 레이드야. 많은 길드원이 가고 싶어 하는 이유지. 그런 대규모 레이드는 경험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거든.”
“500명이라. 엄청난 규모군요. 하지만 그만큼 위험할 텐데, 괜찮을까요. 제가 알기로 서주아 씨의 레벨은 그렇게까지…….”
“어디 그냥 보냈겠나. 길드의 실력자들이 따라갔어. 사실 따라갔다고 하긴 좀 애매하지. 그들이 이번 모임의 실무자들이니까.”
“그럼 언제쯤이나 돌아올까요?”
“영지전이 있기 전에 떠났으니, 그래도 빠르면 한 달이면 돌아오지 않을까 싶네만.”
“일단 알겠습니다.”
별 소득 없이 본청을 빠져나온 태정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주아도 길드에 없고 이제 어떻게 한다.”
사실 이곳이 안 되면 바로 서주아에게로 가 볼 생각이었던 태정이다.
친동생인 그녀가 오빠와 연락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현재 뉴질랜드에 있었고, 그곳까지 가기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님 연락처라도 물어보는 건데. 그때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심란한 마음으로 지역대에 복귀를 한 태정은 사무실이 무언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와 다르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그때 전화벨이 울렸고, 발신인을 보니 박세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화를 잡고 있던 그녀가 그를 발견하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셨어요.”
“뭐야? 뭔 일 있어?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래?”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니.”
“양주에 있는 저희 관할 던전에서 타 길드와 분쟁이 일어났는데. 그쪽에서 자릴 비우라고 조금 전 통보가 들어왔어요.”
“뭐? 사람은? 다친 사람은 없어?”
“경비대 열한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요.”
“시비가 어떻게 걸린 거야?”
“저희 쪽 대원들이 보고해 온 바로는 갑자기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행패라. 양주에서 우리한테 행패를 부릴 만한 곳은… 혹시 퍼펙트 길드인가. 우리와 마주 보고 있다는? 그런데 전에 보고받기로는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옛날에 같이 사업도 하나 하지 않았어?”
“퍼펙트 길드가 아니에요.”
“그럼? 다른 지역에서 넘어왔단 말이야? 거기가 어디야?”
“금사자 길드요.”
“금사자… 뭐? 금사자?”
태정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사자라면 스페셜리스트에서도 톱 텐에 들어가는 초대형 길드였다.
그런 길드가 돈도 안 되는 시골 촌구석인 양주 땅까지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금사자가 왜? 혹시 과거에 우리 길드와 무슨 악연 같은 게 있었나?”
태정이 의문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집무실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아. 들었어요. 양주에…….”
“그게 아니라 저희 관할에 있는 제천 레드급 필드가 무적 길드의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 * *
길드 본청 회의실.
길드장 양태식을 비롯해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앉아 있었다.
그곳엔 태정 역시도 자리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필드 분쟁 건으로 인해 급하게 소집된 각 부처의 책임자들이었다.
“우선 부상자 11명은 근처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제천 쪽은 더 이상 인명 피해가 나면 안 될 것 같아, 철수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제 독단으로 결정을 내려서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태정의 보고에 그가 아니라는 듯 앉으란 손짓을 했다.
“아니야. 어차피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테니까. 신속하게 판단해서 철수 명령을 내린 건 정말 잘한 일이야. 그보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우린 딱히 그들과 척을 진 적이 없는데 말이야. 혹시 이 사태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 사람 있나.”
양태식의 물음에도 간부들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길드장만큼이나 그들 역시도 이 사건이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정보부장은 뭐 할 말 없나? 저들의 최근 동향이라든가, 우리 쪽과 마찰을 빚은 것이 있다든가, 혹 사업이 겹친다든가 하는 것 말이야. 작은 단서도 괜찮아.”
“오기 전에 확인을 해 봤지만 티끌만 한 접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보통 길드도 아니고 톱 텐에 들어 있는 길드가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그런 조짐이 있었다면, 갖은 수단을 다해 풀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정보부장의 대답에 양태식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기획사업 본부장을 향해 물었다.
“기획사업부는? 최근 벌인 사업 중에서 저들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 있나?”
“없습니다. 저희가 가진 사업체라 해 봐야 서울 변두리 정도인데. 이것 때문이라고 하기엔 저희 말고도 이미 들어와 있는 길드가 꽤 됩니다.”
“음. 지역대에서도 리모델링 외, 딱히 손을 댄 곳이 없다 하고 대체 뭐가 문제 일까, 뭐가…….”
길드가 다른 길드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은 이해관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사업이 겹친다거나, 시비가 있었다거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과는 걸려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나 그들과 같은 톱 티어에 든 길드라면 더더욱 조심을 했을 것이다.
“일단 사태를 파악하기 전까진 기다려 보세. 다른 곳들의 경계에 만전을 기하라 이르고. 혹시 그쪽에 연락은 넣어 봤나.”
“진즉에 해 봤지만 회신이 없습니다. 계속 시도 중입니다.”
“음. 알겠어. 이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지. 특이 사항 생기면 바로 보고하기로 하고.”
“예. 길드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