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뭐야… 여긴.”
어딘가로 소환된 이쿠죠의 말이었다.
그의 중얼거림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사지마가 그를 향해 물었다.
“여기 아까 거기 아니잖아? 그렇지?”
“보면 모르냐. 여기가 어디지? 갑자기 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에 기존에 있던 굴보다 훨씬 더 넓어진 공간.
이곳은 이전에 있던 곳과는 확실히 다른 곳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낯선 사람.
다리와 등 따위에 이상한 것을 차고 있는 남자였다.
“저거 사람인가?”
“그걸 말이라고. 얼굴만 봐도 사람인 건 알겠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태정 역시도 이 상황이 신기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땅이 울리고 빛이 솟더니 갑자기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것일까.
“저기 저 사람들 인간 맞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몬스터가 안 나오고 저 사람들이 나타난 거지?”
-아무래도 진법이 작용을 한 듯싶습니다.
“진법?”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제라드가 인간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인간인 것은 맞았다.
이어 희미하게 들리는 익숙한 음성은 그것을 더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일본인인거 같은데. 아까 그 깃발을 꽂아 놓은 이들인가.’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일본인 중 한 사내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 팀 리더 이쿠죠라고 합니다. 혹시 국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또박또박 강단 있게 물은 말이었지만 태정이 일본어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잠깐 생각을 하던 그가 영어로 답을 했다.
“아이 캔트 스피킹 재패니즈, 오케이?”
“아이 캔 뭐? 야, 얘 뭐라는 거냐, 지금. 재패니즈면 일본인이라는 거야?”
그가 못 알아듣는 듯하자 태정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영어 몰라? 아임 코리안. 오케이?”
“코리안? 오, 코리안. 오케이. 남산. 강남.”
“그래. 남산. 강남.”
“어… 오사카. 도쿄. 오케이?”
“그래. 너희 일본인인 거 알아. 무슨 오사카 도쿄 이러고 있냐.”
“오오. 오사카, 마이 오사카.”
“난감하네.”
거의 유아 수준의 대화였다.
더 이상 얘기를 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자, 태정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무슨 말이 그리도 하고 싶은지 상대는 계속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왜 혼자야? 다른 사람은 없어? 여긴 어디야? 넌 어떻게 왔어?”
“네가 말해도 모른다니까, 아임 코리안.”
“그래. 코리안. 나도 알아. 근데 우린 일본에서 왔는데 여기가 대체 어디야?”
“하… 노답이네.”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려는 찰나.
갑자기 사방에서 귀를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순간적으로 다들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태정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뗀 뒤,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드러난 5개의 문.
그곳으로부터 시뻘건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일본 측 헌터들도 소란스러워졌다.
“놈들이다, 출구부터 찾아.”
이쿠죠의 지시에 헌터들이 빠르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출구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봉인이 해제되면서 태정이 들어왔던 출구는 닫혀 버렸으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일단 싸워야지. 다들 준비해.”
무기들을 꺼낸 그들은 진형을 갖추며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런 그들을 힐끗 쳐다보던 태정은 제라드로부터 정보를 넘겨받고 있었다.
-놈은 엘리사라는 고대 종족 중 하나입니다.
“레벨은?”
-게이트 레벨도 따지면 600초중반 정도 됩니다.
“600초중반이라. 아까 그놈들 수준이란 말인데.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
-빠른 스피드와 대부분의 몸이 마갑으로 덮여 있어 어지간한 공격은 먹히지 않을 겁니다. 특징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약점은 머리입니다.
“좋아. 일단은 든든한 지원군(?)도 있는 거 같고. 한번 해 보자고.”
갑자기 소환이 된 서른 명의 일본 헌터들은 그에게 아주 좋은 원군이었다.
장비들만 봐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1인 분은 충분히 할 수 있을 터.
그만큼 부담을 덜 수 있다는 말이었다.
즉각 블라스터를 이용해 허공으로 떠오른 태정은 놈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타탕!
분당 수백 발에 달하는 에너지 탄이 빛을 뿌리며 일대를 장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쿠죠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엄청난 연사가 가능한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 마법이야?”
“후딜이 전혀 없는 거 같은데?”
“마법이 맞긴 합니까?”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이내 그들 주위에 몰린 엘리사들이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가자!”
“예!”
그렇게 전투가 시작될 무렵.
선제 타격에 나섰던 태정은 수많은 놈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피융! 핑! 핑!
개구리 같은 놈들의 아가리에서 쏘아지는 무수한 마법.
그것은 처음 보는 형태의 공격이었는데, 마치 레이저가 쏘아지듯 단발성으로 계속해 날아들었다.
“사거리 보소. 이거나 처먹어라.”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장착된 직사포와 곡사포.
탄두가 하나둘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쾅!
동시에 대파종 지뢰 스킬을 발동시킨 그가 대지를 지뢰밭으로 만들었다.
파파팟! 파파팟! 파팟!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폭발의 대향연.
그 여파에 휘말린 엘리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엘리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650만을 획득합니다.]
[미니 마정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엘리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650만을 획득합니다.]
[미니 마정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오. 뭐야? 왜 이렇게 잘 줘?”
잡는 족족 인벤토리에 마정석이 들어온다.
무려 100%의 확률.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걸 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제라드의 말대로 놈들의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만큼 퍼부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놈은 고작 7마리.
약점인 머리통을 집중사격 하려 해도, 날아드는 공격 때문에 조준도 힘들었다.
반면에 일본 측 헌터들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다.
경험도 풍부한 데다 태정이 어그로를 잔뜩 끌어 준 바람에, 겉도는 놈들을 골라 다구리를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 저거. 어그로 하나는 끝장이네.”
“그러게 말이야. 저 상태로 계속 버텨 주기만 하면, 살아 나가는 것도 문제는 아니겠어.”
“그런데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난 거지?”
“낸들 알겠냐. 지금은 한 마리라도 더 잡는 데 집중해.”
그런 헌터들을 보고 있는 태정은 무언가 판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시했다.
자신에게 몰려 있는 엘리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수가 많은 거야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누가 잡든 전부 해치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 사냥엔 마정석이란 변수가 존재한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잡지 못하는 자신이 손해였다.
‘안 되겠다. 꺼내자, 그냥.’
그들이 신경 쓰여 웬만하면 참으려 했지만 굴러다니는 마정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즉각 지상으로 내려선 태정은 블라스터를 접고 프로텍터를 소환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오른팔에 장착된 슈퍼 발칸포에서 수백 발에 달하는 강화 에너지 탄이 무섭게 뿜어졌다.
그 무지막지한 화력에 근처에 있던 엘리사 십여 마리가 동시에 저승길을 떠났고, 그의 인벤토리엔 그만큼의 마정석이 새로이 들어왔다.
“이게 메카닉이다, 자식들아.”
이때부터 태정의 원맨쇼가 시작됐다.
좌 방사포에 우 발칸포.
미친 범위의 화염이 대지를 휩쓸고, 빛의 탄환이 놈들의 몸을 사정없이 뚫어 버린다.
그 막강한 화력 앞에 마갑이고 뭐고는 필요가 없었다.
뒤늦게 열세인 걸 깨달은 엘리사들이 단체로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 보지만, 초연사에 밀려 그것마저도 무위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미친 전투력이 아닐 수 없었다.
쓰러지는 족족 마정석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알림음이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돈이 불어나는 소리도 같이 들려온다.
어느새 미소가 가득해진 그의 얼굴.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좋아. 나도 이제 재벌이다.’
태정이 돈맛(?)에 젖어 엘리사들을 박살 내고 있을 때, 이쿠죠 팀은 경악에 빠져 있었다.
“저, 저게 뭐냐?”
갑작스레 등장한 또 하나의 괴물.
아니, 그것은 괴물이라기엔 기계의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문제는 모습이 아니었다.
저 기계가 가진 엄청난 화력.
그 단단한 엘리사들이 쪽도 못 쓰고 쓰러지고 있었다.
“저 범위가 말이 되냐? 저 정도면 파이어 월 이상이야.”
“저 에너지 볼은 어떻고? 저게 대체 몇 개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레벨 x나 높은 거 같은데?”
모든 게 상식 밖의 광경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스킬 하나하나의 공격력은 이쪽이 더 우세했다.
각만 잘 잡으면 한 번에 목을 벨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모자란 전투력을 듣도 보도 못한 연사력과 범위성 마법으로 커버를 치고 있었다.
때문에 잡는 속도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빨랐다.
저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저 인간, 초일류야. 엄청난 레벨이라고.”
“히든일까.”
“그럴 확률이 높겠지. 한국에 새로운 히든이 나오다니. 이걸로 또 한국의 국방력은 몰라보게 강해졌겠군.”
“국제적 위상은 또 어떻고. 우린 어떻게 맨날 밀리냐.”
“하여간 섬나라 x도 볼 거 없다니까. 이민을 가든가 해야지. 야!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잡아. 이대론 돌아갈 배 삯도 안 나오겠다.”
태정의 눈부신 활약으로 전장은 거의 정리가 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제라드, 지금 몇 개나 들어왔지?”
-112개입니다.
“112개라. 10억씩만 해도 얼마야?
-1,120억입니다.
“그 정돈 나도 알아. 어쨌든 좋아. 뒷자리 맞춰서 1,200억만 채우자고.”
마무리를 하기 위해 일본 측 헌터들이 잡고 있는 구역으로 기체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쿠죠 등이 기겁을 하며 스킬을 남발했다.
“빨리! 온다!”
“이거도 뺏기면 적자야!”
바빠진 그들의 몸놀림과 서서히 다가가고 있는 태정의 기체.
그렇게 막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때였다.
쿠오오오오-!
“윽! 이게 뭔 소리야?”
갑자기 들려온 괴성과 머리를 뒤흔드는 공명음.
순간적으로 그의 양손이 귀를 틀어막았다.
필사적으로 스킬을 남발하던 이쿠죠 등도 마찬가지였다.
서른 명에 달하는 헌터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 머리 깨지는 소리는.”
괴한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다시 고요해진 주변.
이어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기체가 흔들릴 정도로 바닥이 심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기도 잠시.
전방에 쓰러져 있던 헌터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태정이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