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선박은 도장까지 새로 칠해진 완전한 새 배였다.
“누구지?”
약간은 신경이 쓰이는 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떨쳐 버리고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제주의 날씨는 그리 좋지 못했다.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와 시커멓게 흐린 하늘.
다행히도 낙뢰는 없었다.
“여기도 완전히 박살 났구나.”
다른 미수복지와 마찬가지로 제주도 역시 초토화가 된 상태였다.
거의 100여년 이상 방치가 되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멀쩡해 보이는 건물들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돌담 집과 색이 바랜 지붕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도심으로 추정되는 지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파된 도로 위로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과 이름 모를 나무들.
한때 도시였던 이곳은 자연 친화적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야?”
-연동이란 곳입니다. 예전 제주 시청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죠.
“시청이 서울 관리청 같은 건가.”
-넓은 개념으로 본다면 맞습니다. 저기 우측 하늘에 떼 지어 가는 카무라 무리들이 보이십니까?
“저기 저 새 같은 놈들?”
-그 바로 아래가 공항이었습니다. 5차 산업 중기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기 공항이었죠.
“그래? 그러고 보니 얼핏 배운 게 기억이 나. 5차 말기부터 비행 기체의 상용화 때문에 폐쇄됐다고.”
-그렇습니다. 군용은 5차, 민간은 6차 산업 초기부터 상용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의 물리 과학은 몰라보게 발전이 되었습니다. 태양계 정도에 머무르고 있던 우주여행이 항성 간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바뀌게 됐을 정도니까요. 인간들은 이 지점을 기술 한계 돌파점이라고 부른다더군요.
“한계 돌파점이라…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이 다 사라졌을까. 한날 한시에 모두 사라지고 세상이 변해 버렸다고 하던데. 이게 가능한 일이야?”
-죄송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지? 5차 초기인가.”
-기준이 명확하진 않지만 4차 말기 정도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4차 말기라. 완전 구석기 시대가 됐네. 하긴 천 년하고도 백 년인데…….”
제라드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아가기도 잠시.
드디어 저 멀리 위엄 가득한 한라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바로 정상으로 접근을 하려는데.
휘이잉-!
돌풍이 일며 신형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뭔 바람이…….”
즉시 출력을 높여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워낙 바람이 강해 좌우로 나부끼기만 할 뿐,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비행을 종료하고 지상으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글씨.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970m)
“970m라. 나쁘진 않네.”
돌판에 새겨진 글을 보니 중간 지점 정도 되는 것 같아 보였다.
백록담이 있는 정상이 1,950m라 했으니, 반은 올라온 셈.
블라스터를 외골격 다리로 교체를 한 태정은 곧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한라산 백록담.
반쯤 물이 고여 신비한 자태를 띠고 있는 백록담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약 삼십여 명 정도로 추정되는 무리는 각자가 모두 화려한 장비들을 차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한가락씩은 할 것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마석 사냥꾼.
일본 국적을 가진 외국인 헌터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고일 대로 고여 버린 이번 파티는 열도 내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하기로 소문이 난 팀이었다.
오키나와 3번, 센카쿠 1번, 마라도 1번, 대마도 2번.
다들 기피하는 섬만 골라 사냥을 다닌 그들은 해 먹은 배만 해도 3척에 이르렀는데.
운이 좋게도 한 명의 사상자 없이 모두 살아 돌아왔다.
해서 이들 세계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불사무적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리더 이쿠죠는 720레벨의 격투가였다.
“다들 준비됐냐?”
그가 한데 모인 헌터들을 향해 묻자 법사 계열로 보이는 헌터 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끝났어. 매설조는?”
“지금 바로 들어가면 돼.”
팀원들의 스탠바이에 이쿠죠가 팔짱을 풀며 바로 앞의 굴을 바라봤다.
그가 이곳을 발견한 것은 3년 전 여름이었다.
해마다 제주도로 원정을 뛰러 나온 그는 제주 전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 백록담의 지하 동굴이었다.
처음 이곳을 탐사한 그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었다.
그저 조금 강한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 정도였달까.
하지만 세 번째 사냥 때 그는 이곳에 봉인의 결계가 쳐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여러 방면으로 연구를 한 끝에 그는 결계를 풀 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처음 보는 몬스터와 조우를 할 수 있었다.
놈들은 희귀종이었다.
세계 도감에도 등록이 되지 않은 몬스터.
이들은 놈들을 가리켜 오까네란 명칭을 붙여 줬다.
마리당 마정석 드랍율이 100%에 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마리 한 마리의 강함이 개개인에 버금간다는 것.
해서 그들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러다 생각을 한 것이 바로 매몰이었다.
동굴 자체를 무너뜨려 한꺼번에 죽인다.
썩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백록담의 동굴은 총 다섯 개.
방금 막 네 개의 굴에 보조 마법진을 설치한 그들은 이제 메인 굴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지.”
이쿠죠의 말에 헌터들이 하나둘 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0여 미터 즈음을 걸었을까.
“1번 매설, 시작한다.”
매설조 리더의 지시에 준비하고 있던 매설조가 준비해 온 마석을 천장에 박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폭발 마법진이 설치됐고, 추가로 범위 마법이 봉인됐다.
추가 마법이 들어간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템과 경험치를 얻으려면 공격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저 동굴만 무너뜨린다면 타기팅이 되지 않아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미 본국에서 수차례 반복 훈련이 있었고, 메인 광장에 도달하기 전까진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존재도 없었다.
마법진은 100여 미터 간격으로 균일하게 설치됐다.
그렇게 약 15개의 마법진과 마석이 추가로 들어갔고, 그들은 드디어 가장 깊숙한 곳인 메인 광장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거대한 공간이 드러나며, 전방으로 커다란 입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결계 확인하고 다들 모여.”
이쿠죠의 지시에 가장 선두에 있던 헌터 둘이 시커멓고 커다란 굴로 향했다.
그리곤 허공에 무언가를 만져 보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막혔습니다!”
“좋아. 다른 굴이랑 연결된 외부 루프 가지고 와.”
그의 말에 이번엔 후방에 있던 헌터 하나가 손에 명패 같은 것 하나를 들고 왔다.
마나만 주입하면 바로 발동이 가능한 원격 통신 장치였다.
그 전에 그는 결계 해제 작업을 맡을 팀 내 서열 2위 마사지마를 불렀다.
“얼마나 걸리겠어?”
“다른 곳보단 봉인 기둥의 개수가 많으니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30분이면 끝이 날 거야. 그보다 출구 쪽은 왜 비워 두는 거야? 아직 마석이 좀 남은 것 같던데.”
“마법진의 해제는 컨트롤이 되지 않아. 전부 일시에 터지게 될 게 뻔한데, 그럼 몬스터가 기어 나오기도 전에 막혀 버릴 거 아냐. 최대한 통로에 한가득 채워서 보내 버려야지.”
“오. 역시 넌 우리 팀의 에이스야. 가끔 보면 존경스럽단 말이지.”
“자식, 알면서 별말을 다 하는군. 참. 기폭 장치는 잘 묻어 뒀겠지?”
“걱정 마.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 뒀으니까.”
“뭐? 그러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누구? 혹시 한국 놈들? 그놈들 여기 버린 지 오래야. 지난 3년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이쿠죠가 이리도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수 없으면 이곳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걱정을 안다는 듯 마사지마가 팔을 툭 치며 히죽 웃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냥 묻어 뒀겠냐.”
“그럼?”
“다 조치를 취해 놨지. 일장기까지 딱 걸어 놨다 이 말씀이야.”
“오. 역시 철두철미한 마사지마답군. 확실히 일장기를 걸어 두면 놈들이 함부로 만질 수가 없지.”
“당연하지. 대일본 제국의 국기를 건드리면 그날로 큰일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내가 한국에 친구가 좀 있어 봐서 아는데, 한국인들은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해. 뻔히 해제 장치인 게 보일 텐데. 어느 정신 빠진 놈이 그걸 손대려 하겠냐. 특히나 이 한국인들은 남의 물건이라면 돈이라도 휴지 보듯 하는 인간들인데.”
“오호. 그런 심리까지 꿰뚫고 있을 줄이야. 마사지마, 너란 녀석은 참 치밀한 구석이 있어. 가끔은 그 치밀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라니까.”
“후후. 뭘 이 정도 가지고.”
* * *
한라산 정상.
“햐. 경치 한번 죽인다, 죽여. 웬만한 던전 저리 가라네, 아주.”
없는 길을 만들며 정상 등반에 성공한 태정은 신비로운 백록담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가 있었다.
사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분화구와 산 아래로 깔린 짙은 운무.
선인들이 술을 마시고 놀았다는 설화가 농담이 아닐 정도로 장관이며 절경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란 말이 이런 데서 나오는 거구나.”
감탄을 하며 한동안 경치를 감상하던 태정은 이내 할 일을 깨닫고 분화구로 내려왔다.
그리곤 유심히 주변을 살피며 추리에 들어갔다.
“백록담 깊숙한 곳이라 했으니. 호수 안을 말하는 건가.”
퀘스트에는 정확히 어떤 곳이란 설명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깊숙한 곳이라고만 나와 있을 뿐.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수색을 해 봐야 할 곳은 호수였다.
“이 스킬이 여기서도 쓰이는구나.”
호수가로 들어간 태정은 즉각 네비게이터를 소환했다.
그리곤 곧장 잠수에 들어가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본 것과 다르게 호수는 생각보다 얕았다.
깊이가 100여 미터에 이른다고 들었지만, 막상 잠수를 해 보니 그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수색은 순식간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여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그럼 이 넓은 어딘가에 뭔가 있다는 소리인데.”
호수에 비해 엄청나게 넓은 분화구의 면적.
일일이 돌아보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가만 있는다고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곧장 행동에 들어간 태정은 부스터를 운용하며 무성하게 풀이 깔린 분화구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 분이나 흘렀을까.
호수의 정반대편 외벽에서 수상한 굴 하나를 발견했다.
“혹시 여긴가?”
너무 뜬금없는 곳이었다.
특히나 밑으로 빠져 있는 형태의 굴이라는 것이 더욱 그러했다.
마치 내려가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지 않은가.
앞에서 잠깐 고민을 하던 그는 이내 야투경을 소환했다.
탐색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안으로 한 발을 내딛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고개를 들어 확인을 하는데.
정말 생뚱맞게도 깃발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바탕에 붉은 구가 정중앙에 박힌 깃발.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이웃나라 일본의 국기였다.
“뭐야? 깃발이네?”
그의 손이 깃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