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내일부터가 정식 출근이었지만, 그는 하루도 허투루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냥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길드장의 말로 개인 시간이 많을 것이라 했지만, 그걸로 인해 업무에 지장을 줄 순 없는 일.
책임지는 자리에 앉은 만큼 할 것은 하고, 개인적인 볼일도 보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역대가 하는 일과 각 부서의 세부 업무 등을 파악하던 태정은 점심도 거른 채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그리고 늦은 오후.
사무실로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오빠.”
“왔냐, 공부나 하라니까.”
“잠깐 들린 거야. 축하해 주고 싶었단 말이야. 이거 오다가 샀어.”
그녀가 앙증맞은 화분을 내밀자 태정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책상 한편에 그것을 올려놨다.
“예쁘네. 고맙다. 아무튼. 학원은 잘 다니고 있지?”
“응. 친구도 사겼어.”
“남자냐?”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야. 남자 친구 생기면 오빠한테 바로 말해라.”
“그런 친구 아니야, 오빠도 참. 세아 언니는 잘 있지?”
“일하느라 바쁘지, 뭐. 이제 여기로 왔으니까. 더 바쁠 거야.”
“언니 괜찮아 보이던데. 요즘도 둘 사이에 아무 일 없어?”
“쪼끄만 게 또 까부네. 됐고. 밥은 먹었냐. 밥 사 줄까?”
“진작 먹었지. 그런데 그 언니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
“무슨 언니.”
“옆집에 산다는 그 예쁜 언니 있잖아. 주아 언니였던가? 그 언니 술 되게 세더라.”
“그냥 가끔 보지. 아무튼 밥 먹을 거 아니면 이제 가서 공부해라. 오빠 지금 좀 바빠.”
“응. 알았어. 연락할게.”
소영이 나가고 다시 업무에 집중을 한 지 수 시간.
굳은 석상처럼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으아. 대충 보긴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네.”
태정이 파악한 지역대는 경영 기획 본부 산하에서 크게 2가지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특정 외부 사업의 관리 경매 입찰과 지역사회와의 연대와 협력.
깊게 들어가 본다면 손을 대고 있는 사업만 거의 백여 곳에 이르렀다.
쉽게 말해서 길드의 자금 줄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이거 너무 큰 자리를 맡은 거 같은데, 시간이 나려나.”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한 태정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결재 서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책 대여섯 권은 쌓아 놓은 것 같은 높이.
초반부터 엄청난 양이었다.
대충 훑어보니 대부분이 예산에 대한 것이었다.
유지 보수, 지원, 기타 등등.
가 보지도 못한 호텔에, 식당에, 빌라에, 학교까지.
어련히 알아서 잘 올렸을까 하며 사인을 하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결재를 올린 직원들을 하나하나 불러 세세한 사항을 보고받았다.
길드의 돈을 대충 막 끌어다 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 남양주에 있는 이 직원 호텔은 던전 바로 옆에 있는데, 벌써 보수만 11번을 했네요? 돈 먹는 기계 같은데, 이거 계속 유지하는 이유가 뭔가요?”
“저희 길드에서 처음 지은 직원 호텔이라 상징적이기도 하고, 필드 던전 같은 경우 한 달짜리 외근이라. 없으면 근무가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분기 별로 수십 억씩 들어가고 있는데. 차라리 쓰는 데까지 쓰고 좀 안전한 지대에 새로 하나 올리는 건 어떻게 생각해요?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해도 보자… 거의 지금까지 500억이 넘게 들어갔는데, 참고 사진만 봐도 이게 어떻게 호텔이라 부를 수나 있겠습니까. 요새 호텔에 비하면 거의 폐건물이나 다름이 없는데. 이전 지역대장은 별다른 말이 없었나요?”
“사실 저긴 길드장님께서 친히 올리신 건물이라. 문제를 알고는 계셨지만 딱히 손을 쓸 수가…….”
“아… 길드장님. 그랬군요. 그럼 뭐… 이건 나중에 제가 어떻게 한번 말씀을 드려 보죠. 그리고 여기 지역 봉사는 이대로 하시면 될 것 같고. 인천항에 우리 배가 한 대 있네요? 이 배는… 1년째 출항 기록이 없는데. 유지 비용만 달에 십수 억인 것 같고. 용도가 뭔가요?”
“그 배는 중국 대륙 원정 때 쓰였던 수송선입니다.”
“‘쓰였던’이라면 지금은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예전에 중국 쪽에 길을 뚫어 신 자원을 끌어오자는 길드 주도 사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새로 들어선 중국 정부가 국내 몇몇 길드와 독점 계약을 선포하더니, 이후엔 입국을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계약이 된 길드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어 일단 보관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방치가 되고 있다는 말이네요. 뭐 이건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그럼 이제 이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하나만 여쭤볼게요. 원래 이렇게 결재가 빈번하게 올라오나요?”
“아닙니다. 지금 보신 건 두 달간 밀린 결재 건들입니다. 지역대장님이 부재중이신 동안 쌓여 왔던 것들이죠.”
“두 달 전에 진급을 하신 모양이죠?”
“그게 아니라 전 지역대장님께선 두 달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원래 바로 자리가 채워져야 하는데, 영지전 준비 때문에 늦어진 겁니다.”
“아. 사고로…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결재는 더 이상 없는 거죠?”
“네. 아마 당분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긴급 현안이 아니면 대부분 기한에 여유가 있는 것들이라, 보통 정기 회의를 통해 올라가는 시스템인데 비서를 통해서 확인해 보시면 대충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취임으로부터 한 달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전반적인 업무를 습득하며 지역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한 태정은 생각보다 이 자리가 그리 빡빡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출장과 외출이 타 부처에 비해 빈번하게 있는 지역대지만, 실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달마다 있는 회의에 참석을 하거나 올라오는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는 것 정도가 고작.
물론 예산이 내려오지 않을 경우, 여러 기관과 몇 날 며칠에 걸쳐 미팅을 잡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경우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말인즉.
시간이 넘쳐흐른다는 뜻이었다.
“좋아. 대충 파악은 끝났으니, 이제 내 일을 좀 해 보자.”
[노르딕의 트랩]
등급: 블루 8
난이도: 상
주의 - 불규칙 트랩에 의한 몬스터 폭탄 드롭.
공략.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기.
트랩당 몬스터를 다 잡기 전까지 구역을 벗어나지 말 것.
팀의 대형과 구성이 굉장히 중요함.
웨이브성 던전임에도 불구하고 구역 하나당 범위가 좁기 때문에 근접 위주로 파티를 꾸릴 것.
매우 드문 확률로 노르딕의 심장이 드롭 됨.
마켓가 35억.
미리 요청해 받은 자료를 훑어보던 태정은 태블릿 하나를 집어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박세아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사냥하러. 1층에 차 좀 대기시켜 줘.”
“네.”
건물 밖으로 나온 태정은 잠시 후 도착한 김형식의 차를 타고 던전이 위치한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구 시가지의 공터.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는 게이트 하나와 그곳을 지키고 있는 4명의 헌터가 보였다.
태정이 다가가자 미리 연락을 받은 헌터들이 칼 각을 잡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새로운 지역대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고생들 하세요.”
“예!”
군기가 바짝 든 헌터들을 지나 게이트에 진입한 그는 한 거대한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바닥이 체크무늬로 된 끝없이 이어진 새하얀 공간.
저 멀리 보이는 포털을 제외하곤 얼마나 큰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공간이었다.
“이거 바닥에 체크만 아니면 길 잃기 딱 좋겠네.”
한 번도 보지 못한 곳에 대한 감흥도 잠시.
그는 곧 외골격 다리를 소환했다.
“한 칸씩 이동하라고 했지.”
체크 하나당 면적은 가로세로 50미터의 정사각형이었다.
함정은 랜덤이고 발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몬스터를 정리하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어나는 개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헌터들에 대한 얘기고…….
태정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히든인 메카닉 플레이어니까.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말을 끝으로 그가 전방을 향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걸음당 2, 3미터를 튀어 오르며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신형.
첫 번째 칸을 지나 순식간에 두 번째 구역에 접어든 그의 앞으로 순간 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나타난 수십여 마리의 거대 몬스터.
하지만 충돌은 없었다.
바로 턴을 한 태정이 놈들을 무시하며 좌측으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칸에 도착한 태정의 앞으로 또다시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빛을 뿜으며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 역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회해 다른 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칸을 전전하며 일부러 트랩을 발동한 태정의 뒤론 벌써 이백여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그를 맹렬한 기세로 쫓고 있었다.
조금씩 좁혀지는 둘 사이의 거리.
생각보다 놈들의 이속이 대단하자, 그는 추가로 부스터까지 소환해 대지를 질주했다.
끝이 없는 체크판과 그에 맞춰 속속들이 튀어나와 합류하는 몬스터 무리들.
벌써 100여 칸을 밟고 지나간 이 공간 안에는 무려 이천 마리 이상에 달하는 괴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태정은 사냥을 시작할 마음이 없었다.
‘아직 멀었어, 이 정도 가지곤.’
태정은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의 모든 트랩을 밟고 싶었다.
어차피 다음 포털로 진입을 하게 되면 보스밖에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최대한 뽕을 뽑을 대로 뽑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최소 만 단위의 물량이 필요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의미 있는 레벨 업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다니던 그는 어느 순간 모든 퇴로가 막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많이 소환된 나머지 몬스터의 규모가 그의 행동 반경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50분이란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50분 동안 죽어라 함정만 밟고 돌아다닌 것이다.
이제 되었다 싶었는지, 그는 즉각 블라스터를 소환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 그를 더 이상 쫓지 못하고 멀뚱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괴수들.
그 수가 물경 1만 5천에 달했다.
“좋아. 재료는 이만하면 됐고, 이제 맛나게 한번 버무려 볼까.”
말을 맺음과 동시에 그의 총구에서 분당 수백 발에 달하는 빛의 에너지 탄이 뿜어졌다.
그것은 마치 소나기와도 같이 떨어져 내렸고, 하염없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몬스터들을 떼로 녹여 버리기 시작했다.
타타탕! 타탕! 타타타탕!
[경험치 700,000을 획득합니다.]
[안드레아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870,000을 획득합니다.]
[도란을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레벨 업을…….]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가는 괴수들과 끊임없이 들어오는 경험치 알림음들.
무더기로 박살이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쳐 맞고 뒈지는 수밖에는.
그 짜릿한 쾌감에 태정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이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