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간부들과 어울려 술을 진탕 먹은 태정은 세상이 둘로 보일 지경이었다.
얼마나 술들이 센지 눈치껏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
옆에서 낑낑대며 부축을 하고 있는 박세아가 아니었다면, 벌써 길바닥에 누워 부랑자가 됐을 신세였다.
“정신 좀 차리세요. 거의 다 왔어요.”
“아후. 내가 지금 정신은 말짱하거든. 근데 몸이 제멋대로야.”
“너무 많이 드신다 했어요.”
“너도 그런 자리에 가 봐. 돌아가면서 술 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내 승진 축하 자리인데.”
“알겠어요. 그러니까 균형 좀 제발 잡아 봐요. 여기서 쓰러지면 못 일어난다구요.”
거의 끄집고 가다시피 해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데리고 나온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갔다.
“아휴. 다 왔다.”
이마에 흐르는 땀도 닦지 못한 채 곧장 방으로 태정을 데려간 박세아는 그를 눕히곤 아픈 허리를 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일어나려던 그녀의 팔을 태정이 확 잡아끌었다.
동시에 한 몸이 되어 바로 코앞에서 시선을 마주친 그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크게 떠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태정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너…….”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며 귓가에 고동 소리가 맴돌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혹시…….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기도 잠시.
“제주도…….”
“네?”
“제… 주도, 가야 돼. 알아… 와.”
말을 끝으로 태정의 눈이 감기며 이내 코고는 소리가 적막을 깨며 울려 퍼졌다.
그런 그를 황당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그녀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드르렁거리는 소리.
잠깐 고장이나 멀뚱히 그를 보고 있던 박세아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 고이 덮어 줬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자신의 손등을 뜨거워진 볼에 가져다 댔다.
“바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다음 날 아침.
“으아.”
머리가 깨지는 고통에 잠에서 깬 태정은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으. 이래서 술은 한 종류만 파야 한다니까.”
양주에, 샴페인에, 맥주에, 칵테일에 어제 그는 소주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술을 주는 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술이라 하면 포터 시절 팀의 아재들과 일기토를 벌일 정도였는데, 수십 명의 간부가 건네는 물량 공세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박세아가 눈짓으로 그만 마시라 신호를 주긴 했지만, 어디 그게 통할 자리였던가.
“그건 그렇고 어제 어떻게 왔냐. 건물까진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어젯밤 기억을 떠올려 보던 태정은 목이 너무 타 거실로 나갔다.
그러자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박세아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하던 것을 내려놓고 식탁 위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일어났어요? 이거 꿀물이에요.”
“아. 땡큐. 그런데 어제 어떻게 온 거야? 기억이 안 나네.”
“그냥 조금 취하시긴 했는데, 멀쩡하게 들어오셨어요.”
“그래? 내가 혹시 뭐 실수한 건…….”
“전혀요. 어서 마시고 앉으세요. 해장국 만들어 봤어요.”
“오. 해장국. 마침 딱 필요하던 거였어.”
그녀가 만든 꿀맛 같은 해장국으로 해장을 한 태정은 씻고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션을 바르려는데 책상 위, 보지 못했던 파일들이 대거 올라와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든 그가 첫 장을 넘겼다.
“제주도? 이게 왜 여기 와 있냐.”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번째 페이지를 넘기려는데, 노크와 함께 박세아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마침 잘 왔다는 듯 그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거, 네가 가져다 놓은 거야?”
“네. 오늘 새벽에 전부 정리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내가 너한테 이거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가?”
“어제 오시는 길에 차에서 말씀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래? 근데 이렇게 빨리… 아무튼 고마워. 피곤할 텐데, 쉬어.”
그녀를 내보낸 뒤 태정은 제라드를 호출했다.
“내가 어제 쟤한테 제주도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나?”
-그렇습니다.
“그래?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정은 이내 자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번째 파일을 막 정독했을 때, 그는 이곳에 가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들어간 길드가 없어? 남해에 태풍이 분다는 소문은 얼핏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한산도도 타산이 안 맞아서 포기할 정도라니.”
정부인 한산도가 포기했을 정도면 지금 제주도는 미지의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만 특별하다는 뜻.
파일에 나와 있길 제주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2가지였다.
하나는 배를 타고 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잠수정을 이용하는 것.
둘 모두 위험부담이 있었다.
배를 타고 간다면 폭풍을 뚫어야 하고, 잠수정을 이용한다면 수많은 심해 몬스터를 지나쳐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비용이었다.
배의 경우 길드마다 해운사가 있어 나름 요금이 저렴한 편이었다.
물론 행선지가 제주도라면 그 값은 십수 배로 뛰겠지만, 태정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잠수정은 달랐다.
깊은 곳까지 잠수가 무리 없이 가능해야 하며, 또한 몬스터들로부터 동체를 지킬 무기가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모든 무기가 먹통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잠수정에 달 수 있는 무기는 오직 마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마법이 물속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석과 자재들이 대량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이렇게 되면 부르는 게 값이란 뜻이었다.
자료에 나와 있길 튼튼한 배의 경우 탑승권이 10억.
잠수정의 경우, 편도 70억에 일 정박료가 30억에 육박한다고 적혀 있었다.
왕복 200억.
그렇다고 저렴한 배를 무조건 탈 수도 없는 게, 이쪽은 인원이 차지 않으면 출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 대규모 레이드가 있지 않는 이상 이용을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특히나 제주도 같은 곳은 가려는 헌터들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 뭐 기본 200억이네. 말이 되냐, 이게.”
혀를 내두르는 요금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는 혹시 다른 방법이 더 있을까 자료를 전부 뒤졌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돈 벌어야 하나? 그때 설아 누님이 사용했던 포털이면 어떻게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하긴. 그 대단한 클럽의 3인자도 함부로 쓰지 못하는 걸 내가 부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그래. 어차피 성장도 해야 하니까. 차근차근 레벨 업 하면서 모아 보자.”
태정은 좀 더 멀리 생각하기로 했다.
클로킹이라는 좋은 기술이 탐이 나기는 했지만, 당장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파일을 덮은 그가 식은 커피를 마시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들어가도 될까요?”
“어. 왜? 무슨 일 있어?”
“오늘부터 지역대 출근하시라고 인사 팀에서 연락이 와서요.”
“벌써?”
“네. 지금 가 보셔야 될 것 같은데, 채비할까요?”
“거, 처리 한번 빠르네. 알았어.”
마치 미리 점 찍어 놓고 있었다는 듯 순식간에 이뤄진 인사 처리에,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그녀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한편, 건물 바깥에서는.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붐비고 있었다.
그중 주목을 받고 있는 한 헌터가 있었는데.
그는 이번 영지전 본성 방어 때 살아남은 수비대의 일원이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린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병력의 반 이상이 이미 리스폰 되어 사라졌고, 남은 병력은 500이 채 되지 않았죠. 그런데 성 밖에서 치고 들어오는 적의 병력은 수천이 넘었습니다. 성문을 지키고 계셨던 부대장님도, 총지휘를 맡고 있던 이태호 과장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이미 끝이란 걸 직감하고들 계셨죠.”
사내는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지 잠시 눈을 감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다른 헌터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봤고, 이내 다시 그의 눈이 떠지며 설명이 이어졌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늘에서 한 헌터가 ‘툭’ 하고 떨어져 내린 건. 당시만 해도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하지만 그가 변신을 했을 때, 저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헌터 하나가 떨어져 내린 것이 아닌, 화신의 강림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그가 보여 준 능력은 가히 신의 그것과 필적했습니다. 수천의 군대를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쓸어버리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신이 인간에게 벌을 내리는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수비대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봤죠. 과연 이보다 더 대단한 능력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건 미천한 인간이 감히 신을 이해하려 했던 무지몽매함의 착각이었습니다. 1차전을 승리를 이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너무 뜸을 들이는 그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 참지 못한 헌터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뭐였습니까?”
“그것은…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로 메테오 스트라이크였습니다.”
“오오.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면 700레벨대 최강의 공격 마법이라는 그 엄청난……!”
누군가 아는 척을 하며 눈을 빛내자, 설명을 하던 사내가 검지를 피며 좌우로 흔들었다.
“노, 노, 노. 700레벨대의 마법이지만 800레벨대의 마법도 씹어먹는 그야말로 악마의 스킬이라고 할 수 있죠.”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저희는 절망했습니다. 이쪽에 신이 강림을 했더니, 저쪽에도 신이 강림을 해 버렸구나. 곧바로 대피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세상을 관조하고 있는 모습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곧 저 멀리 하늘에서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출발을 하더군요. 그걸 본 이태호 과장님은 10년 이상 늙은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끝이구나’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죠. 바로 그때,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그럼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묵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습니다. ‘제가 한번 막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왜 자꾸 말을 끊습니까, 감질나게.”
“세상을 집어삼킬 듯 성난 파도와 같이 날아오던 그 메테오가! 한순간에 어미 품에 안겨 재롱을 피우는 어린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오오!”
“저는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그 태산과도 같이 우뚝 선 당당한 뒷모습을 말…….”
그가 한창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클라이맥스를 이끌어 내고 있는데, 도중에 말을 끊는 이가 있었다.
“저기 다들 죄송한데 길 좀…….”
단 한마디였지만 모두의 날 선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됐다.
감히 이걸 방해해?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설명을 하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저기! 저분입니다! 바로 저분이 전장의 화신! 유태정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