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쿠오오오-
삭막한 바람만이 불고 있는 황량한 대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도를 연상케 했던 이 대지엔 현재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곳곳에 패인 크레이터를 제외한다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가 된 전장.
그 광경을 초연한 눈빛으로 보고 있던 태정은 비로소 기체에서 내려왔다.
동시에 뒤통수를 때리는 무수한 시선들.
뒤를 돌아보니 언제 모여들었는지 이태호를 비롯해 수많은 헌터의 모습이 보인다.
“대충 된 것 같죠?”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는 태정의 말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도 헌터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넋이 나간 얼굴로 굳어 버린 헌터들.
“저 과장님? 과장님?”
뻘쭘함에 그가 이태호를 불렀다.
그러자 마치 자다가 깬 듯 화들짝 놀란 그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네? 아, 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다른 분들은 다 어디에……?”
“아. 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건지…….”
“구경차 잠깐 들렀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보다 정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남은 사람은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부인가요?”
“정문 쪽에 방어 병력이 조금 남아 있을 겁니다.”
“음. 그럼 저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그게… 우선 타워 안으로 가시죠.”
이태호는 그렇게 말하며 남아 있는 간부들에게 정비를 지시했다.
아래로 내려가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수호했던 부대장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태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태호가 밖을 가리키며 상황 종료를 알렸다.
“끝났습니다.”
“예?”
“상황 종료요.”
“그 많은 병력을 막아 냈다는 말씀이십니까?”
“막은 정도가 아닙니다. 깡그리 날려 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아무튼 현 상황은 그렇습니다. 나머진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선 정비 좀 부탁드립니다.”
의아해하는 부대장을 뒤로 하고 이태호와 태정이 컨트롤 타워 안으로 들어섰다.
“앉으세요.”
“예.”
태정이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이태호가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아까 그건 대체 뭐였습니까. 그 기계같이 생긴 것 말입니다.”
“기체라는 것인데, 스킬의 일종입니다.”
“그럼 그 덩치 큰 기계가 스킬이었단 말씀입니까.”
“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전혀요. 총이나 기계 장비를 쓰는 정도로만 알았지. 아까처럼 로봇 같은 걸 말하는 건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랬었나요?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저 스킬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보다 레벨이 300부근이 아니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엄청난 화력을 혼자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깜짝 놀란 수준이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아직도 아까의 감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태호였다.
그만큼 그에겐 조금 전의 일이 충격적이었다.
“300은 졸업했고 얼마 전에 400을 찍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도 놀랍습니다. 어떻게 400이 그런 엄청난… 확실히 히든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요. 히든에 대해선 교육을 받아 조금 알고는 있었는데, 이런 게 가능할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 정도면 히든 계열에서 화력의 끝판왕인 염동력자나 궁술사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이태호의 과한 칭찬에 태정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유. 과찬입니다. 전 그냥…….”
“과찬이라뇨. 이걸 길드장님이나 대장님들이 보셨으면 아마 경악하셨을 겁니다. 일반적인 전투면 몰라도 그 넓은 범위를 혼자서 장악하는 건 그분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튼 잘 와 주셨습니다. 덕분에 성을 지켰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출정 병력이 공략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인데, 여기마저 빼앗기면 정말 끝이었거든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요?”
“일단은 성을 지키는 것이 관건입니다. 동쪽으로 넘어갔던 병력이 공성에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이 성이 남아 있으면 영지전 보상과 버프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참. 그러고 보니 혹시 남서 지구에서의 일도 태정 님이 하신 겁니까.”
남서 지구란 말이 나오자 태정이 뜨끔하며 그를 바라봤다.
거기서 일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성을 말씀하시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혹시 그게 폐가 됐을까요?”
태정이 조심스레 묻자, 이태호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손을 크게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 덕에 60위권까지 올라왔는데요. 지금 동쪽에선 본성 점령도 힘들어하고 있는데, 원래는 그 성을 먹고도 중형 성 기준 최소 다섯 개 이상은 더 밀어야 50위권에 안착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정 님 덕분에 본성만 밀면 기준치에 부합을 하게 됐으니, 엄청난 일을 하신 거죠. 잘하셨습니다.”
한편. 제닉스 공략에 나섰다 전멸을 맞이한 스미스 연합은.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다 이긴 전쟁이 왜 이렇게 되었냔 말이야.”
이번 공성에 책임을 지고 출정을 한 스미스 길드의 3대장 조한철은 화가 나는 걸 떠나서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도 황당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승전이 코앞이라는 통신이 귀찮을 정도로 쇄도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보기에도 성은 위태로웠고, 곧 손에 떨어질 것만 같이 보였다.
한데, 갑자기 발생한 대규모의 폭발과 함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아니, 단순한 역전 정도가 아니었다.
나간 병력 중, 살아 돌아온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놈들이 전력을 숨겨 놓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줄곧 그의 눈치를 보던 부관의 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조한철이 그게 말이 되냐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전력을 어떻게 숨겨 놓고 있었기에, 그 많은 병력이 그 짧은 시간에 당한단 말이야.”
“리스폰 포인트에서 날아온 통신으론 무슨 철갑 부대였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철갑 부대?”
“덩치가 골렘만 하면서 뭔가 강철로 된 물체 같았는데 마법을 사용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야?”
“글쎄요. 제 생각에는 아마도 놈들이 숨겨 놓은 비밀 병기가 아닐는지…….”
“비밀 병기? 지금 놈들의 본대는 동쪽에서 애 꽤나 먹고 있을 텐데, 저만한 전력을 남겨 놓고 출정을 했다고?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지. 우리 애들도 상당한 수준인데, 어떻게 이리도 무력하게 당할 수가 있냔 말이야. 그것도 너무 순식간에 당해 버렸잖아.”
“그보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본성에서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음.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직접 가 보는 건데… 지금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되지?”
“후방의 지원을 받으면 2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지원 받고 2천이라. 초라한 병력이군. 일단 있는 대로 끌어모아 봐.”
“설마 다시 치실 생각은 아니시죠?”
“왜 아니겠냐. 만일 이대로 돌아가면 난 아마 개망신을 당하게 될 거야. 우리 길드야 상관없지만 연합 놈들의 눈총까지는 도저히 받을 자신이 없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걸 손에 넣어야 해.”
“하지만 아직 적의 전력이 확실히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또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건 걱정 마라. 이번엔 내가 직접 서포터를 설 생각이니까.”
“예? 대장님께서 직접… 설마 그럼……?”
“그래. 쿨이 길어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건만. 이곳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군.”
* * *
남서 지구 화이트 라인 외곽.
일단의 병력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병력의 규모는 대충 봐도 수백에서 천여 명.
이 평화로운 화이트 라인에선 굉장히 보기 드문 대규모의 병력 이동이었다.
“이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정찰은 어떻게 됐어?”
“진즉에 갔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소식을 가지고 오겠지.”
“벌써 죽은 거 아니야?”
무리를 이끌며 대화를 하고 있는 그들의 정체는 F지역 리스폰 포인트에서부터 쉼 없이 달려온 플랜트 이하 2개의 길드였다.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성을 빼앗긴 길드들.
다른 길드들과 다르게 손에 손을 잡고 이곳까지 달려온 그들은 자신들이 맞은 날벼락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기에, 그대로 남아 있기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 저기 누가 온다. 우리 애들이야.”
가장 먼저 당했던 플랜트 길드 김용태의 말이었다.
잠시 후 정찰을 갔던 두 명의 헌터가 그들 앞에 부복했다.
“어떻게 됐어? 병력의 규모가 어떻게 돼?”
김용태의 물음에 사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빈 성 같아 보였습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뭐? 빈 성? 확실해? 들어가 본 거야?”
“진입까진 못 했지만 거의 50여 미터까지 접근해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수비를 보고 있는 병력이 한 명도 없었다, 그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내의 보고에 김용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그를 향해 천하대 김무열이 어깨를 툭 치며 으쓱했다.
“봐라. 오길 잘했지? 뭔가 이상했다니까. 수년째 아무 일 없던 이곳에 하나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성을 누가 건드린다는 거야. 이득 하나 없는 소형 성을.”
“그래도 아직 몰라, 들어가 본 건 아니라고 하니까.”
“일단 가서 보자고.”
정찰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원래 플랜트 길드의 소유였던 성에 도달했다.
보고대로 성에선 아무런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뭐 좀 있는 거 같냐?”
“아니, 성문이 부서졌는데 경비 하나도 안 세워 놨어.”
“그럼 가야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그들은 풀 무장을 하고 아주 천천히 성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내부엔 인간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네?”
“그럼 그건 뭐였지?”
“일단 어떤 놈이 점령했나, 그거부터 확인해 보자고.”
공격을 한 이들이 있으면 당연히 점령을 한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컨트롤 타워의 입구가 무너져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야. 애들 불러서 여기 있는 이것부터 치워.”
김용태가 명령을 내리자 헌터들이 하나둘 붙어 돌무더기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김무열이 시간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이봐. 일단 너희 성은 찾았으니까.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이제 우리 성으로 가자.”
김무열의 말에 김용태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했다.
“우린 여길 지켜야지. 우리가 왜 거기까지 가냐.”
“뭐라고?”
“막말로 너희 도와줬다가 여기 다시 빼앗기면 우리만 손해인데? 그때 너희가 도와줄 것도 아니잖아.”
“아니, 무슨 그런… 애초에 같이 온 게.”
“몰라. 나는 때려죽여도 여기서 못 나가니까. 너희 건 너희가 알아서들 해.”
잇속만 챙기고 입을 싹 닫아 버리는 김용태를 보며 김무열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이런 병신 같은 경우가 다 있을까.
그 엄청난 뻔뻔함에 이웃 성주 이진용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 새끼 옛날부터 그랬어. 가자, 그냥. 말씨름해 봐야 시간만 아깝다.”
“에라이. 혼자 잘 처먹고 잘살아라.”
이진용의 설득으로 플랜트 길드를 제외한 모든 병력이 성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김용태의 표정이 비열함으로 물들었다.
“저 새끼들 성에는 뭔가 좀 있어야 하는데.”
저주를 퍼붓고 있는 그를 향해 헌터 하나가 다가왔다.
“입구가 뚫렸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 감히 이 몸의 성을 처먹은 놈이 누구인지.”
마치 절대자의 면모로 느긋이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쾅!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게 무엇인지 채 인지조차 하기도 전.
쾅! 쾅! 콰쾅! 쾅! 쾅!
굉음이 일며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뭔…….”
갑작스러운 소란에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널을 뛰듯 날고 있는 수많은 헌터.
시야 한가득 수십 개의 흙기둥이 도미노처럼 일어나며 병력들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은 그때.
그가 무의식적으로 앞발을 내딛었다.
쾅!
충격과 함께 그의 신형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뭐야?’
싶기도 잠시.
곧이어 익숙한 음성이 그의 귀에 때려 박혔다.
“뭐야? 자네 또 죽었나? 그러게 가지 말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