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그날 오후.
반가운 손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오빠.”
태정의 여동생 소영이었다.
“뭐야? 네가 여길 왜……?”
“그냥 지나가다가 오빠가 보고 싶어서. 바쁜데 내가 방해한 거야?”
“아니, 바쁘긴 뭘. 그렇지 않아도 한번 갈까 했는데. 들어와.”
갑작스런 방문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그는 곧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언니,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가씨.”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소영이 태정과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오빠 방이야?”
“어. 좀 단출하지?”
“집으로 오면 좋을 텐데.”
“왜? 혼자 있으니까 무서워?”
“그건 아니구. 왠지 나만 좋은 곳에 사는 것 같아서.”
“난 거기보다 여기가 더 좋아. 사람들도 북적북적하고, 또 활동하려면 이쪽이 훨씬 편하잖아. 그보다 학원은 어때? 다닐 만해?”
“응. 근데 완전 크다? 전에 다니던 학교보다 여기 학원이 더 큰 것 같아. 선생님들도 전부 명문대 석박사 출신 교수님들이시고.”
“진짜? 그건 나도 몰랐는데. 교수 출신이 있었어? 친구는? 친구는 좀 사겼고?”
“이제 하루 나갔는데, 뭐. 근데 다들 좋아 보이더라. 오빠는? 그… 사냥 같은 거 해 봤어?”
“몇 번?”
“힘들진 않아? 오면서 보니까, 앞에 버스에서 사냥 다녀온 사람들이 내리던데, 완전 혼이 나가서 들어가더라. 다친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이 일 하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것도 아니고 괴물을 때려잡는 건데. 근데 내 걱정하지 마. 난 약한 곳만 골라 가니까.”
“나 걱정할까 봐 그렇게 말하는 거지?”
“바보. 내가 네 걱정을 왜 하냐. 이렇게 다 컸는데.”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태정은 돌연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올라온 거야? 입구에서 막았을 텐데.”
“그거 아이디 카드 주니까 통과시켜 주던데? 태호 아저씨가 따로 만들어 주신거 있거든.”
“그래? 과장님 열심히 일하시네.”
“참. 그런데 나 궁금한 거 있어, 오빠.”
“말해.”
“세아 언니랑 여기서 같이 지내는 거야?”
“어? 어. 왜?”
“언니 좋아해?”
“뭐!?”
느닷없는 질문에 태정이 황당한 눈으로 소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같이 지내면 맨날 붙어 있을 거 아냐. 방도 하나니까 당연히 잠도 같이 잘 테고. 좋아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게 돼?”
“야. 방이 하나라고 같이 잔다는 발상이 말이 되냐. 거실 있잖아. 그리고 세아 씨는 비서 일 때문에 있는 거지. 내가 데리고 온 게 아니야.”
“비서가 왜 같이 살아?”
“나도 첨엔 황당했다니까. 야 너 혹시 질투하냐. 오빠 뺐길까 봐.”
“치. 무슨 말이 그러냐? 난 오빠 애인 만나는 거 대찬성이야. 세아 언니는 되게 좋은 사람 같아 보여.”
“좋은 사람이긴 하지. 근데 사람은 그렇게 잠깐 보고 판단하는 거 아니야. 내가 늘 말했지. 사람은 두고두고 오래 봐야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까 너도 학원 다니면서 사람 좋아 보인다고 쉽게 믿고 그러지 마. 알았어?”
“응. 근데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왜?”
“그냥. 온 김에 오빠 집에서 하루 자고 싶어서. 언니랑 같이 자면 되잖아. 안 돼?”
“음. 불편할 텐데. 그래라. 그럼 내가 안방 비워 줄게.”
“고마워, 오빠.”
그날 저녁 태정의 집에선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정성스레 차려진 음식들과 맥주와 와인까지.
소영이 성인이 된 이후 처음 함께하는 술이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끝까지 사양하던 박세아도 합류해 한 병, 두 병 비워 갔고, 그렇게 그들은 순식간에 취기가 올라 얼굴이 벌개졌다.
“소영아, 너 그만 마셔야겠다. 얼굴이 너무 빨간데?”
“으응……? 나 아직 괜찮은뎅? 그쵸 언닝?”
혀 짧은 소영의 말에 박세아가 횡설수설하며 대답했다.
“네, 아가씨. 저는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것봐. 괜찮대. 더 마실 꾸야.”
“괜찮기는. 둘 다 상태가 별론데. 세아 씨도 이제 그만 마셔요.”
태정이 병을 가져가며 그리 말하자, 소영이 두 손으로 다시 뺏어 오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오빠, 그런데 너무 어색한 거 아냐?”
“뭐가?”
“오빠랑 언니 말이야. 별로 친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뭐랄까. 너무 사무적이라고 해야 하나? 서로 말도 좀 놓고 그래야 친해지지. 보스. 세아 씨. 이게 모야. 드라마 찍는 거야?”
“그야 일…….”
무언가 대답을 하려던 태정은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박세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말 편하게 할래요?”
“푸으. 제가 어떻게 그래요. 그럼 그럴까?”
“……?”
“오빠, 태정 오빠.”
“난리 났네, 이거.”
확실히 취한 것이 분명했다.
빈틈없던 그녀가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하지만 그 역시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 오늘부터 너 내 동생해라. 까짓꺼.”
“웅.”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자리가 무르익어 가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으응? 누구야, 오빠?”
“글쎄. 올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주아 씨가 어떻게…….”
그녀는 바로 초인클럽 리더의 동생이자 이웃집에 사는 서주아였다.
“이거 좀 전해 주려구요.”
그녀가 손에 든 쇼핑백을 건내며 말하자 받아 든 태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예요?”
“그때 사람들이랑 조금씩 모아서 산 거예요.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려서.”
“아이, 뭐 이런 걸. 덕분에 저도 재밌는 경험했는데요, 뭐.”
“성의니까 받아 주세요.”
“이러면 미안한데… 그런데 뭐예요?”
“대지의 숨결이라는 포션이에요. 5개밖에 안 되지만, 태정 씨한텐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서요.”
“아. 이 귀한걸. 그런데 이건 마켓에서는 팔지 않는 건데, 어디서 구한 거에요?”
“서울 경매장에 가서 받아 왔어요. 원래는 열 개를 받아 오려 했는데, 다섯 개밖에 못 구했어요.”
“다섯 개면 차고 넘치죠. 아무튼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다른 분들한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서주아를 보며 태정은 뭔가 아쉬운 듯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기.”
“네?”
“시간 괜찮으면 같이 한잔할래요? 동생들, 아니 제 여동생이 오랜만에 와서 한잔하고 있었거든요.”
태정의 권유에 그녀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괜히 제가 끼면 동생분 불편해요.”
“괜찮아요. 저희 동생은 낯 안 가려서. 들어와요. 이웃끼리 친해지면 좋죠. 게다가 우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동지잖아요. 클럽.”
“너무 실례인 것 같은데.”
그녀가 머뭇거리며 주저하는데, 마침 소영이 현관으로 나왔다.
“오빠, 누구야? 어? 되게 미인이시다. 누구? 여자 친구분이셔?”
“그냥 동료야, 같은 길 걷는. 제 동생 딱 봐도 착하게 생겼죠? 들어와요.”
“같이 놀아요, 언니.”
살짝 취한 소영이 서주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렇게 못내 안으로 끌려 들어온(?) 그녀가 자리에 착석했고 술자리는 더욱더 무르익어 갔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는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재잘재잘 떠들던 소영은 이미 잠이 든지 옛날이고,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는 박세아는 앉아는 있지만 눈은 잔뜩 감긴 상태였다.
비교적 멀쩡한 것은 서주아와 태정밖에 없었다.
“제가 너무 오래있었죠.”
“오래는요. 아까 사냥 얘기 재밌었어요. 종종 놀러 와요, 바로 옆집인데.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우리 생사를 함께한 동료잖아요.”
“고마워요. 이만 가 볼게요.”
“들어가요. 그분들한테 고맙단 말 꼭 전해 주시고요.”
서주아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오자, 박세아 역시 소영의 옆에서 잠이 든 상태였다.
“방에 들어가서 자라니까.”
의도치 않게 방을 사수한 태정은 양치를 하고 침대에 뻗었다.
동시에 눈이 감기며 잠이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네? 너 생각보다 술 약하더라?”
먼저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박세아를 향해 태정이 뱉은 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무언가를 컵에 따르더니, 그를 향해 가져왔다.
“이거 꿀물이에요. 식사하시기 전에 드시면 먹기 한결 편하실 거예요.”
그녀가 건낸 꿀물을 한잔 들이켠 태정은 다시 컵을 건내며 되물었다.
“근데 우리 말 놓기로 한 거 아니었나?”
“말을 놓다뇨. 어젠 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지만, 비서는 비서고 보스는 보스죠.”
너무나도 태연히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태정은 왠지 모를 뻘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말을 놔 버렸는데, 다시 경어를 쓴다는 것도 어색한 일.
“그래. 잘 부탁해.”
“네, 보스. 지금 식사 준비 다 됐는데 아가씨 깨울까요?”
“내가 할게.”
아직도 꿈나라에 가 있는 소영을 깨워 아침을 먹은 태정은 그녀를 바래다주기 위해 밖을 나섰다.
“나 혼자 가도 돼. 기사님 호출하면 금방 오실 거야.”
“그냥 가, 기다려야 되잖아. 나도 오늘은 한 바퀴 돌아볼까 하던 참이었어.”
그렇게 차를 타고 숙소를 빠져나가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펜스로 막혀 있었다.
그러자 김형식이 태정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긴 왜 막힌 거에요?”
“아마도 영지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제 보고받고 다 빠져나간 줄 알았는데, 아직인가 보네요. 차 돌리겠습니다.”
그렇게 차가 우회를 하고 다시 소영이 있는 남쪽 지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면서 그는 무수히 많은 버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영지전에 참가하는 헌터들을 실은 차량.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곳곳에선 신호수들이 나와 차량을 통제 중이었다.
‘대체 몇 명이 가는 거야? 끝이 없네.’
정체는 민간인 지구에 들어서야 해소가 됐다.
“다 왔다. 준비해서 학원 잘 가.”
“응. 오빠, 고마워. 아저씨, 감사합니다.”
소영을 내려 준 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도착하면 퀘스트나 한번 알아봐야지. 근데 진짜 조용하네. 다 떠났나.’
올 때와 다르게 도로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도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차가 남쪽 지구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
아까는 막혀 있던 중앙 제2광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핏 보이는 일렁이는 포털.
무의식적으로 그가 차량을 세웠다.
“저. 잠깐만요.”
“예? 예.”
“여기서부터 걸어갈게요.”
“여기서 말입니까? 숙소까지 아직 5km나 남았습니다.”
“둘러보고 갈게 있어서요. 가서 쉬고 계세요.”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차에서 내려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한눈에 다 들어오는 굉장한 크기의 포털.
포털의 크기는 박세아에게 들은 것만큼이나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건물 하나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
그 압도적인 크기에 넋을 잃기도 잠시.
‘들어가 볼까?’
갑자기 쓸데없는 욕구가 치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을 해 보지 못한 대이벤트.
다음에 참가를 하려면 몇 달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갈등을 하던 태정은 박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보스.
“영지전 말이야. 이거 꼭 훈련된 인원들만 참가가 가능한 거야?”
-근무자나 방어 부대에 편성이 된 인원들이 아니면 딱히 상관은 없어요.
“그럼 나는 들어가도 별 그건 없네?”
-그렇기야… 하지만. 그런데 가 봐야 혼자이실 텐데요? 이미 다 떠났을 거예요.
“오케이. 쉬어.”
-여보세요? 여보…….
뚝.
전화를 끊은 태정은 포털 앞에 서서 생각했다.
지금 가지 못하면 앞으로 최소 3달.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랴.
‘뭐 맛은 볼 수 있는 거니까.’
당당한 그의 신형이 포털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