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안녕하세요.”
“왔나? 거기 앉지.”
양태식의 권유에 태정이 소파에 앉으며 자리했다.
“길드 생활은 좀 어떤가. 지낼 만은 한가.”
“챙겨 주신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사실 한창 적응하고 있을 자네를 이렇게 따로 부른 건,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네. 시간을 많이 뺐을 순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혹 이번 서바이벌에 참가했나?”
차를 타고 오면서 쭉 예상을 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것 외엔 딱히 부를 만한 일이 없을 테니까.
“예.”
“그럼 구간 1위의 주인공이 자네인가.”
“부끄럽지만 맞습니다.”
“역시, 역시 그랬군. 설마 했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허허. 운이라니. 자네, 겸손이 너무 과하군. 이건 운 따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 헌터 생활을 20년 가까이 했지만, 이런 건 정말이지 처음 봤네. 괜히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게 아니지. 정말 대단한 일을 했어.”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한데,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지금까지 30단계가 깨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수로 거기까지 올라간 겐가?”
양태식의 물음에 태정은 딱히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둘러대 봐야 먹힐 일도 아니거니와, 이미 길드에 정착한 마당에 굳이 혼자 겉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벽을 뚫었습니다.”
“벽을 뚫어?”
“예. 벽을 뚫고 보니, 또 다른 방이 나오더군요. 본방과 똑같은 방이었습니다.”
“그럼 두 개의 방을 썼다는 건가?”
“꼭 두 개의 방이라기보단 되는 대로 잡다 보니 어떨 땐 6개, 어떨 땐 7개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허.”
태정의 설명을 듣던 양태식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벽을 뚫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3-400구간의 헌터들에겐 그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바이벌이 하루 이틀 진행된 것도 아니고, 그 오랜 기간 그 수많은 헌터들이 그런 생각 한번 해 보지 않았겠는가.
말인즉, 실수로라도 시도를 해 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두 번째는 더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서바이벌의 난이도가 낮다 한들, 7-8개의 방을 쓸어버린다는 것은 시간과 속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내려간다 해도 과연 될까 싶을 정도로 의문이 드는 일.
그만큼 10분이라는 제한 시간은 생각보다 굉장히 빡빡한 시간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이가 길드에 들어오다니. 클럽에서 괜히 내려온 게 아니었군.’
히든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한 그의 능력에, 양태식은 감탄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길드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 뭔가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게.”
“지금도 충분합니다.”
“아니야. 그래도 이건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 그 정도 성과면 충분히 능력은 검증이 됐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니, 전투병과에 적당한 자리를 하나 마련해 보겠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직책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정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직책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이니까.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자리는 좀 부담스럽습니다. 아는 것도 별로 없고요. 길드에 별 도움도 안 될 겁니다.”
“음. 이걸 거절할 줄은 몰랐군. 그럼 뭐가 좋을까…….”
양태식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눈치를 보던 태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이런 걸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뭔가? 뭐든 말해 보게.”
“포션을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포션? 그건 등급제로 이미 얻어 갈 수가 있지 않나.”
“제가 좀 많이 사용해서요.”
태정은 이미 익스클루브 등급으로 하루에 최상급 포션 100개가 무료로 지급이 되고 있었다.
그 외 포션류에 한 해 할인율이 50%나 적용이 되기 때문에, 금전적으로도 많은 이득을 보고 있는 상황.
문제는 기체의 사용으로 인해 마나가 생각 이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다연장 로켓만 해도 한 방에 수천의 마나가 소비되니, 부담 없이 사냥을 하기에 무료로 나오는 포션은 사실상 매우 적은 물량이었다.
더군다나 현재 그는 가지고 있는 돈을 거의 다 써 직접 살 수도 없는 형편.
그러니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포션이었다.
그것이 있어야 사냥이 가능하고, 돈을 벌어들일 수가 있을 테니까.
“최상급 포션 100개면 그 레벨대에서 일주일은 사용을 할 수 있는 물량일 텐데, 확실히 히든은 뭔가 달라도 다르군. 어디 보자. 마켓엔 정해진 수량이 있어 따로 빼긴 힘들 것 같고… 그렇지. 내 보관하고 있는 레어 등급의 포션이 한 세트 있는데 그걸 주면 되겠구만. 잠깐 기다리게.”
양태식은 그렇게 말하며 서재 뒤 비밀 공간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양손엔 은각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함이 하나 들려 있었다.
“열어 보게.”
양태식의 말에 태정이 함을 오픈했다.
그러자 일반 포션에 비해 4분의 1정도의 크기에 담긴 작은 병 10개가 들어 있었다.
“제가 보던 것들과는 좀 다르군요.”
“포션에도 여러 등급이 있지. 마켓에서 파는 것들은 보통 일반 등급으로 마정석을 통해 대량으로 찍어 내는 공산품이라 할 수 있네. 해서 하나 이상의 효과를 부여할 수가 없지. 오직 회복 기능 하나가 전부라 보면 돼. 하지만 하나 이상의 효과가 부여된 포션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이건 레어 등급으로 오직 특정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급 포션이네. 일명 대지의 숨결이라 부르지.”
“그럼 회복 말고 다른 게 더 있단 말씀이십니까.”
“시간이 붙어 있지.”
“시간이요?”
“이 대지의 숨결은 지속성 포션으로 8시간이란 소비 시간이 존재해. 그 시간 동안은 마나가 거의 무한으로 공급이 되지.”
“아.”
양태식의 말에 태정은 다시 한번 함에 놓인 작은 병을 바라봤다.
8시간의 무한 공급.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한 병이, 최상급 포션 100개의 가치보다 크다는 뜻이었다.
마나를 물 쓰듯 쓰는 태정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아이템.
“이런 것도 있었군요. 그런데 이 귀한 걸 저에게 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나야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물론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괘념치 말고 가져가게.”
“그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자네 밑에 2등을 한 도민아라는 자를 알고 있나. 그자도 오버 킬을 했던데.”
“전혀요. 저는 길드원들도 아직 잘 모르는걸요.”
“그렇군. 알겠네. 그럼 이만 나가 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본부를 빠져나온 태정은 언제 온 것인지 대기를 하고 있던 김형식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수행기사가 상관의 이동 경로를 몰라서 되겠습니까. 박세아 씨에게 전달받았습니다. 타십시오. 숙소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온 태정은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주아 씨?”
그녀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서주아였다.
“안녕하세요, 태정 씨.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아. 본부에 일이 좀 있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저야 뭐 항상 프리 하죠. 그런데 무슨 일로…….?”
“가기로 했던 초승달 대지 말이에요.”
“아아. 다들 정해졌나요?”
“근무를 빼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알아보니 이번 달엔 예약이 전부 찼더라고요.”
“예약이요? 예약이 뭐죠?”
“저희는 사냥을 나갈 때, 해당 던전에 신고를 하고 가거든요.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데, 이미 이번 달은 전부 팀이 있더라구요.”
“아. 그런 게 있는 줄은 또 몰랐네요. 그럼 다음 달은 자리가 비나요?”
“제일 빠른 게 8일이에요.”
“8일이라… 8일이면 너무 긴데…….”
“그래서 혹시 괜찮으시면 이렇게 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어떤?”
“내일 출발하는 팀이 있는데, 마침 그쪽에 인맥이 있어서 대여섯 명 정도 들어오는 건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들어 보니 백작의 성까지 들어갈 것 같던데. 태정 씨 생각은 어떠실까 싶어서…….”
“잠깐만요.”
예상치 못한 일에 태정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가 서주아와 함께 사냥을 가려한 것은 크게 2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빚을 좀 갚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슈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사람들에 대한 관심에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 긴 시간을 기다릴 순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가 다 알게 될 것이고, 그게 조금 이르냐 늦냐의 차이일 뿐이니까.
“그렇게 하죠, 그럼.”
“정말요?”
“8일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또 그때 다 같이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알고, 가서 말해 놓을게요. 아마 오늘 저녁에 작전 회의가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따로 제가 연락을 드릴게요.”
“네.”
그녀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태정은 박세아를 통해 던전의 자료를 수집했다.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번이고 자료를 훑던 그는 스트레칭을 하며 파일을 덮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으아. 벌써 저녁인가.”
시계를 확인하고 거실로 나온 태정은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 박세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태호에게 그녀에 대한 과거사를 들은 뒤로 태정은 그녀가 참 딱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과거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자신과 동생이 그녀에게서 투영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의지할 형제조차 없구나.’
많은 생각이 드는 가운데, 그녀가 나와 있는 그를 발견했다.
“언제 나오셨어요?”
“아, 방금 막.”
“앉으세요.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자리에 앉자 오늘도 진수성찬이 한가득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다 먹지도 못할 텐데.”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어서 드세요.”
“다음부턴 대충 해요. 그냥 배만 채우면 되는데.”
식사를 하며 태정은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뭔가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는데, 생각해 보니 괜한 오지랖이 아닐까 싶었다.
남의 개인사를 물을 만큼 특별히 친해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굳이 물을 필요가 있나. 내가 좀 더 잘해 주면 되는 거지.’
차린 정성에 배가 터지도록 한 끼를 해치운 그는 그날 밤 서주아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총회의는 따로 없고 저희끼리 간단하게 숙지할 것만 숙지하고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네. 일단 저희끼리 모여서 출발하기로 했으니까 8시 30분까지 커뮤니티에서 봐요.
“그래요, 그럼. 들어가요.”
태정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박세아가 수첩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확정이 났나요?”
“네. 아침에 보자고 하네요.”
“몇 시에요?”
“8시 30분에 다 같이 모이기로 했으니까, 간단히 이런저런 얘기하고 하면 한 9시면 출발을 하지 않을까요.”
“8시 30분. 커뮤니티. 9시 출발 예정.”
“되게 꼼꼼하시네.”
“일이니까요. 그럼 일찍 일어나셔야 하니까, 물 받아 놓을까요? 씻고 주무셔야죠.”
“그런 건 제가 해도 돼요. 이만 쉬어요. 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요, 박세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