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태정이 달성한 1위로 인해 여러 길드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그가 속해 있는 제닉스 역시 이 일로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왕좌의 버프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제닉스를 이끌고 있는 양태식이 턱을 주무르며 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그의 최측근 중 하나인 호위대장 이정모가 입을 열었다.
“길드원들의 말로는 1위를 한 자의 스테이지 레벨이 127이라고 하더군요.”
“나도 들었네. 127이라. 허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127이라니.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아레나의 질풍이 정확히 30단계까지 갔어. 만일 방의 규칙이 바뀌었다면 그 역시도 올라갔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그 구간 최강의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한 인물이니까.”
“혹. 짚이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아. 동일한 조건에서 질풍을 꺾으려면, 장비값만 해도 수백억은 들여야 될 거야. 문제는 그렇게 조건이 갖춰져도 127단계까지 올라가려면 못해도 방 하나당 3.5분은 돼야 해. 여기에 스테이지당 대기시간이 10분인데, 이것이 가능하냐는 말이지.”
양태식이 생각하기에 그런 직업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날고 긴다는 여러 히든 클래스를 떠올려 봐도 생각은 동일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너무 비현실적이군요. 스테이지가 올라갈수록 난이도 또한 올라갈 텐데, 평균 3.5분이라니. 더군다나 3-400구간이면 스킬의 한계도 존재할 테고 말입니다.”
“대체 누굴까. 닉네임도 우리 쪽에 한 번도 등록이 되지 않은 자던데. 한 번도… 잠깐.”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중얼거리던 그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하며 지나갔다.
“설마?”
“예?”
“아니, 아닐세. 잠깐 다른 게 생각이 나서 말이야.”
“아. 그럼 우선은 저희 길드원인 건 확실하니, 공지를 한번 띄워 볼까요?”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야. 이 일은 일단 덮어 두도록 하지.”
“예?”
“그냥 덮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이 있기 전까지 그대로 두겠습니다.”
“참. 전문은 띄웠나.”
“긴급으로 전 길드원들에게 함구하라 일러두었습니다.”
“그래. 괜히 이슈에 휘말릴 필요가 없지. 내려가면 다시 한번 입단속들 잘 시키게. 아마 이게 알려지면 언론이고 길드고 할 것 없이 죄다 들러붙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길드장님.”
호위대장이 나간 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양태식은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클럽에서 직통으로 추천을 받아 가입을 시킨 헌터.
그는 양태식이 처음 들어 보는 클래스를 가지고 있었다.
“메카닉이라 했던가. 설마 그자가…….”
* * *
박세아의 진수성찬으로 한 끼를 거하게 해치운 태정은 한숨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러자 TV를 시청 중인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 벌써 일어나셨어요? 여기 이것 좀 보세요.”
박세아의 말에 태정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뭔데요?”
“저기 뉴스, 지금 난리 났어요.”
그녀의 호들갑에 태정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그러자 긴급 편성으로 헌터 특집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요. 전 한산도의 간부이자 현 헌터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정종대 이사장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예, 반갑습니다.”
-오늘 서바이벌 3-400에서 127단계를 달성한 사람이 나왔는데요. 이게 과연 있을 수가 있는 일입니까?
“예. 저도 사실 헌터 생활을 30년 이상 했지만, 오늘 일은 학계에도 보고가 되지 않을 만큼 굉장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해외에서도 이 일로 말들이 굉장히 많은데, 일단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뉴스를 보던 태정은 자신이 한 일이 이슈가 되어 나오자, 뭔가 놀라우면서도 신기해했다.
이게 이 정도까지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인 것일까.
“저게 대단한 겁니까.”
같이 보고 있던 박세아를 향해 물은 말이었다.
“당연하죠.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니까요. 더 놀라운 사실은 뭔지 아세요?”
“뭔데요?”
“저 1등이 우리 길드 사람이라는 거예요.”
자랑스럽다는 듯 말을 꺼낸 박세아의 말에 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반응이 왜 그러세요? 우리 길드에서 1등이 나왔다구요. 길드, 아니 역사상 처음이라니까요?”
“그러니까요.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하네.”
“아무튼. 주무시고 계셔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이 일은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니 각별히 언행에 주의하셔야 돼요. 길드장님 특별 지시 사항이거든요.”
“만날 사람도 없습니다.”
뉴스는 끝이 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그것은 비단 방송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역시 발칵 뒤집히며 별의별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야. x발. 127단계가 말이 되냐?
-질풍 따인 거 실화냐고 ㅋㅋ
-아니, 시부랄. 이것도 버그가 있나? 어떻게 한 거야? 진짜 방복사라도 한 거임?
-내가 계산을 해 봤는데 말이 안 되는 게 저게 나오려면 방 하나당 3분 컷은 내야 됨. 3-400스킬로 3분 컷? 불가능임.
-근데 닉네임 쿨내 나지 않음? x나 대충 지었네.
-뭐별네 팬 카페도 생겼다 ㅋㅋ
“팬 카페까지? 뭐냐 진짜. 나 스타 된 거야?”
온통 이 일로 인해 떠들썩한 가운데,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막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때리고 있는데, 이태호 과장이 그를 찾아왔다.
“과장님이 어쩐 일로?”
“생활은 할 만하십니까.”
“챙겨 주신 덕분에요.”
“다름이 아니라 길드장님의 호출입니다.”
“마스터께서요? 무슨 일로 저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셔오라고만 해서.”
“그럼 잠시 옷 좀 입고 나가겠습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태정은 이태호와 함께 숙소를 빠져나왔다.
준비된 차를 타고 본부로 이동하고 있는 태정은 길드장이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대강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그 일로 인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박세아에게 듣기로 바로 전달까지만 해도 제닉스의 서바이벌 성과는 제로였다.
그런 길드에서 왕좌의 버프가 들어왔다는 것은 1위가 이곳에 있다는 뜻이었고, 그 구간이 3-400이라면 의심할 만한 후보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있는 그대로 말을 해야 하나?’
태정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운전을 하고 있는 이태호가 그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태정 님도 어제 뉴스 보셨습니까?”
“서바이벌 말인가요.”
“네. 보셨군요.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마의 30단계를 돌파한 것도 모자라 127이라니.”
“뭐…….”
태정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일은 도저히 낯이 뜨거워 할 수가 없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려는데, 이태호가 그를 슬쩍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혹시 그거… 태정 님 아니십니까?”
“예?”
“사실 어제 하루 종일 생각을 해 봤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얼떨떨한 기분이었는데, 누굴까 생각을 하자마자 태정 님이 떠오르더군요.”
“왜 하필 저를…….”
“그 구간에 헌터들은 정말 쟁쟁한 자들밖에 없습니다. 장비는 물론이고 훈련 체계 자체가 저희와는 차원이 다르죠. 그런 그들을 찍어 누르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클래스, 바로 히든 말입니다.
이태호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딱히 없다.
태정이 히든인 것을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라 한들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냥 잠깐 해 본다는 것이…….”
“역시. 역시, 그랬군요. 진짜 대단하십니다. 이런 게 바로 히든이란 거군요. 그 콧대 높던 톱 티어의 헌터들을 모두 눌러 버리다니. 정말 든든합니다, 태정 님 같은 분이 저희 길드에 와 주셔서.”
“별말씀을요. 그런데 히든이 저 하나 인가 보죠?”
“음. 길드 창립 초창기에 한 분이 계셨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안 계십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클럽의 일원이 되셨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길드에 클럽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길드장님과 저를 포함해서 몇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박세아 씨는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아.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는데, 길드 룰이라고 하니 딱히 불편한 건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사실 미와 지성을 동시에 겸비한 비서는 드물죠. 아마 저희 길드 핵심 간부 비서진 중에서도 그 정도 미인은 찾아보기가 힘들 겁니다.”
이태호의 말대로 박세아의 외모는 누가 봐도 미인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문제는 태정이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각성을 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온통 헌터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며칠 같이 있어 본 바로는 거의 모든 스케줄이 저에게 맞춰져 있던데, 비서는 사냥을 언제 가나요?”
“사냥이요? 무슨 사냥을 말씀하시는 건지…….”
“대충 보니 다들 사냥을 다니면서 근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데, 박세아 씨는 매일 집에만 있더군요.”
“아. 아직 모르고 계셨구나. 비서는 사냥을 갈 수가 없습니다. 각성자가 아니니까요.”
“예?”
“길드의 모든 비서는 헌터가 아닌 일반인입니다.”
“일반인이 어떻게 길드 업무를…….”
“완전한 일반인은 아니고 길드원의 가족에 한해서 선발을 하죠. 이후 훈련 기관에서 다년간 교육을 받으며 실무에 투입이 됩니다.”
“아. 그럼 일반 회사처럼 월급을 받고?”
“그건 또 아닙니다. 이미 가족 중 각성자가 있기 때문에 그 벌이만도 만만찮아 공식적으로 비서는 무급입니다.”
“예? 그럼 굳이 비서를 할 필요가 있나요? 월급도 안 나오는데 일만 죽어라 하는 거면…….”
태정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돈도 안 주는데 굳이 자처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 그의 상식으론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각성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희 길드엔 각성의 돌을 찾아다니는 팀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렇게 모인 돌들은 1급 메인 창고에 보관이 되어 있죠. 한 번 각성을 한 헌터들에게 이 돌은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길드원의 가족들에게 돌아가는데, 이 선발 과정에 비서가 포함이 됩니다.”
“아… 그럼 조금 이해가 가는군요. 각성이라… 그런 시스템이 있는 줄은 또 몰랐습니다.”
“하지만 모든 비서가 각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무에서 조금만 평가가 좋지 않아도 순번이 밀리게 되죠. 이건 외람된 말이지만 박세아 씨는 어떻게 보면 참 딱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 아버지와 단둘이었는데, 사고로 그녀의 아버지가 죽어 버렸죠. 하필 모아 둔 돈도 없이 그리 돼 버려… 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비서가 된 케이스입니다. 그 두 부녀 사이가 참 보기 좋았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러고 보면 참 헌터의 삶이라는 것도 부질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목숨을 담보로 싸워야 하니 말입니다. 아, 다 왔군요. 저는 일이 있어 여기서 이만 돌아가 봐야 합니다. 그때 거기 기억하십니까?”
“네.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