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역시, 그랬나.’
사실 태정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20위권에 들어가 있는 헌터가 무려 세 명.
그 정도 위치에 있는 길드는 한산도나 초인클럽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녀가 한산도였다면 사실상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레인저의 이무배가 기습 같은 짓은 할 수가 없었다.
“뭐야? 알고 있었어?”
“전혀요.”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 클럽 명성이 이것밖에 안 됐었나?”
“너무 뜻밖이라서요.”
“하긴. 우린 국내에선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제가 클럽에 들어갈 수 있나요?”
“동생도 히든이라며? 최소한의 조건은 갖췄으니 될 거야, 아마도.”
한설아의 대답에 태정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초인클럽의 일원이 된다는 것.
이건 엄청난 기회이자 행운이었다.
국내 공식 랭킹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어떤 길드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독보적인 단체.
랭킹 1위이자 정부 단체인 한산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무이한 길드.
그런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목숨을 한번 빚졌으니, 들어갈 명분도 충분하다.
‘이건 다시 없을 기회야. 여긴 월드 클래스라고.’
식사가 끝난 뒤 그들은 호텔을 나섰다.
“이제 어디로 가요? 클럽으로 바로 가나요?”
“잠깐 기다려 봐.”
한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반지의 색이 바뀌며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도청이 불가능한 장거리 통신 링이었다.
그녀는 태정을 힐끗 보더니, 이내 몸을 돌리며 어딘가와 통신을 시작했다.
“진, 나야. 응. 일단은 예상대로였어. 응. 그래. 알았어.”
짧은 통신을 끝낸 한설아가 태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자.”
“허락은 떨어졌어요?”
“대충은.”
“대충요? 뭐가 대충이에요?”
“동생은 그냥 이 누님만 믿으라구. 가자. 본부에 가기 전에 이 누님이 큰 선물 하나 할 테니까.”
한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차로 태정을 이끌었다.
“그런데 무슨 선물이에요?”
“가 보면 알아.”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강원도의 어느 한 해변이었다.
그리고 보이는 요트 한 대.
“저걸 탈 거야.”
“갑자기 배를요?”
“본부로 들어가려면 저걸 타야 해. 가는 길에 선물도 받아가려면.”
태정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그냥 잠자코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목숨을 빚졌는데, 의심을 할 필요가 뭐가 있으랴.
괜히 주절주절거리며 가볍게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와우.”
난생처음 요트에 올라탄 태정은 내부의 화려한 시설에 혀를 내둘렀다.
5성급 호텔 객실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고급진 내부.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태정이 구경을 하는 사이, 요트가 출발했다.
항해를 하는 내내 그는 목적지가 어디일지 예상해 봤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장 유력한 곳은 섬이었다.
그곳 외엔 딱히 배를 타고 갈 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빠르게 나아가던 요트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바다 한가운데 정박했다.
“됐다. 도착했어. 나와.”
한설아의 말에 태정이 데크로 올라갔다.
그러자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좌우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섬이나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것일까.
의아해진 태정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여기에 뭐가 있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바다뿐인 것 같은데.”
“맞아.”
“맞다니 그게 무슨…….”
“우린 이 바닷속으로 갈 거야.”
“예? 설마 이거 잠수함이었어요?”
어처구니없는 그의 말에 한설아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야. 요트는 두고 우리만 내려 갈 거야.”
“아. 전 또…….”
“준비됐지? 들어간다.”
“지금 바로요?”
“간다.”
뭐라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의 몸이 한설아의 손에 잡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대로 바다에 떨어지는 그들의 신형.
첨벙!
“으악! 이게 무슨 짓…….”
갑작스레 물에 던져진 태정은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순간적으로 뻗은 그의 손이 한설아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낚아챘다.
“이것 좀 놔! 머리!”
“어푸. 나 수영 못해… 요! 어푸! 억! 어업! 푸!”
머리가 잡혀 목이 꺾인 한설아는 최대한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태정에겐 전혀 통하지가 않는 눈치였다.
밀어내면 낼수록 계속해서 붙잡고 늘어지는 무서운 생존 본능.
결국 그녀는 매달려 있는 그를 데리고 그대로 잠수했다.
그렇게 몸이 쑥 하고 꺼져 버리자 태정의 발버둥이 더욱더 심해졌다.
하지만 한번 가라앉은 몸은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았고,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듯 속수무책으로 추락했다.
‘대체 왜!?’
의문이 들기도 잠시.
살기 위해 격렬히 몸을 흔들던 그의 몸짓이 급속도로 잦아들었다.
물속인데도 불구하고 숨이 전혀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손을 풀어 주며 한설아가 건낸 말이었다.
“물이… 코로 안 들어오네요.”
“네 주변에 있는 염동막 때문이야. 일종의 보호막이지.”
“아. 미리 말해 주시지.”
“못 느꼈어?”
“뭐를요?”
“물에 빠졌는데, 옷이 안 젖었잖아.”
“아.”
그러고 보니 물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이게 이상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태정을 보며 그녀가 아래를 가리켰다.
“아무튼 이제 안전한 거 확인했으니까. 잘 잡고 잘 따라와. 더 깊이 들어갈 거야. 참고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염동막이 풀리니까. 한눈팔지 말고 꽉 잡고 있어. 이 아래는 수압이 굉장히 세거든.”
한차례 경고와 함께 다시 그들의 신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여전히 긴장을 한 태정이지만 바닷속의 모습은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야말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의 다른 생생함.
거기에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이 웅장함과 거대한 공간은 인간이란 동물이 자연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만들 만큼 위대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경도 잠시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곧 바닷속이 캄캄해지며 바로 앞에 있는 한설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기…….”
“왜?”
“안 보여서요.”
“여긴 심해니까. 빛이 없어. 저기 저거 보여?”
“어디요?”
“저기. 하얀색 점 같은 거. 저 아래 있잖아.”
그녀의 말에 태정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아래를 살펴봤다.
자신의 손조차도 보이지 않은 완전한 어둠 속.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한참 눈을 굴리기도 잠시.
곧 그의 눈에 빛처럼 보이는 점 하나가 포착됐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커져 갔고, 그는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포털?”
“가끔 쉴 때 들리는 곳이야. 이런 거 처음 보지?”
“전혀… 상상도 못 했어요. 아니, 그보다 여길 찾아올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하네요.”
“내가 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외우거든. 들어가자.”
한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태정의 손을 이끌었고, 둘은 그렇게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이후. 드러난 배경은 새하얀 모래가 펼쳐진 해변이었다.
“어때? 경관 좋지?”
“확실히… 특이하긴 하네요. 심해 속에 해변이라니. 그런데 여긴 왜……?”
“말했잖아. 본부로 들어가기 전에 선물 하나 하겠다고. 이리 와 봐.”
한설아는 태정을 이끌어 야자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모래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곧 그녀의 손에 낡은 천 보따리 하나가 딸려 들어왔다.
“이거 봐.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있어.”
“그게 뭐예요?”
“이거? 좋은 거. 네 꺼야.”
“이게 그럼 선물이라는…….”
“크게 보면 그렇긴 한데. 이건 메인을 위한 에피타이저 정도랄까? 진짜는 따로 있거든.”
태정은 한설아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물이라고 하니 우선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같은 초특급 헌터가 주는 선물이라면 분명 평범한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데려온 것을 보면.
그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것일 확률이 높았다.
‘내 수준에선 상상도 하지 못할 아이템이 분명해. 잘하면 레어 장비일 수도.’
그가 속으로 기대를 하고 있는 사이, 보따리가 풀어졌다.
그리고 나온 내용물은 무언가가 담겨 있는 작은 병이었다.
“그게 뭐예요?”
“부스터 같은 거야. 체력 증강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지.”
“체력이면 일종의 스테미나 포션 같은 건가 보네요.”
“그거하곤 좀 달라. 평소엔 아무런 효과가 없거든. 이건 뭐랄까. 긴박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생존 전용 포션이라고나 할까. 뭐 아무튼 그래. 이제 옷 벗고 돌아앉아 봐.”
“예? 옷은 왜…….”
“이거 발라야 하니까.”
한설아의 말에 태정이 약간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제가 나중에 필요할 때 바를게요.”
“지금이 필요한 때야.”
“그럼 주세요. 제가 알아서…….”
“어허. 이건 구석구석 잘 발라 줘야 효과가 좋아. 그리고 내 손을 타야 더 극대화되지. 그러니까 편하게 돌아서 이 누님에게 모든 걸 맡겨.”
“아. 그래도 이건 뭔가 약간…….”
태정이 탈의를 망설이자 그녀가 턱을 괴며 말을 내뱉었다.
“보기보다 쑥맥이네.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평생 후회할 텐데 괜찮아? 이걸 안 하면 메인은 구경도 할 수 없는데, 궁금하지 않아? 네가 얻게 될 게 무엇인지.”
“그게 뭐예요? 제가 얻게 될 게.”
“지금은 알려 줄 수 없어. 미리 알면 재미가 없으니까. 어떡할래? 여기서 그만할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래. 무려 랭킹 20위권의 헌터가 주는 선물이야. 이런 기회를 날려 버리면 병신이나 다름없지.’
결정을 내린 듯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상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노가다로 단련된 근육질 몸매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 동생 몸 좋다. 이거 다 근육이야?”
“뭐… 자랑은 아니지만 나름 노가다로 단련된 실전 근육이라 할 수 있죠. 포터 일을 꽤 했거든요.”
“어쩐지. 과시용으로 만든 근육이랑은 뭔가 달라 보여. 이거 갑자기 동생이 남자로 보이는데?”
“예!?”
“농담이야. 그럼 바른다. 처음엔 좀 차가울 거야.”
통보와 함께 어느덧 그녀의 손이 그의 등에 닿았다.
움찔.
생에 처음으로 외간 여자의 손에 몸을 맡겨 본 태정은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거 은근 기분 이상하네.’
긴장을 해서인지 몸이 살짝 달아오른 태정은 심박수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약효가 도는 것일까?
“느낌 어때? 좀 후끈하지 않아?”
“확실히 몸이 좀 뜨거워진 거 같아요.”
“기분은?”
“글쎄요. 기분은 딱히… 그런데 뭔가 심장이 방방 뛰는 게 힘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벌써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이따 힘 좀 쓸 수 있겠어?”
“무슨 힘이요?”
“난 동생이 이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실망이라니 그게 무슨…….”
대화를 이어 가던 태정은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흘러가는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좀 이상한데?’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공간.
노골적으로 몸 구석구석을 훑고 있는 그녀의 손.
뭔가 야릇(?)하게 흘러가는 대화.
체력을 증강시켜 준다는 약까지.
이게 과연 선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설마 이거…….’
모든 정황을 끼워 맞춰 보던 태정은 끝내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정력제야?’
태정이 생각하기에 약의 정체는 정력제인 듯했다.
애초에 아무도 찾지 않는 이 평온한 휴양지에서 힘을 쓸 일이 뭐가 있을까.
더군다나 그의 옆엔 천상계 헌터인 그녀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 약을 바르면서부터 조금씩 신호(?)가 왔었던 태정이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약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을 만지는 것 따위로 어떻게 반응이 올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태정은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 상태로 가다간 정말 일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처음 본 여자에게 몸을 허락할 순 없었다.
괜히 8년 동안 지켜 온 순결이 아닌 것이다.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 그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 누님, 제가 사실…….”
“…….”
“누님?”
그녀를 부르던 태정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있어야 할 한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간 거야?’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를 찾던 태정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후방 야자 숲에서 인기척이 감지됐다.
“뭐예요. 사라진 줄…….”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리던 그는 말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엔 한설아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괴물 하나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 싶기도 잠시.
부아앙-!
엄청난 굉음이 일며 야자 숲 위로 시커먼 것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동시에 태정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