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반응을 할 새도 없이 주변 배경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어느새 태정의 눈앞엔 익숙한 도심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매우 친숙한 풍경.
‘뭐야? 우리 동네잖아?’
태정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과거 체력 단련을 하던 관악산이란 것을 깨달았다.
분명 소환을 당했던 곳은 압구정 근처였는데, 왜 나올 땐 이곳으로 나오게 된 것일까.
그가 의문에 빠져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정 씨.”
그는 조용석이었다.
뒤이어 서주아 등 나머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태정이 그리 말하자 조용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생은요. 저희는 업혀 나왔는데요. 태정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살아 있기나 했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데 왜 이곳에 떨어진 걸까요? 저흰 분명 정류장에 있었는데.”
“아. 그건 저도 잘은 모르지만, 방출 당할 때는 항상 게이트 근처에 배치가 되더라고요. 이건 제 생각인데 아마 안전 때문이지 않을까요? 도로 한가운데서 툭 하고 떨어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조용석의 말에 태정은 그제야 조금 떨어진 곳에 청색의 게이트가 일렁거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하긴 위험하긴 하겠네요.”
“참.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그거 얼른 숨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태정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스킬을 비활성으로 돌렸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광고하고 다닐 뻔했네요.”
“뭘 이런 걸 가지고 하하.”
그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서주아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
“사람? 어디? 난 모르겠는데?”
“9시 방향 언덕 나무 위야.”
그녀의 말에 태정과 조용석의 시선이 슬며시 돌아갔다.
그러자 정말 사람 하나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긴 왜 올라가 있는 거야? 어? 저 어깨 견장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레인저 길드잖아.”
“아. 레인저…….”
“저 사람뿐만이 아니야. 이쪽으로 5시 내려가는 길에도 세 명이나 있어. 바위 뒤에.”
“어? 그러네. 기분 나쁘게 훔쳐보는 거 같냐. 쟤들은 어디지?”
“그것까진 안 보여. 너무 멀어서.”
“근데 뭐… 우리랑 상관있나?”
“조금 전에 태정 씨를 봤을 수도 있잖아.”
서주아는 그렇게 말하며 태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이죠?”
“저는 뭐 거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나중에 가실 때 잘 살펴서 가세요. 별일이야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특히 저기 레인저 길드는… 좀 위험한 길드에요. 사건 사고도 많구요. 더군다나 태정 씨는 좀 희귀한 클래스라 만약 봤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바닥은 좀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아. 저도 그건…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태정은 이들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이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 신경을 써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닉스라고 했었지. 일단 후보로 올릴까?’
나중에 조건만 맞는다면 안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짧게나마 연이 있기도 하니, 오히려 더 괜찮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에 더 많이 알아봐야겠지만 말이다.
“얘기 다 했어? 그럼 우리 어디 가서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 어때요?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는데, 우린 생사를 함께했으니, 뒤풀이로 한잔 딱! 어때요? 좋을 거 같은데.”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성호의 말이었다.
그런 그의 제안에 태정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서 어쩌죠.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오늘은 좀 일찍 가 봐야 돼서요.”
“아. 바로 가시게요? 이거 좀 섭섭한데요. 제가 거하게 한잔 쏠려고 했는데.”
이성호의 말에 조용석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바쁘시면 가 보셔야죠. 아. 그리고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거니 부담은 가지지 마시구요. 길드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면 꼭 한 번 연락 주세요. 일개 길드원인 제가 감히 장담을 할 순 없지만, 태정 씨 정도면 아마 최고 대우로 모실 겁니다.”
그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든 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다음에 뵐 수 있으면 또 뵐게요. 다들 즐거웠습니다.”
조용석의 팀과 헤어진 태정은 서둘러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 와 본 곳이라 내려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주아의 충고대로 태정은 몇 번이고 뒤를 살피며 여기저기를 빙 둘러 길을 걸었다.
그녀의 조언대로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그렇게 돌고 돌아 집으로 복귀한 그는 진이 빠졌는지 침대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오늘 하루 정말 기네.”
의도치 않은 사냥과 사람들과의 만남.
그는 아직도 오늘의 일이 조금 얼떨떨한 상태였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들어가게 된 던전.
포션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삶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 대비 성장은 엄청 했네.”
오늘 하루만 45업을 한 태정이었다.
스스로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의 성장.
비록 아이템은 얻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알찬 하루였다.
“능력치나 한번 볼까.”
클래스: 메카닉
등급 [측정 불가]
LV.145 경험치 63,140,000
공격력 [n] 방어력 [600]
관통력 [12%] 명중률 [15%] 마력 [12,100]
장갑 [0] 실드 [0]
“이건 생각보다 안 오르네.”
45업을 한 것치고 능력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게 오른 건 마력 정도.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라드.”
-예, 주인님.
“관통력이랑 명중률은 정확히 어떤 능력치야?”
-관통력은 적의 고정 방어력을 관통하는 수치입니다. 현재 주인님의 관통력 수치가 12%니, 모든 물리 대상의 몬스터는 방어력이 12% 차감 후 들어가게 됩니다.
“뭐야? 그렇게 좋은 거였어?”
태정은 의외의 사실에 놀라워하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럼 명중률은?”
-명줄률은 고정 회피력에 대한 정확도 보정입니다.
“고정 회피력?”
-고정 회피력은 상대가 가진 고유의 회피력을 뜻하며, 이 수치가 붙은 몬스터나 타깃은 명중률이 없을 경우 데미지가 거의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통으로 맞아도 그렇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딜량이나 스킬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무적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음. 그럼 관통력이나 명중률은 아이템으로 올려야 되는 건가?”
-장비나 스킬로 보강을 하시거나, 레벨 업으로 소폭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장비라… 얘기만 들어도 엄청난 돈이 필요할 거 같은데.”
말을 들어 보니 둘 모두 그에게 꼭 필요한 능력치였다.
무조건 올려야 한다는 뜻.
“그건 그렇다 치고… 음? 이건 뭐지?”
상태창을 닫으려던 태정의 눈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글씨가 하나 들어왔다.
창 하단에 조그맣게 쓰여진 문장.
*경험치 디버프가 걸려 있습니다.
“이게 언제 생겼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내 무언가 하나를 생각해 냈다.
던전에서 빠져나오기 직전에 들은 알림.
“맞아. 막판에 디버프 어쩌고 했던 것 같아. 그게 이건가.”
바로 귀환이 돼 버려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태정이었다.
자연스레 제라드를 불렀다.
“이게 무슨 뜻이야?”
그의 질문에 제라드가 곧장 답을 내놓았다.
-퀘스트 미진행으로 획득 경험치에 디버프가 걸려 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해야 정상적인 경험치 획득이 가능하십니다.
“퀘스트라고? 퀘스트 오픈.”
[시작의 길 1-2]
당신은 혼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세력 및 길드에 가입해 보세요.
강력한 단체일수록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단. 각종 암투에 휘말릴 수 있으니,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임무: 길드 가입.
보상 – 경험치 디버프 해제.
*정상 경험치의 20%만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아. 새로 생겼구나.”
첫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 하고 두 번째 퀘스트가 오픈이 된 상태였다.
내용을 읽어 가던 태정은 수긍을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상 경험치의 20%라. 그럼 이제 진짜 길드에 들어가야 하긴 한다는 소린데. 근데 하나하나 어떻게 다 검증을 하지?”
자신은 누가 봐도 특별한 클래스였다.
당연히 너도나도 데리고 가려 할 것이 분명한 상황.
하지만 이는 마냥 좋아해선 안 될 일이었다.
헌터 세계에서의 스카웃은 일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
모든 사람에겐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한다.
가기 싫으면 가지 않으면 되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하지만 이쪽 세계는 단체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는 필요가 없었다.
특히 조금 특별하거나 희귀한 클래스들은 더욱더 선택권이 없다.
일단 발견이 되면 죽여서라도 끌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자신들이 쓰지 못하면 남도 쓰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곳이 바로 이 냉혹한 헌터들의 세계.
그래서 클래스를 함부로 밝힐 수가 없었다.
클래스를 밝히는 순간 그런 취급이 확정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것도 보통 고민이 아니네. 일단 거대 길드면서 평판이 좋은 곳 위주로 알아봐야겠다. 그 사람들이 속한 제닉스도 한번 검색을 해 보고.”
태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막 길드를 알아보려는데.
무언가 잊고 있던 것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맞다, 부스터.”
숙련도 퀘스트에서 보상으로 획득한 스킬.
당장 확인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킬 데이터.”
[외골격 타입 2 부스터.]
외골격 로봇에 착장되는 직렬 부스터.
기동력 [1~100]
지속시간 [3분]
소비 마나 [2,000]
“음. 외골격 다리랑 같이 쓰는 건가? 제라드, 여기 기동력이 뭐야? 이속이랑 같은 거야?”
-이속은 신체적 운동 능력을, 기동력은 장비 고유의 성능을 뜻합니다. 속도 개념에서의 차이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 그럼 결국 이속 100이나 다름이 없다는 거잖아?”
수치가 너무 높아 혹시나 해서 물은 말이었는데, 그가 생각한 것이 맞았다.
이속이 무려 100.
외골격 로봇 다리가 30이니, 수치로만 따지면 무려 3배 이상의 속도였다.
자연스레 성능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두 개 같이 사용하면 되나?”
-외골격 로봇 다리를 먼저 소환하시고, 후에 부스터를 활성화시키시면 됩니다.
“좋아, 그럼…….”
태정은 곧장 외골격 로봇 다리를 소환했다.
동시에 부스터를 활성화시키자, 양 종아리 부근에 스틸로 된 사각의 머플러 팁 여섯 쌍이 생겨났다.
[부스터 상시 개방 - 명령어 시동.]
“시동.”
[부스터가 상시 개방되었습니다.]
[상시 개방 해제 - 명령어 시동 해제.]
“이야. 이거 근데 어떻게…….”
태정이 외형에 감탄을 하며 뭔가를 물어보려는 그때.
돌연 그의 신형이 책상을 향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악!”
우당탕탕!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던 그의 신형이 책상을 박살 내고, 그대로 벽을 향해 돌진했다.
“억!?”
쾅!
한차례 굉음과 함께 석고로 된 벽이 반파되며 그의 몸이 불쑥 들어갔다 도로 튕겨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던 상황.
그나마도 아머 슈트를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대자로 뻗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태정은 스스로도 크게 당황을 한 눈치였다.
조작이 없었는데 갑자기 튀어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이래,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