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정비 중인 태정을 향해 조용석이 다가와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그냥 편하게 계세요. 어차피 한 팀인데요.”
“그럴 수가 있나요. 목숨을 구해 주신 것도 모자라 레벨 업도 18업이나 했는데요.”
조용석의 말은 진심이었다.
목숨을 구명받은 것만 해도 이미 그는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생각을 했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한데 그걸로도 모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장까지.
게다가 앞으로 남은 단계를 생각해 볼 때 아직도 성장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 90도로 머리를 박아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태정의 생각은 달랐다.
그 역시도 7단계까진 공짜로 경험치를 얻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라도 알면 참 좋을 텐데. 그건 좀 곤란하시겠죠?”
태정의 눈치를 보던 조용석이 슬며시 던진 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태정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해서요.”
“아아. 그냥 여쭤본 겁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참 저는 조용석입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태정은 더 이상 이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유태정입니다.”
“아. 유태정 님이셨군요. 그럼 태정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네, 뭐든 말씀하세요.”
“이곳을 나가면 저에 대한 얘기는 웬만하면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래 봬도 입 하나는 무겁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입단속 철저히 하라고 일러 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워낙 아웃사이더라 관심받는 걸 싫어해서요. 조용히 혼자 사냥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제가 태정 님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능력이시면, 굳이 줄줄이 달고 다니실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조용석은 실제로도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는 것은 그의 성격상 있을 수가 없는 일.
다만 그는 태정과 친분을 쌓고 싶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을 알고 지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다시 시간은 흘러 10단계가 시작됐다.
10단계 역시도 잡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전과 다름이 없는 종류의 몬스터.
그렇게 순식간에 놈들을 처리한 태정은 드디어 마지막 단계를 앞두고 있었다.
[라스트 스테이지까지 30분 남으셨습니다.]
“30분?”
태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조용석이 대답했다.
“마지막은 아마 대장일 겁니다.”
“대장요?”
“네. 리콜의 마지막은 항상 대장. 그러니까 보스였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다른 스테이지와는 다르게 조금 넉넉하죠.”
“아. 많이 와 보셨나 봐요.”
“아뇨. 이번이 두 번째인데, 이런 건 길드에서 다 알려 주는 거라… 혹시 길드가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저희 길드도 괜찮거든요. 제닉스 길드라고 들어는 보셨죠?”
제닉스 길드.
태정의 머릿속엔 없는 이름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알고 있는 길드는 몇 되지 않았다.
정말 유명하고 거대한 길드거나, 포터 시절 함께 작업을 했던 헌터들이 가입되어 있는 길드.
그 외엔 딱히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말을 해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글쎄요. 딱히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라.”
“아… 그러실 수 있죠. 그럼 진짜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소속이 있다고 해도 솔직히 태정 님 정도면 저희 길드장님이 충분히 모셔 오실 수 있을 거 같거든요. 대우도 엄청 좋을 거 같고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럼 생각 한번 꼭 해 보시고… 참. 저희 이제는 작전을 좀 짜야 할 거 같습니다.”
“작전이라뇨?”
“마지막 단계는 보스라서 난이도가 확 올라가거든요. 경험상 원딜 혼자서는 잡기가 좀 많이 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아, 물론 태정 님의 능력을 못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같이 하면 더 쉽게 잡을 테니까.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마나도 회복한 김에…….”
조용석이 눈치를 보며 말하자 태정이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험도 쌓을 겸 혼자서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별일이야 있으려구요. 저는 정비 좀 마저 하겠습니다.”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과 떨어진 구석에 자리했다.
“이봐, 제라드.”
-네, 주인님.
“여기 보스가 누구지?”
-리콜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랜덤이라 확인이 불가합니다.
“아예 정보가 없는 거야?”
-특성이 제각각이기에 소환이 되기 전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근접 특성이 나올 경우 상성상 상당히 힘든 전투가 될 것입니다.
“근접이라…….”
태정은 며칠 전 다녀왔던 대평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마주친 대전사 아실리우스.
그가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했던 근접형 몬스터였다.
사실 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근접형 몬스터에 대해 딱히 큰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원딜이 가지는 약점을 연사로 상쇄시킬 수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대부분의 근접형 몬스터를 아주 손쉽게 해치웠다.
일개 파티가 잡아야 할 대규모 무리 사냥도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실리우스는 달랐다.
초당 수십 발에 달하는 엄청난 연사력을 가진 그조차도 놈은 쉽게 제압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근거리에서의 넓은 행동 반경.
멀리 있을 땐 그나마 조준을 하기가 편했지만, 가까이 있을 땐 한 번만 발을 굴러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특히나 그 상대의 스피드가 빠르면 빠를수록 이 현상은 심했는데, 손이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땐 경험이 너무 없었어. 무기의 한계도 있었고.’
사실 대평원에서의 전투는 경험의 부재도 부재지만 물리적인 한계도 존재했었다.
저격을 제외하곤 무기의 사정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사거리 100미터 안팎의 무기들이 여럿 있고, 그 파괴력과 범위 역시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포탈에서 기어 나오자마자 때린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황.
대충 계산을 마친 그는 10분 정도를 남겨 놓고, 조용석 등을 향해 다가갔다.
“입구 밖으로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밖이요?”
“전투에 휘말리면 장담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조용석은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일행들을 데리고 입구 밖을 나섰다.
이제 온전히 석실은 그의 것이 되었다.
마음껏 난사를 하고 포격을 가해도 부담이 없다는 뜻.
잠시 후.
전투 임박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1분 남았습니다.]
“제라드, 포탈 앞에 좌표.”
-예. 주인님.
태정의 말에 제라드가 좌표를 찍었고, 양어깨의 포신이 정확히 그곳을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손에는 RPG-7까지 들려 있었는데, 이 세 방으로 그는 놈을 완전히 끝장낼 생각이었다.
‘어서 나와라.’
뚫어지게 포탈을 쳐다보기도 잠시.
[라스트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무언가가 포탈에서 형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자색으로 물들었고, 이내 갑주 따위를 입은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탈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체구.
태정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격발.’
툭!
슈아악!
피잉-!
각기 다른 파공음을 뿌리며 날아간 탄두들이 순식간에 포탈을 강타했다.
콰콰쾅!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석실 내부가 분진으로 가득 들어찼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폭발이었지만, 놈의 사망 알림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음을 인지한 태정은 곧장 m60으로 무기를 스위칭 한 뒤 제라드를 호출했다.
“놈의 정체가 뭐지?”
-혼돈의 기사 자르바입니다. 인간형 몬스터이며, 빠른 스피드와 단단한 방어력이 특징입니다.
“약점은?”
-목입니다.
“목?”
제라드의 말을 머릿속에 새긴 태정은 바로 m60을 전방위로 난사했다.
투두두두-! 투투투!
초당 수십 발에 달하는 엄청난 화력이 사방을 강타했다.
빈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촘촘한 빛의 향연.
어디에 있다 한들 맞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갈겨 대도 자르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제라드, 놈은 어디에 있지?”
-이곳은 특수 던전이라 먼거리에서의 위치 파악은 어렵습니다.
“아직 죽은 건 아니지?”
-그렇습니다.
상당한 화력을 퍼붓고도 놈이 나타나지 않자 그의 뇌리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면 뭔가 반응이 있어도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
그렇게 얼마나 더 퍼부었을까.
-위입니다.
“뭐?”
태정의 고개가 순간적으로 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자색의 물체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포착됐다.
동시에 그가 대지를 박차고 튀어 올랐다.
슉!
바람을 가르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르바의 검.
찢어진 티셔츠 사이로 은빛 아머 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까딱했으면 두 동강이 났을지도 모르는 상황.
전에 없던 긴장감이 그를 휘감기 시작했다.
첫 타를 무효로 날린 자르바는 이어 무지막지한 공격 퍼부어 댔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태정은 다섯 번이나 발을 굴러야 했다.
하지만 그도 마냥 당하고만 있지만은 않았다.
놈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격발된 수십 발의 탄환.
최소 열댓 발이 놈의 신형을 강타했다.
핑! 피잉-! 핑핑!
날아든 빛의 탄환이 모조리 튕겨 나오며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유리판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형태와도 비슷했다.
그것을 지켜본 태정은 놈을 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는커녕 아예 공격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내구력.
그만큼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대충 놈의 방어력을 파악한 태정은 m60을 집어넣고 화염방사기를 꺼내 들었다.
아실리우스전에서 대활약을 보여 줬던 무기.
에너지 탄이 안 된다면 화염은 먹혀들지 않을까.
슉!
다시 한번 자르바의 공격이 들어왔다.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한 태정은 들고 있던 방사기의 방아쇠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무지성으로 접근하던 자르바의 신형이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으로 휩싸였다.
화르르-!
성공인가 싶기도 잠시.
이내 놈의 신형이 불쑥 튀어나오며 검이 사선으로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그는 좌측으로 피하며 오른손에 장전된 발칸을 놈의 목에 겨눴다.
바로 그 순간.
자르바의 발이 태정의 복부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퍽!
“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진 태정은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검만 생각했지 그 상황에 발차기라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냥 자빠져 숨을 고를 시간이 없었다.
놈이 어느새 달려와 검을 내리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측으로 빙그르 돌아 벌떡 일어선 태정은 곧장 RPG-7으로 무기를 바꿔 들었다.
한 방에 승부를 보겠다는 뜻.
바로 그때 제라드의 경고음이 들려왔다.
-이 거리에서 격발 시 위험합니다.
“위험? 얼마나?”
-몸은 슈트가 있어 보호가 되나, 머리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