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
다음 사냥터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를 쉬기로 한 태정은, 느긋한 아침을 먹으며 TV를 시청 중이었다.
[일본 무역 협정 체결.]
[러시아 3차 파병 무산. 물적 자원으로 대체.]
[여신 최다솜 팬 사인회. 오전 11시 L백화점.]
“팬 사인회? 오늘이었나.”
뉴스를 보던 태정의 시선이 환하게 웃고 있는 TV 속 여인에게로 향했다.
최다솜.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 헌터 중 한 명이었다.
최연소 나이로 A등급을 찍은 3룡 7기 중 하나.
뿐만 아니라 능력만큼 미모도 출중해, 팬클럽 단체만 해도 스무 개가 넘을 정도로 핫한 셀럽이었다.
태정 역시 그녀의 수많은 팬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친구의 의미로.
“벌써. 8년인가.”
최다솜과 유태정은 초중고를 같이 나온 동창이었다.
무려 6년을 사귀기까지 했던 사이.
하지만 졸업 후 돌연 사라진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태정은 그녀가 헌터가 되었다는 것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사회의 떼가 타지 않았던 때라, 그녀가 왜 연락을 하지 않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딱 한 번.
그녀가 소속된 길드를 찾아갔지만, 알려 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느낄 새조차 없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동생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생활이 시작됐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르고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태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둘 다 헌터가 될 줄 누가 알았겠냐.’
다시 시선을 돌리며 밥을 먹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석호]
그의 불알친구였다.
“여보세요?”
-어, 나다, 석호.
“알아. 어쩐 일이냐, 주말 아침부터.”
-그냥 인마. 오랜만에 얼굴이나 좀 보자고. 나와라.
“지금?”
-그래. 놀면 뭐 하냐. 전해 줄 얘기도 있고.
“어디로 가면 되는데.”
-한강.
“뭔 한강까지나…….”
-옛날 생각도 나고 좋잖아. 나와, 인마.
“하여간. 위치나 찍어서 보내 놔.”
불시에 잡힌 약속이었지만, 태정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쉬려고 한 데다가,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은 태정은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한강의 고수부지.
저 멀리 김석호가 손을 흔들며 태정을 반겼다.
“오랜만이다, 인마.”
반갑게 인사를 하는 석호를 향해 태정은 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유치한 동물 그림 돗자리는 뭐냐? 소꿉놀이 왔냐?”
“일단 앉아.”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친구가 친구 보는데 일이 있어야 보냐. 이거나 마셔.”
“이게 뭔데?”
“저기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나는 약초를 달인 물이다. 정력에 좋다더라.”
“쓸 때도 없는데 정력은… 음. 맛은 괜찮네.”
“그렇지? 이거 인마, 비싼 거야. 근데 너 여자 친구는 안 만드냐?”
석호의 물음에 태정이 관심 없다는 듯 차를 호록거리며 대답했다.
“지금이 여자 만날 때냐.”
“왜? 소영이도 이제 다 컸고 걸리는 거 없잖아. 인마, 사람은 음양의 조화를 이뤄야 장수하는 거야.”
“너나 많이 해라. 나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다.”
“혹시. 너 아직도 다솜이 못 잊어서 그러냐.”
눈치를 보며 묻는 석호의 말에 태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 자그마치 8년이다. 8년이면 강산도 변해.”
“그렇긴 하지만 6년을 사귀고 아무 말도 없이 떠났는데. 궁금하지 않아?”
“딱히.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이야. 많이 컸네, 우리 태정이. 8년 전에 우리 집에서 울고불고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 새끼, 기억 왜곡하네. 내가 언제 그랬냐.”
“뭐 아무튼. 여기 기억하냐? 다솜이랑 같이 셋이서 자주 왔었잖아. 가슴 답답할 때.”
“그랬었지. 우리 다 돈이 없었으니까. 갈 때라곤 여기밖에 더 있었냐. 근데 이 자식 아까부터 왜 옛날 얘기를 하냐. 너 요새 뭐 힘드냐? 우울해?”
“우울은. 너무 긍정적이라 탈이지. 사실 오늘 너 부른 거, 다솜이 때문이거든.”
“뭐?”
“어제 다솜이가 나 찾아왔더라. 너만 괜찮으면 만나서 전할 얘기가 있다고.”
뜬금없는 석호의 말에 태정은 먹고 있던 차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전할 얘기? 무슨 얘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요즘 많이 힘든 모양이더라.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고.”
“아까 TV에선 괜찮던데? 스케줄이 많은가 보지. 그 유명한 3룡 7기 중 하나인데 오죽하겠냐.”
“그래서 만날 거야, 말거야?”
“됐어. 지금 만나서 뭐 하게.”
“안 궁금해?”
“알면 뭐가 달라지냐.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석호야. 이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도 한번 만나 주지 그러냐. 꼭 보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누가 들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다. 됐고. 몸이나 조심하라고 전해.”
“새끼, 폼 잡기는. 그건 그렇고, 걔가 헌터가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우리랑 떡볶이 먹고 웃고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안 그러냐?”
“그러고 보니 이 새끼는 안 끼는데 없이 다 끼어 다녔네?”
“그래서 애들이 우리 셋이 사귀냐고 그랬었잖냐… 야, 태정아.”
“왜?”
“세상 되게 불공평하지 않냐. 누구는 헌터가 돼서 하루에 몇천만 원, 몇억씩 벌고 다니는데. 누구는 개같이 일해도 한 달에 고작 몇 백인 게 말이야.”
석호의 푸념에 태정은 뜨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꼭 자신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솜이가 우리한테 연락 끊은 거 말이야.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 봤거든. 결국은 우리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아는 척해 봐야 득 될 거 없으니까.”
“아. 이 자식, 오늘 왜 이럴까? 진짜 뭔 일 있는 거 아냐? 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 형님이 오랜만에 거하게 한턱 쏜다.”
태정의 말에 김석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 김밥지옥?”
“짜식이, 인간 유태정 클라스 그것밖에 안 됐냐. 따라와라.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쏜다.”
태정이 석호를 데리고 간 곳은 강남의 유명 오마카세집이었다.
1인에 무려 50만 원.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중 열나게 검색을 해서 찾아낸 맛집이었다.
처음에 가격표를 보지 못한 석호는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계산서에 찍힌 금액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야. 너 설마 주, 죽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죽기는. 불알친구한테 이 정도도 못 사냐.”
“로또 됐어?”
“보너스 받았다, 보너스.”
“아무리 보너스라지만 1인분에 50만 원은… 잠깐 있어 봐. 내껀 입금해 줄게.”
“됐어, 인마. 우리 소영이가 옛날에 너희 집 반찬 얻어먹은 것만 해도 얼만데.”
“미안하잖아.”
“미안하면 나중에 소개팅이나 한번 해 주던가.”
석호와 헤어져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는 태정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 보였다.
‘이제 와서 굳이?’
자그마치 8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이제는 추억조차 희미한.
당시엔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을 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마음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이 응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8년이란 시간은 그런 시간이었다.
옛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정류장에 도착해 있었다.
‘음? 뭐야, 이 사람들은?’
정류장에 도착한 태정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일단의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야. 차를 한 대 사자니까? 매번 이게 뭐야? 우리 공용 자금 있잖아.”
“아, 글쎄. 택시가 싸게 먹힌다니까. 차 살 돈 있으면 포션을 하나라도 더 사지.”
“이 짠돌이.”
“이건 짠돌이가 아니라 합리적인 거야.”
손에 든 스태프와 등에 멘 검,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
그들은 누가 봐도 헌터였다.
여자 둘에 남자 둘.
‘팀인가 보네. 나도 팀 사냥 한번 해 봐야 하는데.’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모험 같은 것을 해 보고 싶은 태정이었다.
서로 머리를 맞대 작전을 짜고 힘을 합쳐 강한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
그것은 처음 각성을 한 이들에겐 로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금방 시들어진다는 것이 문제지만.
택시를 기다리며 할 것이 없던 태정은, 휴대폰으로 커뮤니티에 접속을 했다.
다음 던전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분간 손가락을 놀리던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레벨부턴 사냥을 가기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정이 가야 할 블루 게이트의 상위 던전은 대부분이 길드의 소유 아래 있었다.
이제부턴 소속된 길드가 있어야 원활한 사냥이 가능하다는 뜻.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2년 전, 대한민국에 보기 드문 클래스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전 세계 20여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테이밍 마스터.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탄탄대로만 걸을 것 같던 그는, 한 던전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이 됐다.
이례적으로 정부와 몇몇 대형 길드가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세간에 들리는 소문으론 경쟁 길드에서 죽였다느니, 말을 듣지 않아 길드 차원에서 제거를 했다느니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한 건 없었다.
다만, 과거 사례를 볼 때 이런 소문들이 전혀 신빙성 없는 말은 아니란 것이었다.
‘분명 나한테 관심이 쏟아지겠지.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할 테고. 그 과정에서 내가 피해를 입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어. 이건 일반 회사의 스카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길드에 대한 생각으로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데, 돌연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저…….”
“네?”
“곧 도착한다는데, 저희 먼저 타도 될까요?”
“아. 택시요? 네. 먼저 오셨는데 타세요.”
“앗. 고맙습니다.”
귀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한 그녀는 다시 일행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남자의 핀잔이 들려온다.
“야. 우리가 먼저 왔으니 당연히 우리가 먼저 타는 게 맞지. 뭘 그런 걸 물어보고 있냐.”
“바보. 우리는 헌터잖아. 민간인을 배려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라구.”
“그런 것도 높으신 양반들이나 하는 거지. 너 같은 쩌리가 무슨 배려를 한다고…….”
“야! 말 다 했어?”
“다 했다, 어쩔래?”
“야야. 둘 다 그만해. 저기 온다.”
다른 사내의 제지로 유치한 싸움을 끝낸 그들은 택시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갑자기 허공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순식간에 퍼져 그들을 뒤덮었고, 이후 4명의 헌터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태정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뭐야?”
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해하기도 잠시,
택시의 창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타실 겁니까?”
“예? 아, 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재수라 생각한 태정은 택시를 타려 문을 잡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앞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희미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팔라딘 외 4명. 리콜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