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대신관의 작은 후회
* * *
세상 일에는 명분이라는 것이 있고,
그 흐름의 원칙을 어길 경우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보든 것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지금 이 순간 소위 ‘명분’이라는 것을 잡은 엘프 교국은
마도국에 사람을 보내 이번 일과 관련하여 제국에 대한 비난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재 제국은 악신 아문을 섬기며 세계를 파멸로 이끌려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수를 소멸시키는데 실패한 놈들의 다음 목표는 이곳 마도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호오…”
교국 에서 온 사자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내보이는 마도왕 오버시어.
옥좌에 앉은 채 검은 로브로 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그자는 눈 앞에 있는 엘프 사자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경계를 해야겠지. 그것은 우리 마도국 전체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보물. 그것을 위협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마도국의 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도왕 폐하.”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어 고맙네. 화친에 대한 건은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결정할 터이니 기다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나름 긍정적인 느낌이 드는 답변에 만족해 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사자.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도왕의 입가에는 그대로 싸늘한 미소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쥐새끼 녀석이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일이 좀 더 제법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 같은걸?’
*
팔콘 제국의 대신관 에일린.
그녀는 근래 들어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에 진한 우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지 않은 채 마왕국과 공식적으로 손을 잡는 그림이 되어버린 엘프 교국.
거기다 그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데 사용했던 검은 불꽃을 구실로 하여, 사방에서는 팔콘 제국이 악신과 결탁한 사악한 집단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중이었다.
넬테리온을 섬기는 충실한 신도인 에일린의 입장에서 이는 참으로 크나큰 모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런 대외적인 문제를 둘째 치더라도 이 순간 에일린은 하루 하루 삶의 낙을 잃은 채 그저 공허하기 그지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삶의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그 남자
토라레.
그가 사라진 이후, 그녀는 텅 비어버린 집 안에서 홀로 지내며 진한 공허함을 씹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토라레님… 아마 지금도 슈드 그년과 같이 행복하게 지내고 게시겠지? 나만 빼놓고… 단 둘이서만…’
토라레가 슈드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곁에서 사라진 지 벌써 수개월 째.
이런 상황에서 에일린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슈드의 집으로 쳐들어가 토라레를 데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일련의 테러사건으로 인해서 현재 팔콘 제국과 마도국은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때 제국의 대신관인 그녀가 마도국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는 일.
자칫 하다간 토라레는 데려오긴커녕,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호시탐탐 자신을 제거하려 들고 있을 슈드의 칼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방법이 없어…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말로 운이 좋아서 제국이 마도국을 점령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토라레님을 데려올 방법이 전혀 없어.”
물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장 엘프 교국도 못 집어 삼킨 팔콘 제국이 그것보다 강한…
사실상 대륙 제 2의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마도국을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슈드는 마도국 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4마희중 한 명.
설령 전쟁의 결과 어찌어찌 마도국이 멸망한다 해도 그녀 정도의 실력자라면 토라레와 함께 외국으로 돌아가는 것 따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결국 현 시점에서 사실상 에일린이 토라레는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전무한 상황.
그렇게 에일린이 진심으로 사모하고 있지만.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그에게 진한 절망을 느끼고 있던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문득 이제는 이 세상 사람조차도 아닌 그 사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녀석… 그래도 언제나 내 곁에서 나만을 바라봐 주었었는데. 차라리 그 녀석이랑 함께였다면.. 쓸데 없는 욕심 때문에 용사 파티 따위는 하지 않고 그냥 녀석이랑 맺어졌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뒤늦게, 이제는 가능성 조차 남아 있지 않은 허망하기 그지 없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후회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에일린.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두 남자는 모두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사람은 행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며, 설령 그것이 세계의 평화에 위협을 줄 위협이 있다 해도 끝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모든 노력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저기… 슈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어머?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언제부터 노예가 주인님께 말대꾸를 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을까?”
“큭….”
“자 어서 먹어, 토라레는 나의 사랑하는 개이니까. 역시 밥도 개밥그릇에 먹는 게 정답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개처럼 짖으라는 건 조금 불편하니까 이 정도로 참아 줬으면 해.”
입가에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슈드.
이에 토라레는 극심한 굴욕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개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런데…
“잠깐. 개는 손을 쓰지 않잖아?”
“네?”
“당연히 입으로만 먹어야지 안 그래? 자, 어서 식기 전에 먹어. 이틀이나 굶어서 배도 많이 고플 텐데,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도록 해.”
“…”
어조는 가볍기 그지 없었으나, 동시에 그 안에 진한 살기를 담아 이야기를 하는 슈드.
이에 토라레는 여기서 더 이상 반항을 했다간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끔찍한 형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그대로 밥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리고…
“하웁…하웁…. 하웁…”
“후훗 잘 먹네. 역시 토라레는 억지로 힘을 써야지 말을 잘 듣는 타입이구나? 진작에 이렇게 해줬어야 했는데 내가 실수했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내 친구 놈이랑 그 사이를 못 참고 그딴 짓을 하면서 놀아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
섬뜩한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슈드.
이에 대해서 토라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굴욕을 감수 하면서 개밥을 입 안에 처넣을 수밖에 없었다.
‘제길… 그러니까 이놈의 좆 좀 적당히 놀렸어야 했는데.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릴 줄은…’
이곳에 온 뒤로도 끓어 넘치는 성욕을 참지 못한 채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리고 다녔던 토라레.
에일린 만큼은 아니지만, 슈드 역시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자주 있었던 만큼, 그는 그 틈을 이용하여 마도국의 마녀들 몇 명을 꼬셔 재미를 보곤 하였다.
그러나, 순진한 에일린과는 달리 슈드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전에 한 번 바람이 걸렸던 전적까지 있는 만큼 그녀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 해두고 있었다.
그 결과,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바람을 피운 현장이 발각되고 만 토라레.
그날 이후, 슈드는 그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명목 하에 토라레의 목에 개 목걸이를 채워 넣은 뒤 말 그대로 성노예를 겸한 개와 같은 대접을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밥을 굶겼으며, 툭 하면 채찍을 휘둘러 짐승을 조련하듯 학대를 일삼는 슈드.
더운 끔직한 것은, 이것이 전부 슈드가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벌이고 있는 짓이라는 사실이었으며,
이러한 집착은 토라레의 몸에 마법의 각인을 박아 넣는 것으로 그가 감히 도망칠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까지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꼼짝 없이 이 마녀에게 목줄이 체워진 채 지금과 같이 비참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게 된 토라레.
그러나.
이런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토라레는 여전히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은 그의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한 줄기 희망이라는 것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는 중이었다.
‘반드시 빠져나가 주고 말겠어… 이 토라레님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용사 파티까지 집어 삼켰던 이 몸이 여기서 쓰러질 까봐? 반드시 이 미친년의 손에서 벗어나 꿈꿔왔던 나만의 하렘을 만들어 내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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