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 * *
검은 불꽃을 이용한 작전이 마족들의 방해(?) 로 인해서 실패로 끝난 직후,
황제를 비롯한 팔콘 제국의 수뇌부는 급하게 이 다음에 이어질 사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진격을 해야 합니다. 비록 계획을 완벽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주저 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리한 진격은 오히려 해가 될 따름이네.”
두 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이어가는 그들.
한쪽은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것이 아까워서라도 끝을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며,
다른 한쪽은 일단 엘프 교국의 국토를 4할 이상 장악하는 성과를 거둔 만큼 이쯤에서 물러나 수비를 굳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퇴각한다.”
“네?”
“하… 하지만 폐하.”
“그리하도록, 이 이상 계속 엘프들과 전쟁을 이어 나가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방해를 하는 놈들이 있는 한, 우리들이 손을 쓰는 데엔 한계가 있다.”
“큭…”
“으음…”
최종 권한을 지니고 있는 황제의 결정에 일단 따를 수밖에 없게 된 신하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절대 군주의 명에 따라 신속하게 퇴각을 준비하는 한편, 이 순간 또렷한 분노를 내보이고 있는 황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전 황제가 이야기한 소위 ‘방해하는 놈들’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
‘마도국 인가…’
‘하긴, 그런 사태를 일으켜 놓고 놈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겠지.’
엘프 교국을 사실상 거의 다 집어 삼키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뒤통수를 후려 갈긴 마도국.
그래도 같은 인간의 국가인 만큼 어느 정도 신뢰를 지니고 있던 그들의 이런 배신 행위는 황제로 하여금 엘프들을 대하는 것 이상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 했으며, 이는 이 자리에 있는 팔콘 제국의 신하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닌, 그들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이 후로 제국의 행보에 큰 방해물이 될 것인 만큼, 그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마도국을 한 번 손 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선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고 한 동안 국력을 추슬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각오해라 더러운 마도국 녀석들, 내 반드시 이 빚은 확실하게 갚고 말 것이야!’
*
마족들의 도움을 받아 검은 불꽃을 정리하는데 성공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퇴각하는 제국군의 모습을 보게 된 엘프 교국.
그렇게 말 그대로 턱밑까지 다가왔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교황을 비롯한 엘프들은 그대로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다행이군, 이것으로 일단 한 숨을 돌릴 수 있겠어.”
“그런 것 같습니다 교황 성하.”
“다행히 제국군은 확실하게 물러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놈들이 다시 전력을 추스르고 움직인다면 또 어떻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당장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한 안도감을 느낌과 함께, 어느 정도 여유를 지닌 채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한 엘프들.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은 일단 전쟁으로 인해 횡폐화된 영토를 어떻게 복구시키느냐가 관건이었으나, 그에 앞서서 엘프들은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이대로 마족들의 요구를 받아 들어야만 한단 말인가?”
“어차피 검은 불꽃은 꺼졌고, 제국군도 물러가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어렵게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아무리 상황이 호전되었다 해도, 어느 정도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는 있었던 엘프들 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은 국가의 기둥뿌리를 뽑아서 줄 정도로 너무나도 가혹하기 그지 없는 저 마족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였던 마족들.
언제 다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그들을 상대로, 과연 국력과 더불어 교황의 권위를 실추 시키면서까지 조약을 유지해야 할지에 대해선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허면 자네들은 지금 마족들 사이에 잡혀 있는 옥타비아를 버리겠다는 뜻인가?”
“아… 아니요, 아..아닙니다 교황 성하. 저…저희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서 단호하게 제재를 가하는 교황.
이 순간, 그는 국가의 신뢰도 신뢰였지만 그 이상으로 그곳에 잡혀 있는 딸의 안위로 인해 일체 섣부른 짓은 하지 않기로 이미 마음을 굳혀 놓은 상태였다.
“물론 나 역시 마왕의 요구가 가혹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은 신의 뜻을 받드는 엘프들. 그런 우리들이 비겁하게 먼저 나서서 신의를 저버리는 짓을 할 수는 없다.”
“으음…”
“…”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며 계약의 이행을 종용하는 교황.
그러나 이 순간,
그곳에 있는 이들 중 대다수는 교황의 이런 태도를 지극히 못마땅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딸이 소중하다 해도 그렇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국가의 이득을 내버리겠다는 것인가?”
‘칫… 율리우스 교황, 평소에는 언제나 냉정한 사람이지만 딸 문제만 나오면 저렇게 무뎌진다니까…’
그렇게 지금의 이 상황에 불만을 품은 채 일단 대전을 나선 신하들.
그리고 잠시 후,
그곳에 참여했었던 몇몇 고위 엘프들은 자신들끼리 조용히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할지 논하기 시작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제아무리 교황 성하의 뜻이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서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는 저희 엘프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수많은 마족들 앞에서 교황의 자리에 있는 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니, 이는 분명 대대손손 치욕으로 남을 것입니다.”
“거기다 놈들에게 주는 배상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종 이권들 까지 고려하면 손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당장 저희도 황폐화된 국토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이 마당에…”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마족들과의 조약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고위 엘프들.
그때,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중년의 엘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키케로 공, 좋은 의견이 있는 것이오?”
이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대의원 키케로.
그는 눈 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교황은 분명 마족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고야 말 것이요, 신의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딸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 이상 분명 그렇게 할 테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의 이런 부정을 역이용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그게 무슨…”
“!... 서… 설마?”
키케로의 말에,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엘프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표정을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키케로는 작지만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더러우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어마어마한 손해와 더불어서 교국의 위신에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으음…”
“우리들은 성스러운 사명을 지니고 있는 엘프, 신께서 인정해주신 유일한 선택 받은 종족이자, 이 세상에 그분의 영광을 빛내야 할 숭고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몸이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저 사악한 악의 군주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곧 신께서 악에 굴복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 이런 끔직하기 그지 없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이오.”
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단호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 키케로의 말.
이에 엘프들은 근원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이라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지난 전쟁들의 여파로 인해 크게 흔들리고 만 엘프 교국의 위신은 그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무너졌던 자긍심을 일깨우는 키케로의 말은 그들로 하여금 무슨 수라도 꺼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설령 그것이, 너무나도 더럽고 추잡한 일이라 해도 말이다.
“난 동의 하겠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 하시오 키케로공.”
“교국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주신 넬타리온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 또한 동참하겠소.”
“군주가 이성을 잃고 나라를 흔들리게 한다면 신하로서 이를 바로 잡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에게 지시를 내려 주시오 키게로공. 아무리 큰 위험이 있다 해도 교국을 위해 이 한몸 불사르고 말겠소.”
그렇게 고민 끝에 키케로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한 고위 엘프들.
그들을 보면서, 키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고맙소 모두들. 분명 신께서도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들을 굽어살피실 것이오, 허면 지금부터 상세하게 계획을 논의해 보도록 하지. 어떻게 하면 이번 일을 확실하게 성사시킬 수 있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