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난 잘못한 거 없어!
* * *
짐꾼 토라레.
여성의 마음을 뒤흔드는 유려한 말솜씨와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외모, 그리고 남들보다 우월한 정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용사파티에 들어선 이후 본격적으로 그의 재능을 꽃피우게 되었다.
시작은 단순히 자신보다 우월한 지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과 친분을 쌓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토라레의 마음 속에는 한가지 욕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이용해 줄곧 바래왔던 부귀 영화를 쟁취하는 것.
이를 위한 가장 쉽고 방법으로 그는 용사가 마왕 토벌한 직후 그의 공적을 가로챌 계략을 꾸미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토라레는 이전보다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전념하였고.
결국 그는 용사 파티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토라레는 용사파티에 속해 있는 그녀들과 한가지 약조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들 이외에 다른 여성들과는 결코 관계를 맺어선 안 된다는 것.
비록 당장 자신 이외에 다른 세 명의 여성들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그녀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단 그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은 모두 공통적으로 각국에서 인정을 받은 최고위 실력자들이었다.
연적관계라고는 하지만, 일단은 어느 정도 서로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그녀들이었으며, 이에 그들 네 사람은 당장은 이 매력적인 남성과 엮일지 모르는 새로운 경쟁자들을 차단하자는 것에 대해선 의견을 일치하였다.
이는 혹여 계획이 모두 성공하고 토라레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경우 필연적으로 꼬이게 될 다른 여성들을 미연에 차단한다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는 사안.
그 결과, 토라레는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오직 그곳에 있는 네 명의 여성들하고만 관계를 맺겠다는 약조를 맺었으며, 실제로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은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용사파티에 들어간 이후 본격적으로 재능이 각성한 이 ‘여자를 꼬시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 4명의 여성만으로 만족하라는 것은 여러모로 답답한 일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라레는 약간의 욕심을 버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편이 그의 인생에 훨씬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나름대로 굳건히 다져 놓았던 토라레의 결심은 이내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크게 금이 가버리고 말았다.
그 시작은 용사의 마왕토벌 실패로 인해 그의 공적을 가로채서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는 계획이 깨지면서부터였다.
다행히 그 이후 용사파티의 여성들의 협력 덕분에 감옥에서 인생을 썩히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 피해는 토라레가 생각한 이상으로 심각하기 그지 없었다.
우선 일의 뒷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수인 여전사 테라를 피치 못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는 엘프 성기사 아멜다가 그들을 배신한 뒤 행방이 묘연해 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그가 공을 들여 만들었던 하렘의 두 여성들이 사라지면서 토라레는 점차 더 이상 여자를 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기다, 엘프 교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마녀 슈드 마저 본국으로 떠나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늘 그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한 에일린은 대성녀의 업무를 위해 집을 비우는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잦았다.
비록 그녀의 이런 노력 덕분에 더 이상 짐꾼 일 같이 비루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토라레였으나, 이렇게 소위 말하는 ‘안정권’에 들어서게 된 삶은 결코 토라레가 바랬던 그림이 아니었다.
생활 자체는 넉넉한 편이었지만, 이곳에는 그가 바랬던 부귀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가 생각했던 네 명의 여성들과 함께 즐기는 하렘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토라레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어차피 먼저 일처리를 똑바로 못한 건 저 녀석들이잖아? 저 놈들이 똑바로 용사를 이용해서 마왕을 죽이기만 했어도 내가 이렇게 약속을 어길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닌 그녀들이 잘못을 한 결과이며, 이에 따라서 본인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토라레.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거치며, 토라레는 끝내 용사파티의 여성들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토라레는 차마 자신에게 돈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에일린의 앞에서 대놓고 약속을 깨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끝까지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로 인해 그가 누리고 있는 윤택한 삶이 끝장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
그렇게 토라레는 먼 곳으로 출장을 자주 나가는 에일린의 눈을 피해서, 은밀히 나름대로 눈 여겨 보았던 마을의 여성들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천한 농부의 딸부터 고귀한 신분을 지닌 귀족 영애들까지 다양했으나,
그녀들은 하나같이 토라레의 달콤한 언변과 근사한 외모, 그리고 잠자리에서의 절륜한 태크닉에 사로잡혀 주기적으로 그와 관계를 맺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피임을 하는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것은 필수.
그렇게 토라레는 이곳 테베에서만 10 명이 넘는 여성들과 은밀히 관계를 이어 나갔으나 정작 에일린은 이런 사정을 까 많게 모른 채, 그저 집에 오는 그녀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토라레를 보면서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녀가 없는 사이 그녀의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나름대로 철저하게 유지되어 왔던 토라레의 비밀스러운 행위는 그의 입장에선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폭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 언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떠나가 있던 마녀 슈드의 귀환.
그것은 하필이면 그가 다른 여성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현장에 나타났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토라레의 얼굴에는 자동적으로 짙은 경악의 감정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
“…”
자신의 눈 앞에서 또렷하게 약속을 깨부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토라레.
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슈드는 한 순간 꼭지가 도는 듯 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섬뜩하기 그지 없는 마력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 잠시만요 슈드님. 이.. 이건 오해입니다. 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멋대로 침입해 저와 관계를…”
“ㅁ…뭐라고? 야!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린데? 애초에 나를 유혹해서 여기까지 관계를 끌고 간 사람은 바로 너였잖아!”
“내…내가 언제 그랬는데? 가만히 있는 사람을 함부로 따먹으려 든 창녀 주제에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
“…”
방금 전까지 야릇한 신음 소리를 내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때와는 달리 삽시간에 서로를 보면서 비난과 책임의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하는 두 사람.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슈드의 귀에 토라레의 변명 따위는 일절 들리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좀 더 부드러운 성격의 에일린이나 아멜다 였다면 상화잉 조금은 달라졌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슈드였다.
용사파티의 인간들 중 가장 더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토라레는 향한 애정은 에일린과 비슷한 수준으로 광기에 물들어 있다 할 수 있는 인물.
당장 경쟁심 때문에 동료였던 테라를 저버릴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할 정도로 냉혹하기 그지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그녀에게.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슈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저지른 행동.
“칫 기가 막혀! 너 이대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마!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런 모독을..”
그것은 바로…
팍!
“!!!”
다음 순간, 그대로 마치 토마토가 터져 버리듯 그 자리에서 피와 장기를 흩뿌리며 터져버린 여성의 몸.
제 아무리 위기에 몰려 변명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품에 안고 있던 여자가 수식간에 처참하게 살해 당한 장면을 보면서.
토라레는 적잖은 충격과 함께,
지금의 이 상황이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슈… 슈드…. 님?”
“하아… 정말이지… 설마 이렇게나 빨리 저희들과의 약속을 깨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 아니..나… 난…”
진한 분노가 느껴지는 슈드의 말에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토라레.
그러나 이 순간, 워낙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 여파로 인해 그의 입에선 차마 변변한 변명의 말조차 튀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사늘하게 경고를 내리고 있는 사안.
그것은... 만약 여기서 잘못 혀를 놀렸다간 그대로 자신 역시 곤죽이 된 저 여자와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포에 질려 있는 토라레의 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슈드는 그대로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안되겠다… 역시 어머님의 말씀대로 남자라는 생물은 얌전히 놓아두어선 안 되는 존재.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이 남자를 끌고 가서 철저하게 내 의지대로 조교시키는 것이 정답이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