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결승전에 오해가 가득하다?
* * *
“…으음…”
“에.. 그러니까… 본래 이번 대결의 참가자였던 샤뮤엘님께서 끝내 테러 사건의 뒤처리로 인해 기권하신 관계로, 이번 시합의 승자는 엘리사님이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얼떨결에 승리를 거머쥐게 되고 만 엘리사.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현재 엘리사의 마음 속에는 기쁨은커녕 약간의 짜증과 혼란의 감정만이 들끓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데?... 안 그래도 용사일 때문에 싱숭생숭해 죽겠는데 샤뮤엘 그 녀석은 왜 기권을…’
다른 것도 아닌 마왕국 최강의 전사라는 칭호가 걸려 있는 나르실 선별전 이었다.
일생 일대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는 이 시합에서 포기를 선언하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이와 관련해서 엘리사는 자동적으로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아까 용사와 함께 그 테러범들을 잡으러 갔었지? 설마 그 일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당시 엘리사는 여전히 어머니와 관련해 너무나도 커다란 헛다리를 짚었다는 사실에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테러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던 그녀였으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용사와 샤뮤엘이 함께 움직였다는 사실만은 인식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여기에 대해 그녀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머니의 일과 관련해 너무 멋대로 단정지음으로써 크나큰 오해를 한 만큼, 그녀는 일단 뚜렷한 정황이 보이기 전까진 일단 신중해야겠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무언가가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그런 점에서 일단 기억에 갈무리 정도는 해 둬겠어.’
그렇게 잠재적 위험 인물로 샤뮤엘을 지정하면서 살짝 기대했던 대결이 불발로 끝났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는 엘리사.
그러나 그 직후,
그녀는 어느 순간 다가와 버린 최종 결승전과, 그곳에 적혀 있는 이름이 무엇인지 뒤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 요… 용사? 용사가 내 다음 상대이자 결승상대라고?...’
솔직히 그녀 본인은 쭉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엘리사는 이 순간 자동적으로 진한 긴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어… 어쩌지… 바라고 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난 꼴이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하게 두근거리는데…’
짝사랑하는 사람과 검을 맞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이와 관련해서 엘리사는 차라리 혼란에 빠져 있을 때가 더 유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뻣뻣한 느낌에 사로잡힌 채 그대로 용사가 기다리고 있는 결승 전 무대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엘리사는 자신이 용사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용사의 활약을 옆에서 자주 봐온 입장인 만큼 이는 아주 당연한 사실.
하지만 설령 이 앞에 패배가 있다 해도 엘리사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녀가 인정한 존재인 용사에 의해 패배하게 된다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마마의 건도 그렇고, 샤뮤엘 건도 그렇고 지금까지 전투라 하기도 애매한 시합만 줄창있었단 말이지… 하지만 상대가 용사라면 그럴 걱정은 없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투구를 착용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엘리사.
이 순간, 그녀는 마음 놓고 전력을 쏟아 부을 생각과 함께 눈 앞에 있는 용사를 향해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용사는 그대로 대검을 뽑아 든 뒤 그녀를 맞이해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간다 용사!”
그 말과 함께, 그대로 그림자에 동화된 채 어마어마한 속도로 용사를 향해 돌격하는 엘리사.
그래도 심적인 부담으로 인해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걸었던 일라이어스 때와는 달리, 용사는 자신보다 명백히 강한 상대인 만큼, 현재 엘리사의 행동에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팍!
그녀의 혼신의 힘이 실린 일격을 가볍게 막아내는 용사.
그렇게,
정확히 엘리사 본인이 예상하고 있던 그림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그녀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용사… 이 정도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곧바로 뒤쪽으로 몸을 뺀 채 다시금 빈틈을 노려 돌격을 가하는 엘리사.
그러나, 마치 유성처럼 쏘아지는 그녀의 공격을 용사는 그저 물 흐르듯 가볍게 흘려 보낼 뿐이었다.
언뜻 보면 상황은 엘리사가 일방적으로 용사를 몰아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엘리사의 공격이 모조리 용사에 의해 차단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을 상대하는 듯한 막막함마저 느껴지는 상황.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엘리사는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엘리사의 마음 속에는 진한 희열로 가득 차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용사가 나의 공격을 받아주고 있어… 이건 분명… 자신의 앞에서 나의 전력을 보여 달라는 뜻이야!’
용사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검을 휘둘러 엘리사를 날려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는 반격은 하지 않은 채 단단한 거신상과 같이 오직 방어만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눈여겨보고 있던 엘리사를 향해 용사는 당당함이 선언하였다.
“어디 계속 와 보십시오. 당신의 어떤 공격을 하든 다 받아주겠습니다!”
“아!”
전사로서의 호기와 우월함이 느껴지는 용사의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걸 받아주겠다니…”
냉정하게 말해 어디 와볼테면 와보라는 정도의 뜻을 지닌 단순한 도발 수준의 말.
그러나, 용사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엘리사는 이를 전혀 다른 쪽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뭐야… 이건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사랑하고 있던 남자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쏟아내 보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선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살짝 흐물흐물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엘리사.
그리고 그녀의 이런 심정인 동요는 그대로 그녀의 공격 속도에 악영향을 미쳤다.
팍!
“!...”
*
쏟아지는 빗줄기와 같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 들던 엘리사의 공격.
암살자라는 특성상 스피드에 거의 몰 빵을 한 스텟을 지니고 있는 그녀인 만큼, 그 속도는 가히 경의로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엘리사의 공격을 막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이대로 반격을 가할 여유 또한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그녀의 공격에 방어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은 기왕 결승전인 만큼 허망하게 결과는 내버리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팬서비스에 관심이 없다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겠지… 당장 나라도 결승 전에서 삼연벙 같은 게 나왔으면 기분이 더러울 거야.’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나의 강함은 확실히 어필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 참가한 가장 큰 목적은 어디까지나 마왕국의 사람들에게 용사라는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괜히 귀찮다고 한방에 결승전을 끝내버린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지금의 나로선 일단 엘리사의 공격을 열심히 막아주다 적당한 선에서 끝장을 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 계속 와 보십시오. 당신의 어떤 공격을 하든 다 받아주겠습니다!”
별 의미 없이 약간 결승전 분위기에 취해 엘리사를 향해 날린 도발의 말.
그러나 그 직후..
“…”
‘어?’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현격하게 느려진 엘리사의 공격.
이에 대해서 난 순간적으로 진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 어째서? 방금 전까지 기세 등등하게 난타를 했으면서 왜 갑자기 이렇게 굼떠진 거지?’
거침 없는 화살과 같이 쏘아지던 공격이 마치 활시위가 풀리기라도 한 것 마냥 약화된 상황.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나의 머릿속에는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전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패배가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멘탈이 금이 간 건가? 저래 보여도 엘리사 은근히 그런 쪽에 약한 느낌이었으니까 말이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엘리사가 그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린 외모만큼 쉽게 좌절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던 엘리사.
내 입장에선 그것도 나름 귀여운 동생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는 썩 좋은 기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딴에는 약간의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방어만 한 것이었지만… 엘리사의 입장에서 이는 모독으로 여겨졌던 거야. 전사로서의 긍지를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심한 모독…’
목표를 가지고 전력을 쏟아 부었으나 그것이 아무런 미동도 없다면.
특히 그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한 입장이었다면 그 절망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대에게 기세 등등하게 도발의 말을 건낸 나의 행동은 안그래도 흔들리고 있던 엘리사의 맨탈에 결정타를 먹인 것이나 마찬가지 일 터였다.
‘투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저 안에서 엘리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지금까지 그녀가 이 나르실을 위해 정말로 열심히 준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나에게 있어서 이는 더욱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는 사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난 마음 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마치 울면서 오빠를 두드리고 있는 어린 동생을 달래주는 듯한 심정으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