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 * *
늦은 시간, 경비병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잠에 빠져든 지금 난 막사에 앉아 밤을 새우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용사의 몸이 된 이후 하루 이틀 잠을 안자는 것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 해서 내가 피로감 이라는 감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바로 눕고 싶다는 생각은 이 순간도 내 머리 속을 끝없이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도저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얌전히 대군 사이에 끼어서 적당히 꿀이나 빨려 했으나, 어쩌다 보니 선봉장이 되어 버린 상황.
그리고 이러한 날벼락 같은 사태는 나로 하여금 지금처럼 반강제적으로 날밤을 새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씨발… 어쩌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내가…’
차라리 나 혼자서 선봉장으로 나서는 것이면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왕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용사로서의 전투력은 절대로 장식이 아니었으며, 거기다 장비까지 충실하게 갖추고 있는 지금의 나였다.
날아오는 마법 포격과 화살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으며, 성벽위로 뛰어 올라 적들을 도륙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말 그대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무쌍을 찍는 것이 가능한 상황.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무력과 별개로 내가 처해있는 문제.
그것은…
그런 나의 뒤에는 내 직속 부하로 배정되어 있는 100명의 마족들이 필연적으로 함께 따라붙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절대로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적다고도 할 수 없는 병력들.
자칫 이들이 전멸 당하거나 큰 피해를 입게 될 경우, 인간 용사인 내가 아무리 많은 적들을 쳐죽인다 해도 ‘동족’을 함부로 희생시킨 이유로 인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대폭 깎일 우려가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진지 안에 처박아두고 싶지만… 그렇다 해서 기껏 받은 병력을 안 쓴다면 그건 그거대로 또 문제가 되겠지...’
내막이 어찌 되었든 일단 호의로 내려준 병력인 만큼, 이를 그냥 묵혀둔다면 자신들의 호의를 무시한다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쉽사리 사용할 수도, 그렇다 해서 놔둘 수도 없는
말 그대로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100명의 마족을
그렇게,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하기 그지 없는 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결국 한가지뿐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일반적인 전사라면 모를까,
사실상 세계관 최강자 급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나라면 아군 마족들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다 덤으로, 용사로서 내가 지니고 있는 능력은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게임 상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버프’ 스킬들 또한 적잖이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나 한 사람뿐만이 아닌, 주변의 아군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개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버프를 받은 마족들의 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을 일은 없는 상황.
단, 이렇게 될 경우 적절한 스킬 타이밍을 계산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고, 정 커버가 안 되는 공격은 내가 직접 나서서 막으며, 그 와중에 적들을 시기 적절하게 요격하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말 그대로 숨 넘어갈 정도로 정신 없고 바쁘기 그지 없을 전투가 이어질 가능성이 아주 농후했으며, 아울러 이와 관련해서 지금과 같은 철저한 사전 준비 또한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충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나는 어떻게 해서든 가급적 완벽한 플렌을 짜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득과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마땅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말이다.
‘까딱하면 나의 판단 하나에 수 십명이 죽어나갈 수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는 아침.
그 아래에서,
적과 아군을 합해 도합 3만에 가까운 생명들은, 이 순간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든 채 진형을 갖추고 도열해 있었다.
성 밖에서 진격을 준비하고 있는 2만 의 마족들.
그리고, 성 안쪽에서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7000의 종족 연합 병사들
그렇게 양측의 군대는 곧 이어질 혈겁을 예측하며 점점 더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 짙은 긴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군 진격하라! 저 나약한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이러한 팽팽하기 그지 없는 분위기를 확실하게 끊어낸 존재는 마족의 군단장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삼손 이었다.
“우와아아아!!!”
“진격하라!”
“안티옥을 수복하라!”
“종족 연합의 개들에게 죽음을!”
삼손의 명령에 따라 거침 없이 진군해 나가기 시작하는 마족 병사들.
한편,
마치 파도와 같이 밀려오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안티옥 성곽 위에 올라와 있던 파리섹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전장을 주시하였다.
“적들의 선봉은 누구지? 알아볼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병사들 중 유난히 시력이 밝은 이에게 질문을 하는 파리섹트.
그러나, 그의 물음에 대해서 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했고, 이에 대해서 파리섹트는 약간의 의문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지? 이 정도 거리에서 선봉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선봉에 서 있는 저 장수, 저런 복장과 저런 무기를 들고 있는 자는 여지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검은 갑주로 전신을 감싼 채 대검을 들고 있는 전사의 모습.
그의 바로 뒤에는 직속 부하로 보이는 100여명의 마족들이 따라붙고 있었으나, 이를 통해서도 병사는 적들의 선봉장이 누구인지 알아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정황상 처음 보는 신참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적들의 선봉장.
그리고 이에 대해서, 어려운 전투를 대비하고 있던 파리섹트의 얼굴에는 그대로 살짝 안도의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다행이 삼손과 같은 이름있는 장수가 아니로군, 그런 들소 같은 자들이 선봉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잘 하면 승기를 가져오는 열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적의 선봉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다면 적들의 기세 또한 쉽게 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점에서, 적의 선봉이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신입이라는 사실은 파리섹트의 입장에서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전쟁 경험이 일천한 녀석이라면 패닉에 빠지는 것도 쉬울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되면 적들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림과 동시에, 파리섹트는 곧바로 총 사령관으로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공격을 개시하라! 저 더러운 마족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려라!”
드디어 떨어진 파리섹트의 명령
이에 병사들은 즉시 눈 앞에 달려오는 마족들을 향해 준비된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발사!"
목표는 당연히 가장 앞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의 선봉대.
성곽에서 쏘아져 나가는 무수한 화살들이 거의 정확하게 그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빗줄기를 연상시키는 그 죽음의 폭우.
강철로 만들어져 있으며 마력까지 깃들어 있는 예리한 화살의 비는 그대로 적들의 선봉을 강타하고 심각한 피해를 안겨다 줄 터였다.
그런데…
“응?”
“뭐지?”
한 순간, 안티옥 병사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장면.
거리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들의 눈에는 선봉장을 보이는 이의 대검에 서려있는 검은 기운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
이처럼 흉흉한 기색을 내뿜으면서, 선봉장은 그대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비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팟!
한 순간 번쩍이는 검은 섬광.
마치 하늘을 갈라 버릴 것 같은 기세로 뻗어나가는 일격은 그대로 마족들을 향해 쏟아지던 화살의 비를 강타했다.
“무.. 무슨..?”
“어.. 어떻게 저런…”
무수한 죽음의 줄기들을 한 순간에 지워버리는 일격.
그 충격적인 장면에 안티옥의 병사들은…
그리고 그들의 대장인 파리섹트는
순간적으로 온 몸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당연히 먹혀들 것이라 생각했던 공격이 허망하게 소멸된 충격.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묵직한 공포를 얹어 주었으며, 이는 그들이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큭! 다들 진정 하라! 화살이 먹히지 않는다면 마법을 준비하라! 사정권에 들어오는 즉시 놈들을 포격한다!”
“아... ㄴ…네!”
“알겠습니다 장군!”
파리섹트의 일갈에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병사들.
마법사와 신관들이 주축이 된 마법 병단은 방금 전의 그 장면으로 인한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억지로 몸을 움직여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 앞에 그려지는 형형색색의 마법진,
불과 얼음,. 바람, 그리고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구체들.
비록 화살에 비해 사정거리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화살 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화력이 담겨 있었다.
“발사!”
파리섹트의 명령과 함께 그대로 전방을 향해 쏟아져 나가는 마법들.
그리고 이 순간, 비록 이와 관련해서 딱히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이 무수한 마법 공격의 목표는 방금 전 화살들을 처내버린 선봉장.
단 한 사람뿐이었다.
대상에 대한 공포에서 유발된 집중 공격.
가능한 빨리 저것을 처치하고 싶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그들로 하여금 수십에서 많게는 백명 이상을 몰살 시킬 수 있는 공격을 단 한 명에게만 쏟아 붓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
“뭐.. 뭐야?”
그대로 하늘 위로 뛰어 올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마법을 향해 달려가는 선봉장.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안티옥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은 그대로 의문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마법 포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쪽을 향해 덤벼드는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 할 수 있는 행동,
그러나..
일순간 그들의 머리 속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설마…’
이미 앞서 봤던 장면이 안겨주는 충격으로 인해 유발되는 사고.
그리고…
그들의 이런 생각에 응하듯, 그대로 선봉장은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마법들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콰과과광!!!!
한 순간 울려 퍼지는 요란한 폭발음.
그 직후, 병사들의 눈에는 상처하나 없이 다시 지면으로 내려와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그 무시무시한 발걸음을 내디디는 검은 갑주의 괴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 화살들을 처내던 검은 섬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면
이는 병사들의 가슴에 차가운 비수가 내리 꽂히는 것 같은 싸늘한 감각을 안겨다 주었다.
군대 단위에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포격을 단 한 사람이 무력화 시키는 모습.
이에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온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기 시작 했다.
“저… 저건 설마…”
“아… 아니 틀림 없어. 비록 갑옷의 색깔은 다르지만… 저것은 분명…”
지금까지 무수한 전쟁을 치러온 그들의 뇌리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장면.
검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도 저만한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그들은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마… 마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