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내가 왕년에 용사도 털어먹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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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병으로 위장해 적진의 후방에 잠입하는데 성공한 나와 마왕군 간부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준 병사들이 신관을 부르기 위해 떠난 직후, 나와 간부는 착용하고 있던 인간들의 갑옷을 벗은 뒤, 곧바로 우리들의 본래 장비로 갈아 입었다.
간부가 착용하고 있는 마법 주머니 안에서 보관되어 있던 나의 갑주와 대검.
그러나..
그것으로 다시금 완전 무장을 하는 과정에서, 이 순간 나의 시선은 눈 앞에 있는 그 마왕군 간부에게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설마 네놈은 이렇게 빈약한 몸에 욕정을 느끼는 건가?”
“아..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그자..
아니, 그녀의 말에 난 일단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속에 담겨 있는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가시질 않고 있었다.
‘솔직히 의외인걸. 마왕군 간부 중 한 명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약간 어색한 느낌으로 인간들의 갑주를 벗으며 자신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마왕군 간부.
그녀의 외모는 그 작은 체구에 맞는 어린 소녀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짧게 묶은 은발머리에, 이마에는 검은 외 뿔이 나있으며 붉은 눈을 가진 마족 소녀.
외모 자체는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지만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소녀답지 않은 한기와 냉정함이 흐르고 있었다.
‘뭐.. 마족들의 수명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니까. 실제로는 저 나이에 수십에서 수 백살 은 먹었을 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난 일단 대검을 손에 쥔 채 마지막 준비를 끝냈고,
그보다 살짝 더 늦게 그 마족 소녀.. 아니 간부는 보라빛 갑주와 두 자루의 붉은 검으로 무장을 한 채 준비를 끝마쳤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한다.”
“알았다. 동쪽구역을 네가 맡을 테니, 넌 서쪽을 처리하도록. 일이 빨리 끝나면 도와주러 가겠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네 놈이나 잘 하도록.”
나의 말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 뒤, 곧바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사라지는 간부.
그래도 나름 배려를 담아 한 이야기에 짜증을 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난 자동적으로 쓴웃음을 지은 뒤 그대로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 그럼.. 나도 바로 시작해야지. 겸사겸사 그 놈 모가지도 같이 썰어버리고 말이야.’
*
마을 롭의 군수품을 담당하고 있는 부장 글렌
그는 오늘 하루도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여기며, 부하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하! 오늘도 크게 한 건 해내셨습니다. 이번 일로 벌어들인 수익만 해도 자그마치 2000 골드가 넘습니다.”
“정말이지 글렌 부장님은 천재이십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완벽히 군수품을 빼돌리실 수 있는 것입니까?”
이번에 벌어들인 금화 주머니들을 짤랑 이면서 진심으로 감탄하는 부하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글렌은 탐욕스러운 미소와 함께 기분 좋게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군수품이란 게 원래부터 횡령에 쉽도록 구조가 되어 있거든, 워낙 많은 물건들이 오가는 만큼, 일부로 무게를 잴 때 조작된 저울을 사용하는 정도만 해도 티 안 나게 물건을 빼먹을 수 있어. 물론 이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만 가장 확실하게 먹히면서 쏠쏠하게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비법 중 하나지.”
“오오.. 그렇군요. 이런 식으로 또 하나 배워갑니다 부장님.”
“잘 기억해 두라고, 앞으로 조금 더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내 특별한 비법들을 하나 하나 알려 줄 테니까.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선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비법 들이지.”
“감사합니다 부장님, 자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부장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면서 오늘도 조금씩 조금씩 나라를 좀먹는 비법을 추종자들에게 전해주는 글렌 부장.
그때,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부하 중 한 명은 문득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로 글렌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부장님, 부장님께서 지금까지 벌어들이신 돈 중에 가장 큰 건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아아 저도 궁금합니다. 부장님 정도면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사건 한 두 개 정도는 있으시지 않습니까?”
“흠..흠.. 뭐 그리 대단한 것 까지는 아니고.. 확실히 기억에 남을 만한 큰 건이 몇 개 있긴 하지.”
부하들의 말에 약간 우쭐해진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는 글렌.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최근 들었던 소식과 관련하여 그가 크게 한 탕 해먹었던 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들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겠지? 이번에 출전했던 용사파티가 실패했다는 것 말일세.”
“아.. 그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진 전설의 용사인가 뭔가가 속해 있다는 그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실은 말이야. 내 일전에 그자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을 상대로 한탕 크게 해 먹은 적이 있었어.”
“오오.. 그렇습니까?”
“그래, 분명 용사파티에 속해 있던 엘프 성기사랑 마법사였었지. 출정식에서 얼굴도 확인 한 것이니 분명 사실이야.”
“대단하군요, 마왕 퇴치를 실패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전설이라 불리던 용사파티를 털어 먹으시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으셨습니까?”
상당히 유명한 거물급 인사를 털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을 내보이는 부하들,
그런 그들을 보면서. 글렌은 짙은 우월감이 담겨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했다.
“후후, 뭐 솔직히 말하면 방법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 그 녀석들 싸움은 잘 할지 모르겠지만, 법률이랑 시세 파악에는 꽝인 놈들이었거든. 식량하고 군수품을 보충하려던 놈들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가격을 듬뿍 올려 받았지, 거기다 덤으로 놈들이 가져온 물품이랑 화폐의 가치 등은 최대한 깎은 덕분에 그 한번으로 한탕 크게 해먹을 수 있었어.”
“허허.. 아니, 그렇게 단순한 방법이 정말로 먹히던가요?”
“단순하기 때문에 먹힌 거지, 애초에 그 놈들 이곳에서 식량과 무기를 공급받으려면 무조건 내 손을 거쳐야 했고, 거기다 상황도 급했던 터라 설령 내막을 알고 있다 해도 함부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실제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용사파티인 만큼 당시 글렌에겐 일정 수준의 지원은 의무적으로 해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글렌은 이러한 사실을 교묘히 숨긴 채 그들에게 불리한 거래를 요청했고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내막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능한 빨리 군수품을 마련해 출발 해야만 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큰 돈을 들여가며 거래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 참.. 칼보다 무서운 게 펜이랑 입이라더니 딱 들어 맞는 이야기군요.”
“원래 지가 잘났다 생각하는 녀석들이 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까딱하면 목이 달아나는 그 상황에서 당당하게 사기를 치신 글렌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하하! 본래 이렇게 사람을 등쳐먹는 일에는 항상 배포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옛말에도 있지 않나. 가장 용감한 사람은 마왕한테 돌격하는 용사가 아닌 국왕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상인이라고 말이야.”
“과연! 그 말이 정답입니다!”
“마왕한테 도망친 용사파티 놈들 따위보다는 우리 글렌 부장님께서 훨씬 용맹하십니다!”
“용맹하신 부장님을 위하여!”
그렇게 자신의 화려한 ‘업적’을 자랑하며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키는 글렌과 그에게 아부를 하는 부하들.
한껏 들뜬 기분 속에서 끝도 없이 술을 들이키는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무엇 하나 무서울 것이 없었다.
평소에도 간을 배 밖으로 내놓고 살아가는 전문 횡령꾼들 이었으며, 심지어 오늘 글렌의 입에서 나온 용사 파티를 털어버린 이야기는 그들을 한층 더 분위기에 취해 평소 이상으로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술과 분위기에 취하여 반쯤 정신줄을 놓게 된 그들.
그때..
콰과광!!!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요란한 폭발음.
이에 술에 취해 꽐라가 되어 있던 그들은 그대로 침침하기 그지 없는 눈을 꿈뻑 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니.. 끄윽.. 뭐야.. 이게 무슨 소란이야?”
소리만으로도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느긋함 마저 느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들.
지나친 취기와 근거 없는 자신감을 잔뜩 불어 넣게 만드는 대화의 결과, 그들은 눈 앞에 닥친 커다란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혼미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이봐! 거기 누구야아!”
“가.. 감히 어르신들이.. 딸꾹!... 한참 마시고 있는데.. 이 무스으은..”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문 쪽으로 기어가듯이 다가가는 부하들과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흔들며 혼미한 정신을 수습하려 드는 글렌.
그때..
“커헉!”
“끄허어억!”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부하들의 비명 소리.
이에 글렌은 한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듯 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두 눈이 번쩍 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눈 앞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 존재..
검은 갑주를 착용하고 있으며, 피가 묻은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그것은, 번뜩이는 안광을 발산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찾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