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응?
* * *
마왕의 입에서 나온 유감 이라는 말..
무언가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잇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난 본능적으로 그녀가 나를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씨발 이렇게 까지 해줬으면 살려줄 법하지 않아? 진짜로 날 이대로 죽여버릴 생각인 거냐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안 그래도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으로 인해 짙은 긴장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그대로 감당할 수 없는 패닉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방금 전 간신히 생각해낸 그럴 듯 한 변명 거리를 정말로 힘겹게 밀어 붙였던 나였다.
하지만, 그 최후의 노력이 완벽하게 막혀버린 지금,
난 더 이상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 낼 겨를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죽는..다고..? ..죽어? .. 정말로?.. 정말.. 나 이대로..아무것도 못하고 끝장나 버리는 거야?”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사실과 함께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차가운 현실에 대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나의 마음을 휘감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나에게는 더 이상 냉정하게 무언가를 떠올릴 여력 따위는 남지 않게 되었다.
‘죽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그 개년들 하고 같이 죽어버렸지,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가슴속에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하는 생존에 대한 열망.
이에 따라서, 난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고 자시고 에 대해 고려할 여유조차 잃어버린 채 그대로 절망에 찬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살려.. 주세요..”
명예를 중시한다는 전사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목숨 구걸.
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인해 기분이 나빠진 마왕이 나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릴 지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애원할 수 밖에 없었다.
무기도 압수당했으며 한쪽 팔마저 정상이 아닌 지금 애초에 마왕을 상대로 전투는 절대 무리.
남은 것은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고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용사로서의 채면 같은 것은 내다 버린 채 마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나.
그 순간..
“!....”
엎드려있는 나의 머리 위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그 직후, 이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기 도 전,
나의 귓가에는…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마왕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알았다.. 살려주마.”
*
자신의 눈 앞에서 절망과 체념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사.
그를 보면서, 마왕은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경의를 표할만한 능력과 심성을 지니고 있던 존재.
그러나, 지금 그는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최후의 명예까지 산산이 부숴져 버리고 만 상태였다.
용사로서도.. 그리고 한 사람의 전사로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비참하면서도 가엽기 그지 없는 모습.
그리고 그런 상태로, 용사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마왕인 자신에게 말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동시에, 명예와 신념을 지닌 채 살아왔던 과거를 미련하고 무의미했던 것이라 칭하면서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여태까지 한 번도 흔들림이 없던 용사가 이렇게나 망가져 버리다니..’
그의 눈부신 활약을 마법과 부하들을 통해 보고 들어온 입장에서, 동시에 이런 용사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힘을 키워온 자로서
마왕은 한때 스스로의 숙적이라 여겨왔던 존재의 이런 절망적인 모습을 보며, 아주 약간의 진심을 내보이며 말했다.
“..유감이구나..”
“!...”
그녀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더더욱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용사.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마왕에게 이런 식의 동정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마음에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준 듯싶었다.
그리고 그 직후..
“…살려..주세요…”
“...”
용사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한마디.
짙은 좌절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통해서,
마왕은 방금 전까지 미약하게 나마 유지되고 있던 그 남자의 한줄기 자존심마저 완벽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망과 괴로움, 그리고 후회만을 내보이고 있는 용사.
자신의 정 대칭점에 서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남 같지 않게 느껴졌던 존재.
그런 존재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모습을 보면서,
마왕은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대로 자신도 모르게 이 가여운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 그녀는 이 남자에게 좋은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아울러 혹 가능하다면.. 이렇게 정신적으로 무너져 있는 이 남자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기 시작했다.
비록 그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운 감정이 든 것은 맞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아울러 자신을 배반한 인간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다면,
이를 통해 용사가그녀의 수하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마왕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여기에 온 목적도 그것 때문이었고 말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경험이 전무한 마왕에게 있어서,과연 그녀의 말주변으로 용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벨제뷰티를 불러오는 편이 좋았을 것을.. 짐이 공연히 고집을 부린 것은 실책이었던 것 같구나..’
대화에 유능한 부하를 데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마왕.
그렇게 내심 후회를 하면서 고민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그것은.. 그녀가 생각해도 투박하기 그지 없는.
그다지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는 짧은 한 문장이었다.
“알았다.. 살려주마.”
“!....”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말 밖에 못하냐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한 마디.
그러나.. 그녀의 이런 ‘위로’의 말에 대해서 용사는 의외로 제법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했다.
한 순간, 다 죽어가던 얼굴에 감돌기 시작하는 한 줄기의 밝은 빛.
이에 마왕은 조금 의아한 기분을 느끼면서, 일단은 계속해서 생각하는 대로 하고싶은 말을 던져보기 시작했다.
“그대를 살려주겠다. 그리고.. 그대에게 어울리는 기회 또한 주도록 하겠다. 다시금 명예를 손에 넣을 기회를.. 그대를 배신한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전사로서 세상에 너의 이름을 이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아…”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는 용사.
그렇게 동요하고 있는 듯 한 그를 보면서 마왕은 약간 분위기를 탄 채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꺼내놓기 시작했다.
“다 주겠노라. 그대가 원하는 명예도 그리고 복수도, 원한다면 그 이상의 것들도!그러니 용사여,짐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영원한 복종의 서약을 맺도록 하라! 짐이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안겨줄 수 있도록!”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에 휩쓸려 강하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마왕.
그러나,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는 이건 조금 너무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인간들에게 배신당했다 하지만, 그래도 용사는 엄연히 인간이었다.
그것도 인간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결한 영웅.
그런 그가 과연 그녀의 권유에 따라 줄 지에 대해선… 솔직히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긴 했다만, 하하.. 솔직히그런 게 이렇게 쉽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아무리 인간들에게 배반을 당했더라도 용사인 것을..’
그렇게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주변이 없음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하기 시작하는 마왕
그런데..
털썩!
“!?!?”
다음 순간, 그대로 마왕의 앞에 냉큼 무릎을 꿇어버리는 용사.
이어서 그녀의 귓가에는 용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맹세하겠습니다마왕 폐하!용사 엘런 세이비어! 마족의 군주이시자 새로운 소인의 주인이신 마왕님께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바 입니다!”
“…”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종을 선언하는 용사.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왕은 자신이 권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니설마.. 방금 전 짐의 어설픈 말이 제법 위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짐에게 그런 쪽에 재능이 있었을 리가…. 아..아니,.. 그게 아니다. 이것은 분명..’
의문과 약간의 충격 속에서 용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마왕.
그 순간, 그녀의 눈에는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하게 비추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용사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강렬한 열망이었다.
방금 전 시들어가던 때와는 전혀 다른,마치 지옥의 불길과 같이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마왕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용사가 왜 지체 없이 그녀에게 굴복한 것인지.
깨끗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적’ 이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굴욕을 감안 것인지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복수… 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