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명예를 위하여
* * *
나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마왕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난 속으로 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일단은 어느 정도 먹힌 것 같네, 확실히 최대한 감정을 담아서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길 잘 했어.’
용사로서 히로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야기들.
비록 내가 진짜로 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감정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NTR 게임의 피해자로서 필연적으로 가슴에 맺힐 수 밖에 없는 분노와 짜증의 감정.
심지어 그것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닌 친구 녀석의 ‘배신’의 결과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인 만큼, 난 가슴 속에 맺혀 있는 이러한 불쾌함을 최대한으로 추출해 내 눈 앞에 있는 마왕에게 진심 어린 한탄을 하는 데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진심’ 잘 전달되었는지 마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으며, 이에 난 조금만 더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짐도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구나.. 용사인 그대와 마찬가지로 짐 역시 마왕으로서 마족들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몸. 그 노력이 배신으로 되돌아 온다면 짐 역시 그렇게 절망 할 수 밖에 없겠지..”
“…그리 말해주니 감사합니다.”
씁쓸함을 담아 동정의 말을 꺼내는 마왕.
이어서 그녀는 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달했다.
“그런 점에서.. 짐은 그대에게 전사로서의 자비를 내리고 싶다만, 그대는 어떻게 생각 하는 가?”
“!...”
관대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는 마왕.
이 말을 들으면서 난 한 순간 기쁨의 감정이 얼굴에 튀어나오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일단은 최대한 이를 감춘 채 씁쓸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괜히 여기서 섣부르게 좋아했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모조리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그렇게 난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표정관리를 한 채,
눈 앞에 있는 마왕을 보면서 여전히 절망의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힘 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자비라. 마왕 당신은 듣던 것 보다 훨씬 관대한 분이시군요. 그래도 한때 당신을 죽이려고 검을 들었던 저에게 자비라니..”
“비록 마족과 인간 이라는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지만 그대와 짐은 용사와 마왕이기 이전에 모두 검을 휘두르는 전사다, 마지막 가는 길예 명예를 지켜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지.”
‘….엥?’
다음 순간, 무언가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마왕의 말.
이에 나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짙은 당혹감이 깃들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향해서 마왕은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평온하면서 명예로운 죽음을 안겨주도록 하겠다. 시신은 정중히 장례를 치른 뒤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지.”
내가 생각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마왕.
이 예기치 못한 사태에 난 짙은 혼란에 사로잡힌 채 다급하게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좇됐다.. 이거 잘못 하면 진짜로 명예로운 죽음 어쩌고 하면서 바로 모가지가 잘려나가게 생겼잖아.’
그녀 딴에는 아마도 고문이라 다른 무언가를 시도할 생각이었으나, 일단 나의 구구 절절한 사연을 들으면서 이대로 날 얌전히 황천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듯싶었다.
일단 그것만 보면 상황이 호전 된 것은 맞지만 나의 목적은 당연히 명예로운 죽음 같은 허울 좋은 게 아니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이대로 뒤질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기서 괜히 살려달라고 애걸하기 시작할 경우 자칫 다시금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예정대로 고문 후 처형 이라는 최악 Of 최악 의 루트를 탈 수도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최대한 도도한 전사로서의 모습을 유지 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설득시킨 다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을 만족 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 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게임으로 쌓은 짬이 얼마인데 어떻게 해서든 머리를 굴려 이 위기를 극복해야..’
진짜로 목숨이 걸린 문제인 만큼,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눈 앞에 있는 그녀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
이에 난 오버히트가 날 것 같은 느낌으로 생각을 회전시킨 끝에, 너무 늦지 않도록 눈 앞에 있는 마왕에게 가능한 신속하면서도 울적한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확실히 전사에게 있어서 명예로운 죽음은 무엇보다 귀중한 법이지요.”
“그래, 허면 곧바로 부하들에게 일러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약을…”
“하지만.. 배려에도 불구하고 저의 이름은 그리 명예롭게 남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어.. 어째서 인가?”
진한 절망이 느껴지는 나의 말, 이에 마왕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감돌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난 최대한 슬픔과 절망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를 남겨둔 채 도망친 용사파티의 동료들.. 아마 그들은 저희들을 후원해 주었던 종족연합의 군주들 앞에서 저를 거침 없이 깎아 내릴 것입니다. 그녀들이 짐꾼과 함께 모의한 더러운 술수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말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까지..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려다 죽은 전사에 대한 예의조차 없다는 것인가?”
“살아있는 저조차 이용하려던 자들입니다. 이미 죽어 버린 이후에는 당연히 말 할 것도 없지요.”
“...”
반박할 수 없는 나의 말에 그대로 말문이 막힌 듯 한 모습을 보이는 마왕.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난 최대한 공허함에 가득한 표정을 지은 그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들이 절 버린 순간부터 모든 것은 끝나 있었습니다. 공적을 차지했다면 그것을 뺏기 위해서, 실패 했다면 그 실패를 메우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은 저를 단호하게 내버렸겠지요. 이미 저에게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구원의 여지란 없었던 것입니다.”
“….”
나의 말을 들으면서, 방금 전 보다 한 층 더 짙은 연민의 감정을 보이기 시작하는 마왕.
그런 그녀를 향해서, 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천천히 떡밥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전 그저 무모하게 마왕에게 덤벼들었다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린 어리석은 남자로 남게 되겠지요. 영웅으로 남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을 해왔지만.. 이미 인간으로서 저의 명예 따위는 산산이 부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아.…”
나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마왕.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난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을 느끼며 부디 그녀가 먹이를 잘 물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시작했다.
전사로서 명예란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잃어 버린 채 더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
진정한 전사라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순간의 굴욕조차 감수하는 것이 원칙인 만큼, 지금의 난 은연중에 그녀에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뜻을 이해한 듯,
이내 마왕은 나를 보면서 심각하면서도 진지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깝구나 용사여.. 그대와 같은 강인한 자가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어 버리다니..”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
이를 들음 과 동시에, 난 그녀가 미끼를 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최대한 절망에 사무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 어찌하겠습니다. 이것이 다 저의 운명인 것을.. 이를 바꿀 기회가 있다면 좋겠지만 저에게 그런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겠지요..”
물론 생길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생겨야만 했다.
애초에 그걸 기대하고 이 짓을 하고 있는 나였으니까.
“…기회라.. 그 말은 즉.. 그대의 앞에 다른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잡아 보겠다는 뜻인가?”
‘왔다!’
한 순간, 마치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마왕의 말.
이에 대해서, 난 진한 흥분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최대한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글쎄요.. 뭐.. 이런 저라도 무언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네. 한 번쯤을 시도를 해보고도 싶군요. 지금까지 전.. 너무나도 미련하면서 무의미한 삶을 살아 왔으니까 말이지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 한 후회의 대사를 날리는 나.
하지만 이 체념한 듯 한 대사 안에는 ‘명예를 위해서뭐든 할 테니 일단 나 좀 살려 주십시오!’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마왕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감이구나..”
‘저기..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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